美 상대하는 외교 정석 보여준 英 메이어 前대사 별세

김태훈 2022. 7. 30. 1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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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1 테러가 터지고 미국·영국이 이라크를 침공한 격동의 시기에 주미 영국대사를 지내며 영·미 관계를 탄탄히 다진 크리스토퍼 메이어 전 대사가 27일(현지시간) 프랑스에서 78세를 일기로 별세한 사실이 뒤늦게 전해졌다.

고인은 회고록에서 "이라크 침공에서 영국이 미국에 끌려다닌 것은 블레어 내각의 불찰"이라며 비판했고, 이 때문에 자신을 주미 대사로 임명했던 블레어 총리와 사이가 서먹해지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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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2003년 주미 英대사로 양국관계 다져
이라크 침공엔 회의적.. 블레어 총리와 이견
존슨 英총리 "조국에 헌신한 위대한 외교관"

9·11 테러가 터지고 미국·영국이 이라크를 침공한 격동의 시기에 주미 영국대사를 지내며 영·미 관계를 탄탄히 다진 크리스토퍼 메이어 전 대사가 27일(현지시간) 프랑스에서 78세를 일기로 별세한 사실이 뒤늦게 전해졌다.

29일(현지시간) 영국 데일리메일에 따르면 고인은 부인과 함께 프랑스 알프스에서 여름 휴가를 보내던 중 뇌졸중으로 타계했다.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고인의 사망 소식을 접하고 슬프다”면서 “그는 외교관 경력 전체를 통해 국가에 헌신적인 봉사자였으며, 자신의 전 생애를 외교에 바쳤다”고 추모했다.

크리스토퍼 메이어(1944∼2022) 전 주미 영국대사. 사진은 대사 시절인 2001년 미국 국방부 관계자와 협의하는 모습. 미 국방부 홈페이지
BBC 등에 따르면 고인은 1944년 잉글랜드 비콘스필드에서 태어났다. 당시는 제2차 세계대전 말기였고 공군 장교였던 고인의 부친은 아들이 태어나기 불과 13일 전 그리스 전선에서 독일군과 싸우다 전사했다. 명문 케임브리지대학교에서 역사학을 공부한 뒤 1966년 영국 외교부에 들어가 직업외교관으로서 첫발을 내디뎠다.

소련(현 러시아) 모스크바, 스페인 마드리드, 그리고 유럽연합(EU) 본부가 있는 벨기에 브뤼셀 등에서 해외근무를 한 고인은 보수당 출신 존 메이저 총리 시절인 1993∼1996년 총리실 대변인을 지내는 등 잠시 정치에 몸담기도 했다. 1997년 보수당에서 노동당으로 정권교체가 이뤄진 뒤 토니 블레어 신임 총리는 고인을 독일 주재 영국대사로 보냈다가 곧장 미국 주재 대사로 발령했다. 외교부 입부 31년 만에 영국 외교에서 가장 중요한 직위인 주미 대사 자리에 오른 것이다.

그때부터 대사를 그만둔 2003년까지는 말 그대로 격동의 시기였다. 이 기간 미국에선 민주당 빌 클린턴 행정부에서 공화당 조지 W 부시 행정부로부의 정권교체(2000), 알카에다에 의한 9·11 테러(2001), 미국·영국의 이라크 침공(2003) 등 굵직한 사건이 잇따랐다.

2001년 크리스토퍼 메이어 당시 주미 영국대사(왼쪽)가 백악관에서 조지 W 부시 당시 미국 대통령과 함께한 모습. 게티이미지 제공
고인은 영국 블레어 내각과 미국 클린턴 및 부시 행정부 간에 긴밀한 관계가 이어지도록 하는 데 최선을 다했다. 2005년 펴낸 회고록에서 고인은 “미국에 부임해보니 영국 외교관들은 ‘미국에 어떤 정부가 들어서도 영·미 관계는 탄탄하다’는 자신감에 빠져 있었다”며 “하지만 내가 보기엔 영국 외교가 워싱턴 정관계에 미치는 영향력은 놀라울 정도로 미미했다”고 밝혔다.

대사로 있던 기간 고인은 거의 매일 미국의 유력 인사들과 만나 식사 등을 함께하며 영국의 존재감을 끌어올렸다. 당시는 민주당 클린턴 정권이었으나 고인은 야당인 공화당 인사들과의 접촉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덕분에 조지 W 부시가 2000년 대통령에 당선되며 정권교체가 이뤄진 뒤에도 영·미 관계를 탄탄히 다질 수 있었다. 2003년 고인이 대사를 마치고 영국으로 돌아가기 전 부시 대통령은 백악관에서 부부동반 만찬을 베풀며 그의 이임을 아쉬워했다.

다만 고인은 영국이 미국과 함께 2003년 이라크를 침공한 것에는 찬성하지 않았다. 당시 미국은 “이라크가 대량살상무기(WMD)를 갖고 있다”며 전쟁의 불가피성을 강조했으나, 결과적으로 이라크에 WMD는 없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고인은 회고록에서 “이라크 침공에서 영국이 미국에 끌려다닌 것은 블레어 내각의 불찰”이라며 비판했고, 이 때문에 자신을 주미 대사로 임명했던 블레어 총리와 사이가 서먹해지도 했다.

김태훈 기자 af103@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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