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울합니다, 도와주세요!"..인권위를 향한 '어떤 호소의 말들'

김태형 2022. 7. 30. 09:01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A 씨는 틈나는 대로 서울의 한 파출소를 주시했습니다. 자신이 본 내용을 토대로 진정서를 내고 또 냈습니다. 파출소 직원의 근무 태만이나 직무 유기에 관한 내용들이었습니다.

‘경찰이 근무 중에 프로야구 중계를 봤습니다.’

‘순찰차를 아무 곳에나 세워놓고 낮잠을 잤습니다.’

‘파출소장이 양치질하면서 양칫물을 도로에 함부로 뱉었습니다.’

공무원이 이래도 되느냐, 인권침해 아니냐, 진정서를 연이어 냈습니다. 경찰은 민원 제기가 너무 많다며 힘들어했고, 인권위의 베테랑 조사관은 진정서 ‘투척’을 하는 이 시민이 혹시 꼬투리 잡기에 혈안이 돼 있는 것은 아닐까 우려하기도 했습니다.

조사관이 진정인을 만납니다. A 씨는 조사관을 만나기 위해 하루 일당을 포기하고 제일 좋은 옷을 입고 나왔다며 인사를 합니다. 조사관은 그가 입은 옷이 통이 넓은 회색 양복바지에 체크무늬 잠바였다고 기억합니다. 그의 옷은 유행이 한참 지나 보였고, 더워지기 시작한 5월 말에 입을만한 옷도 아니었습니다. A 씨는 뜻밖의 얘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저는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사람인데, (잘못한 일도 없는데) 동네에서 자주 불심검문을 당했습니다. 기분이 나쁘더라고요. 하루는 (또 불심검문을 당하지 않을까 생각이 들어) 경찰관을 피해서 길을 건넜는데, 무단횡단으로 잡혔습니다. 아무리 사과해도 봐주지 않고 딱지를 뗐습니다. 저에게는 큰돈이었습니다. 억울한 심정이었지만, 하소연할 곳도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우연히 순찰차에서 낮잠을 자는 그 경찰관을 보게 됐습니다. 법이 그렇게 무서운 거라고 하더니, 자기들은 아무 데다 불법주차하고 근무시간에 막 자고 그래도 됩니까? 당신들도 당해봐라, 그런 생각이 들지 않겠어요?”

A 씨가 근무시간에 낮잠을 잔 경찰이나 프로야구 중계를 본 경찰을 고발하는 진정서를 제출했던 데는 이와 같은 사연이 있었습니다. 왜 법은 자신과 같은 약자에게만 가혹한 것인가, 항변이자 외침이었던 셈입니다.

A 씨는 인권위 조사관과 면담을 한 뒤, (자신의 얘기에 귀를 기울여 주는 사람이 없었는데) ‘악성 민원인’인 자기 말을 들어주어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진정 취하서를 썼습니다. 그는 조용히 파출소를 떠났습니다.


해마다 수많은 사람이 국가인권위원회의 문을 두드립니다. 인권위는 ‘모든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보호’하기 위해 설립된 곳입니다.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경우 인권 관련 법령이나 정책, 관행에 대해 권고나 의견을 표명합니다. 수사 기관이나 법원은 아니지만, 체포나 구속, 재판의 절차 중에 피의자나 피고인의 권리가 침해되었는지를 조사해 인권침해 여부 등을 밝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인권위는 홈페이지 전면에 ‘국가인권위원회는 누구에게나 활짝 열려있습니다.’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인권과 관련된 문제라고 생각이 들면 A 씨처럼 인권위에 상담을 요청하거나 진정 신청 등을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인권위를 찾아 억울함을 호소하고, 법에 따라 호소 내용이 진정사건으로 접수되면 조사관이 A 씨와 같은 진정인의 얘기를 들어주거나, 만나 보고, 자료를 확인합니다. 때로는 현장에도 나가 보고, 보고서를 쓰고, 기록철을 작성합니다.

인권위에는 100여 명의 조사관이 있는데, 위 사례에 나온 A 씨의 하소연을 들어줬던 사람은 최은숙 조사관입니다. 최은숙 조사관은 2002년부터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베테랑 조사관인 그가 이달 초 책을 냈습니다.

‘어떤 호소의 말들’입니다.

제목에서 엿볼 수 있는 것처럼 책에는 앞서 나왔던 A 씨의 사례를 비롯해 인권위에 억울함을 호소한 수많은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참고로, 국가인권위원회 진정·민원 접수 메일 주소의 아이디도 호소(hoso@humanrights.go.kr)입니다.


최은숙 조사관은 책 프롤로그를 통해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일하면서 차마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억울함을 끌어안은 사람들을 만났다’고 밝히면서 ‘법률과 제도로 규정되는 인권이 아니라 조금 슬프고, 이상하고, 귀엽기도 한 모순된 존재인 우리의 모습 안에서 인권을 말하고 싶었다.’라고 털어놓았습니다.

책 속 억울한 사연은 세상사 이야기만큼이나 다양합니다. 지난 2002년 세상을 놀라게 했던 검사의 피의자 폭행치사 사건을 비롯해 코치에게 시도 때도 없이 맞았다는 운동선수의 사연, 직장에서 벌어진 성폭력 사건의 피해자 사연, 누명을 쓰고 오랜 기간 징역을 산 사람의 사연이 나옵니다. 글을 읽을 줄 몰라 기본적인 자기방어에도 서툴렀던 사람의 안타까운 일화도 등장합니다.

저자는 조사관으로 일하다 보면 억울하다는 얘기를 많이 듣게 된다고 말합니다. 사전적 의미로 본다면 ‘아무 잘못 없이 꾸중을 듣거나 벌을 받거나 하여 분하고 답답’한 사람들입니다. ‘내가 왜 이런 일을 당해야 하는지’, ‘왜 나만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지’, 속이 타들어 가는 사람들이 그만큼 많다는 뜻이 될 겁니다. 최은숙 조사관은 그런 만큼, 처음 생각했던 책 제목은 ‘억울할 때 읽는 책’이었다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억울함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은 통계로도 확인됩니다. ‘2021 국가인권위원회 통계’ 보고서에 의하면, 인권위는 지난해(2021년) 상담만 모두 3만 6,343건을 처리했습니다. 하루 백 건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유형별로 보면 인권침해가 1만 1,615건, 차별행위가 2,054건, 기타 상담이 2만 1,602건 등이었습니다.

인권침해 상담을 기관별로 보면, 다수인보호시설이 4,030건으로 가장 많았습니다. 이어 경찰, 교육기관, 공공기관, 지방자치단체 순이었습니다.


차별행위 상담을 사유별로 보면, 장애 차별 관련 상담이 614건으로 가장 많았습니다. 이어 성희롱 피해 상담, 사회적 신분을 이유로 한 차별, 나이를 이유로 한 차별, 출신 국가를 이유로 한 차별 순이었습니다.


2021 인권위원회 통계는 다수인보호시설, 경찰, 교육기관 등 여러 기관과 관련해 인권침해 상담이 이뤄지고 있으며, 동시에 장애나 나이 등 여러 사유로 차별행위에 대한 상담이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난 20여 년간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온갖 종류의 억울한 사람들을 만나왔던 최은숙 조사관은 인권위 문턱은 높지 않다고 말합니다. ‘누군가 억울한 일로 잠 못 이룰 때, 무작정 분노를 폭발하거나 유명 변호사를 찾아가 큰돈을 들여 소송을 제기하기 전에, 국가가 제도적으로 억울한 피해자들을 구제하기 위해 마련해놓은 다양한 절차를 잘 활용해 볼 수 있다면 좋겠다’는 게 최은숙 조사관의 생각입니다.

인권 상담전화는 국번 없이 1331입니다.

김태형 기자 (inblue@kbs.co.kr)

Copyright © KBS.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이용(AI 학습 포함)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