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랏빚 1075조·한전 적자 30조..文정부 '업보'가 안긴 역설
[편집자주] 출범 후 불과 80일을 넘긴 윤석열 정부 앞에 글로벌 복합 경제위기의 암운이 드리우고 있다. 그러나 새 정부는 달콤한 '단기처방'을 거부한다. 나랏돈을 동원한 포퓰리즘 대신 규제개혁으로 경제 체질을 정부 주도에서 민간 주도로 바꾸겠다고 선언했다. 눈앞의 인기보다 국가의 미래를 앞세운 선택이다. 윤석열 정부가 사면초가의 위기를 타개할 수 있는 해법을 찾아본다.
문재인 정부 경제정책의 업보가 윤석열 정부를 짓누르고 있다. 지난 정부가 추진한 '돈 풀기' 정책이 재정건전성 악화로 이어져 경기 둔화가 예상되는 내년엔 정작 재정지출이란 카드를 쓸 수 없는 상황이다. 문재인 정부의 전기요금 인상 억제, 탈원전 정책은 윤석열 정부 들어 '고물가 속 공공요금 인상'이라는 역설적인 상황을 초래했다.
지금은 고물가가 경제의 불안요인이지만 올 연말 물가상승세가 한풀 꺾이고 나면 내년 이후엔 오히려 글로벌 경기둔화에 따른 저성장이 걱정거리가 될 가능성이 높다. 최근 IMF(국제통화기금)는 우리나라의 성장률 전망치를 올해는 2.5%에서 2.3%로, 내년은 2.9%에서 2.1%로 하향 조정했다.
정부가 성장률을 끌어올리기 위해 쓸 수 있는 가장 대표적인 카드가 '재정지출 확대'다. GDP를 구하는 공식이 'C(소비)+I(투자)+G(정부지출)+NX(순수출)'이라는 점에 비춰볼 때 재정지출은 정부가 직접적으로 경제성장률을 끌어올릴 수 있는 방법이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 때 나랏빚이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으로 불어나 윤석열 정부는 정작 위기 상황에서도 재정지출을 원하는 만큼 늘리기 어려워졌다. 문재인 정부 출범 첫해인 2017년 정부의 연간 예산(본예산 기준)은 400조5000억원이었다. 이후 5년 동안 재정지출 규모가 급격히 확대되면서 올해 재정지출 규모는 본예산 기준 607조7000억원, 문재인 정부때 편성한 1차 추가경정예산 기준 624조3000억원까지 불어났다. 국가채무는 2017년 660조2000억원에서 올해 1075조7000억원(1차 추경 기준)으로 5년 동안 415조원 넘게 불어났다. 같은 기간 GDP 대비 국가채무비율은 36%에서 50.1%로 14%포인트(p) 가까이 높아졌다.
윤석열 정부는 지난 5년간 이어진 확장재정을 멈추고 건정재정 기조로 전환하기로 했다. 현 수준의 나랏빚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는 판단 때문이다.
최상대 기획재정부 1차관은 지난 6일 국가재정전략회의 사전브리핑에서 "국제기구나 신용평가사와 협의를 할 때 더이상 재정건전성이 우리의 강점이 되고 있지 않다"며 "최근 연례협의회 등에서 신용평가사, 국제기구가 우려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고 말했다. 국가신용등급 하락에 따른 우리 수출 기업 등의 피해를 막으려면 당장 경기 부양에 제약이 있더라도 건전재정 기조로 전환이 불가피한 셈이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지난해와 올해와 같은 수준의 재정지출 확대 추세는 곤란하다"며 "그러나 재정지출을 축소하면 경기 부양에 부담이 되기 때문에 지출구조조정을 통해 아낀 재원으로 저소득층과 취약계층을 지원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윤석열 정부 경제팀의 또 다른 숙제는 '고물가 속 공공요금 인상'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6월 소비자물가지수는 전년동월대비 6% 오른 108.22에 달했다. 물가상승률이 6%를 넘긴 것은 외환위기 때인 1998년 11월(6.8%) 이후 23년 7개월 만이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소비자의 기대인플레이션율(향후 1년 동안의 예상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7월 4.7%로 6월(3.9%)보다 0.8%포인트(p) 올라 당분간 물가 고공행진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정부가 일반 상품·서비스의 가격을 통제할 수 없는 만큼 '공공요금'은 정부가 물가 안정을 위해 활용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카드 중 하나다. 그러나 윤석열 정부는 이달부터 전기요금과 가스요금을 동시에 올릴 수밖에 없었다. 문재인 정부의 에너지 가격 인상 억제, 탈원전 정책 추진으로 한국전력공사가 올해 천문학적 수준의 적자를 기록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한전의 영업적자는 올해 1분기에만 7조7869억원에 달했다. 지난해 연간 적자액 5조8601억원보다 2조원 가까이 많은 수준이다. 박일준 산업통상자원부 2차관은 최근 KBS '일요진단 라이브'에 출연해 한전의 적자와 관련해 "지난 정부의 에너지 전환 정책으로 재생에너지 등 비용이 비싼 발전 방식의 비중이 늘면서 구조가 바뀐 상태에서 해외 연료의 가격이 올라가니 충격을 조금 더 크게 받은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박 차관은 또 "연말 한전의 적자가 30조원에 달할 가능성이 크다"며 "궁극적으로 이를 해결할 방법은 전기요금 인상"이라고 말했다.
고물가와 코로나 사태 장기화로 서민 경제 어려움이 커지고 있지만 물가와 환율 안정을 위해 기준금리 인상이 불가피한 것도 윤석열 정부 경제팀의 고민거리다.
한은에 따르면 1분기 말 기준 우리나라의 가계부채는 1859조4234억원에 달했다. 국제금융협회(IIF)가 지난 6일 발표한 '세계 부채 모니터' 보고서에 따르면 1분기 기준 한국의 GDP 대비 가계부채 비율은 104.3%로 조사대상 36개국 중 가장 높았다. 이런 상황에서 기준금리가 0.5%p 오르면 연간 이자부담은 약 7조1588억원 늘어난다. 가계대출에 영향을 주는 시중금리가 기준금리보다 빠르게 오르는 점을 고려하면 기준금리 인상시 이자부담은 이보다 더 커질 수도 있다.
그럼에도 통화당국은 고물가 지속, 한미 기준금리 역전에 따른 자본 유출 가능성 등을 고려해 당분간 기준금리 인상 기조를 이어갈 것으로 보인다. 한은은 지난 13일 금융통화위원회를 열고 기준금리를 연 1.75%에서 2.25%로 올리는 '빅스텝'을 단행했는데, 이창용 한은 총재는 이날 브리핑에서 "연말 기준금리가 2.75~3.0% 수준에 도달할 것이라는 시장의 예측은 합리적"이라며 올해 기준금리를 추가로 0.5∼0.75%p 인상할 뜻을 시사했다.
김낙회 전 관세청장은 머니투데이와 통화에서 "물가를 잡기 위해 기준금리 인상이 필요하지만 여기에는 부작용이 따를 것"이라며 "정책적으로 균형을 잘 잡아서 적정하게 물가 상승을 억제하면서 경기침체로 연결되지 않도록 해법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금리인상에 따른 취약계층의 이자부담 급증에 대해선 비(非)금융 경감조치가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김철주 전 청와대 경제금융비서관은 "시장원리를 지키는 선에서 청년들이 고금리 상황에서 어려움을 헤쳐나갈 수 있도록 이자에 대해 세액공제를 해주는 등 세제혜택을 통해 지원하는 것이 모럴해저드를 피하면서도 현실적으로 도움이 되는 방안"이라고 말했다.
"지금 연준은 '볼커식 인플레 싸움' 전략을 모방해야 한다."
지난 22일(현지시간) 파이낸셜타임스(FT)는 제롬 파월 미 연방준비제도(연준, Fed) 의장이 '뚝심있는' 고금리 정책으로 1980년대 미국 최악의 스태그플레이션(경기침체 속 물가상승)을 종식시킨 폴 볼커(Paul Volcker) 전 연준 의장을 벤치마크해야 한다는 내용의 사설을 실었다.
전 세계적으로 '물가와의 전쟁'을 돌이켜볼 때 최고의 성공 사례로 꼽히는 것이 1979년부터 1987년까지 8년간, 민주당 카터 정부에서부터 공화당 레이건 정부에 이르기까지 연준 의장을 역임하며 강력한 고금리 정책을 이끈 볼커의 긴축정책이다.
볼커는 경기침체를 감수하고 가파르게 금리를 올려 '인플레이션 파이터'로 불린다. 2018년 출간한 회고록에서 그는 "오늘 1달러로 살 수 있는 만큼을 내일도 살 수 있다는 믿음을 유지하게 하는 것이 통화정책의 근본적인 의무"라고 주장했다.
◆석유파동 뒤 겪은 스태그플레이션…단번에 4%P 금리 인상
미국 경제는 1960년대 중반 이후 분기별 실질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이 평균 4.8%에 달할 정도로 호황을 누렸다. 경기 호황과 확장적 거시정책 기조는 거대한 인플레이션의 단초로 작용했다. 당시 닉슨 정부는 다소 높은 물가를 용인하면 낮은 실업률을 유도할 수 있다는 판단에 따라 확장적 정책을 유지했다. 물가보다 고용을 우선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1970년대에 불어닥친 두 번의 석유파동은 미국 경제를 단숨에 스태그플레이션으로 몰아넣었다. 에너지와 생필품 가격이 급등했다. 달러화 가치는 떨어지고 실업률은 높아졌다. 1973년 4월부터 1982년 10월까지 미국의 월별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대부분 5%를 넘겼고, 1980년 3월에는 최고인 14.8%를 나타냈다. 9%대인 최근 미국의 물가 상승률을 훌쩍 넘는다.
1979년 8월 연준 의장에 취임한 볼커는 강력한 긴축정책을 실시했다. 그는 1979년 10월 6일 경기침체 상황에서도 기준금리를 11.5%에서 15.5%로 4%포인트(p)나 올리는 조치를 단행했다. 은행의 대출금리는 연 18% 가까이 수직상승했다. 주식과 집값이 폭락했고 기업들의 파산이 잇따랐다. 하지만 물가를 잡기에는 그것도 부족했다. 볼커는 1981년 기준금리를 21.5%까지 올렸다.
경기침체를 감수하고서라도 물가를 잡겠다는 의지를 보여준 것이다. 하지만 기업이 파산해 수백만명이 일자리를 잃으면서 실업률은 10%를 넘겼다. 빚더미에 앉게 된 농민들은 트랙터를 몰고 수도 워싱턴DC로 향했다. 201㎝의 장신인 볼커는 늘 권총을 지니고 일을 할 정도로 살해 위협에 시달렸다.
◆과정은 쉽지 않았다…3년의 고통 뒤 본 희망
3년간의 고통스러운 긴축 끝에 점점 결과가 나오기 시작했다. 초고금리를 찾아 돈이 은행으로 들어왔고 시중 유동성이 잡혔다. 1980년 살인적 수준인 14.8%였던 미국 물가상승률은 1981년 9%로 떨어지며 희망을 보여줬고, 이듬해 4%를 거쳐 1983년에는 2.36%까지 급전직하했다.
중동의 지정학적 리스크가 완화되고, 석유 증산이 이뤄지면서 원유 가격이 급락, 2차 오일쇼크가 막을 내린 것도 도움이 됐다. 볼커의 강력한 고금리 정책에 힘입어 물가안정과 산업 구조조정이란 '두 마리 토끼'를 잡은 미국은 1990년대 이르러 역사상 최고의 호황기를 누리게 된다.
FT는 "볼커는 1980년, 1981~82년의 경기침체 기간 동안 포퓰리즘, 자신을 해고해야 한다는 여야 의원들의 초당적 합의, 완화적 통화정책으로 해달라는 재무장관의 공개적인 요구에도 굴하지 않았다"고 전했다.
아울러 FT는 "파월은 볼커를 존경한다고 말하면서 볼커와 똑같은 전략을 택하지는 않고 있다. 파월이 선호하는 방식은 공격적인 금리 인상이지만 불황에 접어들면 금리를 내릴 준비가 돼 있는 것처럼 보인다"면서 "파월은 볼커의 본보기를 따라야 한다"고 제언했다.
한편 볼커와 파월의 상황이 다르다는 분석도 있다. 뉴욕타임스(NYT)는 볼커 당시의 물가 상승세가 10년간 장기간 이어졌다면 현재 미국의 물가 급등은 1년 남짓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또한 양적완화 등으로 급증한 미국 정부의 현재 부채 수준이 금리 인상의 걸림돌이 된다고 설명했다. 다만 임금이 빠르게 오르면서 '임금 인상→물가 상승'의 악순환이 벌어지고, 유가 상승이 물가를 부추긴 점은 공통점으로 꼽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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