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세대 청소 노동자와 손잡고 노래할 거야
대학 시절, ‘민중가요’들을 담은 노래집을 뒤적이다가 매우 고답적인 제목의 노래를 접했어. ‘노농(勞農)동맹가.’ 외국의 번안곡이라는데 일단 흥행(?)에는 실패한 노래였다. 제목도 가사도 식상했던 데다 한국어 가사와 가락이 영 들어맞지 않았기 때문이야. 별 노래 아닌가 보다 덮어버렸지만 이는 크나큰 오해였다. 그 노래는 칠레의 가수이자 ‘누에바 칸시온(스페인어로 ‘새로운 노래’)’ 운동의 기수 빅토르 하라의 ‘벤세레모스(Venceremos)’였거든.
빅토르 하라는 1932년 칠레에서 가난한 소작농 아버지와 칠레 남부의 원주민인 마푸체족 혈통의 어머니 사이에 4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어머니로부터 음악적 재능과 정서를 물려받은 그는 신학교에 입학했는데 신학교의 규율에는 쉽게 적응하지 못했던 것 같구나. “하라는 자신의 육체를 부정하는 금욕적 의무만은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육체적 사랑을 느낄 때마다 하라는 샤워기 아래서 발가벗은 몸을 때리며 형벌을 주어야 했다(〈가톨릭일꾼〉 오늘의 성인).”
이후 그가 가정을 꾸린 과정만 봐도 그는 ‘신부님’은 되지 못할 사람이었어. 영국 출신의 무용가 조앤 앨리슨 터너는 칠레의 무용가 파트리시오와 사랑에 빠져 칠레로 온 이방인이었다. 그녀는 칠레의 대학에서 안무를 강의했고 빅토르 하라는 그 학생이었지. 하지만 빅토르는 당돌하게도 안무 선생을 마음에 담았고, 그녀가 남편으로부터 버림받아 상심에 빠졌을 때 꽃다발을 들고 찾아가 구애한 끝에 그녀와 맺어진다. 이런 사랑꾼에게 신부가 될 말이겠니.
결혼 이전부터 빅토르 하라는 노래를 통해 사회 변화를 촉구하는 ‘누에바 칸시온’ 운동의 활동가였고, 조앤과 결혼한 이후 연극·무용 등 더욱 다양한 장르까지 섭렵하며 예술을 통해 억압받는 이들의 단결을 호소했다. “나는 사랑이 어떤 일을 해낼 수 있는지, 진정한 자유가 무엇을 해낼 수 있는지, 행복한 인간의 힘이 어떤 결과를 일궈낼 수 있는지 보았다. 이 모든 이유로, 그리고 무엇보다 평화를 바라기 때문에, 나는 슬픔이나 행복의 감정에 돌파구를 만들어줄 내 기타의 나무통과 줄이 필요했다.”
여기서 잠깐 당시 칠레의 상황을 좀 들여다보자꾸나. 남아메리카 대륙에서 칠레는 약간 특이한 역사적 전통을 지닌 나라야. 남미의 많은 나라가 겪은 정치적 혼란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웠고 일찌감치 민주주의 선거 시스템을 작동시켜왔거든. ‘남미의 일본’이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칠레는 남미에서 정치 경제적으로 앞서가는 나라였다.
하지만 극심한 빈부격차와 사회적 불평등만은 칠레 역시 심각한 형편이었다. 빈민들은 제대로 된 의료 혜택을 받지 못하고 속수무책 스러지는 경우가 흔했지. 이런 현실에 분개한 의사이자 정치인이 한 명 있었다. 살바도르 아옌데. 칠레에는 합법화된 공산당이 있었지만 아옌데는 사회당을 창당하는 데에 앞장섰어. 소련의 세계혁명 전략을 추종하는 공산당이 아닌, 칠레의 현실에 맞는 사회주의 정당을 추구했던 거지. 1952년, 1958년, 1964년 모두 6년 임기의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지만 쓴잔을 들이켠 아옌데는 1970년 다시 한번 출사표를 던진다.
노벨 문학상에 빛나는 시인이자 칠레 공산당 후보였던 파블로 네루다의 양보까지 받아내면서 좌파 연합이라 할 ‘인민연합’의 후보로 나선 아옌데를 위해 만들어진 노래가 글머리에 이야기한 ‘벤세레모스’였어. 빅토르 하라는 이 벤세레모스를 뜨겁게 부르며 기나긴 국토의 칠레 전역에서 아옌데 열풍을 불러일으켰다. 벤세레모스는 ‘우리 승리하리라’는 뜻의 스페인어야. “여기 칠레 모두가 있다. 여기 인민연합이 온다. 농민, 학생과 노동자는 함께 노래하는 동지다. 우리 승리하리라….” 그리고 아옌데는 승리한다. 세계 최초로 선거를 통한 사회주의 정권이 탄생한 셈이야. 당연히 이 초유의 정권은 중남미 국가들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미국과 다국적기업은 물론 칠레 국내 기득권층에도 눈엣가시가 됐지.
“나의 기타는 총, 노래는 총알”
1973년 9월11일 칠레 군대는 쿠데타를 일으켰다. 아옌데는 기관단총을 들고 대통령 관저를 사수하다가 목숨을 잃었고 쿠데타군은 자신들을 거스르는 시민들을 살해하거나 체포해 끌고 갔다. 그들 중에 빅토르 하라도 포함돼 있었어. 쿠데타군 장교들은 빅토르 하라를 알고 있었어. “나의 기타는 총, 노래는 총알”이라며 사람들의 열기를 돋우던 예술가. “예술가란 진정한 의미에서 창조자여야 한다. 그럼으로써 그 본질 자체로부터 혁명가가 된다”(〈끝나지 않은 노래〉 조앤 하라 지음)라며 바닥의 사람들을 일깨우고 일으키던 다윗을 골리앗들이 몰라볼 리가 없었지. 죽음 직전의 마지막 순간 그가 읊조린 시의 일부야. “오, 신이여, 이것이 당신이 만든 세상입니까? 7일 동안 당신이 행한 기적과 권능의 결과입니까… 노래하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공포를 노래해야 할 때에는….” 그 역시 두려움을 알았다. 하지만 노래의 돌팔매를 치켜든 칠레의 다윗은 살기등등한 군인들의 총 앞에서 매 맞아 퉁퉁 부어오른 입으로 노래했다고 해.
쿠데타가 일어나고 며칠 뒤 빅토르 하라는 무려 40여 발의 기관단총 세례를 받고 죽었다. 그의 손목은 부러져 있었어. 기타 현을 튕기던 그의 손이 얼마나 미웠으면 그랬을까. 그리고 하나 더, 그의 노래가 쿠데타를 주도한 사람들에게 얼마나 치가 떨렸으면 그토록 잔인했을까.
아빠는 그의 이념이 사회주의였는지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관심이 없다. 다만 불평등한 사회 구조에서 괴로움 당하고 불만을 터뜨리는 사람들이 있는 한, 그 불평등을 완화하고 해소하고 나아가 소멸시키려는 시도가 멈춘 적은 인류 역사에 없었다는 점만은 얘기해두고 싶다. 당연하게도 불평등 구조의 상위에 있는 사람들은 굳이 그 구조에 시비 거는 이들을 귀찮아하고 불온시하며 없애고 싶어 한다는 점도. “내 기타는 돈 많은 자들의 기타도 아니고/ 그것과는 하나도 닮지 않았지/ 내 노래는 저 별에 닿는 발판이 되고 싶어/ 의미를 지닌 노래는 고동치는 핏줄 속에 흐르지/ 참다운 진실을 노래하면서 죽어갈 자의 혈관 속에서…(빅토르 하라의 노래 ‘선언’)”라고 노래할 때, ‘돈 많은 자들’ ‘진실이 불편한 사람들’이 하라를 죽이는 것도 모자라 손목을 분질러야 했듯이 말이다.
하라를 증오한 사람들은 어마어마한 부자나 다국적기업 또는 ‘미제국주의’만은 아니었어. 칠레의 중산층, 즉 소꼬리 정도의 기득권을 지니고 닭의 머리는 된다고 자부하던 이들은 자신의 알량한 부와 지위에 영향을 미칠까 봐 아옌데에게 반대했고, “구리 광산에서 일하던 광부들은 ‘미국계 회사 노동자’ 신분에서 공기업 직원으로 바뀌면 급여가 줄어들까 우려해 연일 반대 데모를 벌였다(〈서울경제〉 ‘권홍우의 오늘의 경제소사’ 시즌 1)”. 누구에게나 자신의 것은 소중하다. 그러나 자신의 것만을 위해 남에 대한 관심이 엷어질 때 그 소중한 가치는 퇴색하고 세상을 짓누르는 탐욕의 사슬 한 자락으로 전락하게 마련이야. 얼마 전 학교 청소 노동자들의 시위가 자기 공부에 방해된다고 그들에게 민형사 소송을 제기한 연세대 학생들의 모습처럼.
아마도 지금 우리 곁에 빅토르 하라가 살아온다면, 그는 연세대에 들어가서 청소 노동자들의 손을 잡고 이렇게 노래할 거야. “일어나 당신의 손을 보소서. 우리가 손을 맞잡고 성장하게 하소서(빅토르 하라의 노래 ‘노동자를 위한 기도’ 중).” 누군가는 그 노래에 감동해 눈물을 흘리겠지만 또 어떤 이들은 다시금 하라의 손목을 부러뜨리고 싶은 충동에 시달리겠지. 그 상반된 힘 사이의 줄다리기 속에서 역사는 자신의 나아갈 바를 결정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거야.
김형민(SBS Biz PD)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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