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들 목소리'인가 '인기투표'인가.. '국민제안' 진정한 공론장 되려면
제한적 정보 제공에 '찬성'만 가능한 시스템
"소통방식 투명하게 하고 진짜 민의 반영해야"
“국민제안이 인기투표냐.”
윤석열 정부가 청와대 국민청원 제도를 폐지하고 신설한 새 정부 소통 창구인 ‘국민제안’에 대한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 28일 참여연대, 한국중소상인자영업자총연합회(한상총련) 등 시민사회단체들은 서울 용산 대통령 집무실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국민제안 TOP10은 정부가 원하는 정책을 국민의 선택이라는 명분으로 밀어붙이기 위한 요식행위”라고 비판했다. 국민제안이라는 이름과 달리 정부가 원하는 정책을 끼워 넣고 추진할 명분을 얻기 위한 도구가 아니냐는 것이다.
◆투명하지 않은 소통, 밀실에서 울리는 신문고
대통령실은 지난 정부의 국민청원이 여론을 왜곡하거나 세대, 이념 갈등을 촉발했다는 이유로 국민제안 내용을 공개하지 않기로 했다. 기존 국민청원은 누구나 국민들이 청원한 글의 ‘원문’을 볼 수 있었고 공감을 표시할 수 있었으며, 얼마나 많은 사람의 호응을 얻고 있었는지 수치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국민제안 홈페이지에는 제안 게시판이 따로 있지 않아 누가 어떤 제안을 했는지 볼 수 없고, 얼마나 공감을 받고 있는지 알 수 없다.
선정 방식도 달라졌다. 20만명 이상의 동의를 얻으면 정부가 답변을 해야 했던 국민청원과 달리 대통령실이 선정한 전문가 11명으로 구성된 국민제안심사위원회에서 국민들의 제안을 심사한 뒤 TOP 10을 선정한다. 즉 국민청원은 많은 국민들이 공감하는 의견을 수렴하는 이른바 바텀업(Bottom-up) 방식이었지만, 지금은 심사위원들에 의해 선정되기 때문에 어떤 제안이 어떤 기준으로 선정되는지 그 과정을 국민이 알 수 없다.
이처럼 선정 방식이 투명하지 않기 때문에 국민제안으로 선정된 것이 정말 국민들의 목소리인지, 특정 집단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는 비판이 나온다. TOP 10으로 선정된 제안인 ‘대형마트 의무휴업일 폐지’ 역시 많은 국민들이 필요로하는 제안인지 유통업계와 대기업들의 오랜 요구사항을 해결해주기 위한 것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전날 대통령 집무실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던 시민단체들은 “제도 도입의 취지와 사회적 합의 과정을 무시한 채 일부 계층의 이해를 앞세워 제도를 무력화시키려 하는 것”이라며 “대형마트 의무휴업법 폐지와 최저임금의 차등적용은 재계와 사용자 단체들의 지속적인 요구사항으로 윤석열 정부가 이들의 주장을 수용하기 위한 정당성 획득의 과정으로 의심된다”고 비판했다.
문재인 정부의 청와대 국민청원도 초창기에는 청원 게시판을 통해 약자들의 안타까운 사연이 공론화되고 제도 개선으로 이어지며 호평을 얻기도 했지만, 갈수록 이념 대결의 장이 된다는 비판이 많았다. 2019년 6월에는 자유한국당을 해산시켜달라는 청원에 183만명이 동참했고, 더불어민주당을 해산시켜달라는 청원에 33만명이 동참하는 등 여야 지지자들 간 대결의 장이 펼쳐졌다는 비판이 나왔다. 당시 국회에서 패스트트랙을 사용해 개혁법안들을 통과시키려는 여당과 물리력을 동원해 저지하려는 야당이 강하게 충돌하면서 지지자들 간 갈등도 극에 달했기 때문이다.
이런 갈등이나 대립 역시 민심의 일부라는 의견도 있었지만 대체적으로는 시민들 간 숙의와 토론을 할 수 있는 공론장이 아닌 정쟁을 조장하는 공간으로 변질됐다는 평가가 나왔다.
그런데 현재 진행되고 있는 국민제안 TOP 10 투표 역시 이와 비슷한 지적을 받고 있다. 투표 페이지에 들어가도 1차로 선정된 국민제안 10개의 제목과 한 줄로 된 내용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정보를 충분히 제공하지 않는 데다가 반론이나 다른 의견을 들을 수 없기 때문에 민의를 충분히 반영할 수 없다고 지적하고 있다. 또한 이와 같은 시스템상으로는 정책이나 아이디어를 제안하거나 동의한 국민이 정치적 효능감을 느낄 수 없기 때문에 시민들로부터 외면받을 가능성이 크다고도 말한다.
유현재 서강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 교수는 “이런 플랫폼은 소통 과정이 투명해야 하는데 국민제안의 경우 어떤 기준으로 제안이 선정되었는지 모르고, 정책에 대한 설명도 없기 때문에 보는 사람들은 의구심이 들 수밖에 없다”며 “대형마트 의무휴업일 폐지만 봐도 이게 과연 국민들의 간절한 이야기인지, 기업들의 민원창구인지 알 수 없다”고 말했다.
이어 “(전 정권의) 청와대 국민청원은 부작용도 많았지만 스피커가 작은 약자들의 돌파구가 되거나 시민들의 정치적 효능감을 높이는 순기능도 있었다”며 “국민제안이 외면받지 않으려면 소통 과정을 투명하게 보여주고, 관여도를 높여야 한다. 다시 말해 우리의 삶과 직결된 제안을 통해 이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느낌을 들게 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구현모 기자 lil@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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