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던 경성] 피카소도 반한 최승희의 ‘월드 투어’

김기철 학술전문기자 2022. 7. 30.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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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라이브러리속의 모던 경성]1938년부터 3년간 뉴욕, 파리, 브뤼셀, 중남미서 150회 공연…채플린, 스토코프스키도 만나
1939년 파리 공연 당시의 스물 여덟살 최승희. 한국무용사 연구자 이영란 박사가 2014년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에서 찾았다. 당시 유행하던 베레모를 쓰고 환하게 웃는 사진이다. 이 박사는 "평상복을 입은 이렇게 자연스러운 표정의 최승희 사진은 아주 드물다"고 했다.

‘만리 이역 양인(洋人)사이에 앉아 축음기로나마 우리 명창의 소리와 장고에 맞춰 최씨의 ‘기생춤’을 보고, 무용화한 ‘춘향전’(옥에서 신음하는 대목)을 보는 취미란 형언할 수 없는 바이다. 검무(劒舞)도 좋고, ‘서울의 무녀’도 흥미있었으나 이날 그중에서 제일 갈채받은 것은 ‘보살의 춤’과 ‘초립동이춤’이라 할까.’(‘구주에서의 최승희, 백이의(白耳義·벨기에)공연의 성공을 보고’, 조선일보 1939년3월14일)

1939년 2월6일 벨기에 수도 브뤼셀에서 최승희의 무용 리사이틀이 열렸다. 엿새 전 파리에 이은 유럽 두번째 공연이었다. 공연장은 브뤼셀의 대표적 복합문화공간 ‘팔레 데 보자르’(1928년 개관)의 앙리 르 뵈프 홀(The Henry Le Boeuf Hall). 2000석 넘는 무대였다. 이날 객석엔 훗날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지낸 김재원이 있었다. 그는 독일 뮌헨대학에서 교육학 박사학위를 받은 직후인 1934년9월부터 벨기에의 국립 헨트(Ghent)대학 칼 헨츠(Hentze)교수 조수로서 중국 고고학과 미술사를 공부하고 있었다.

최승희의 보살춤. 1938년 해외공연에 나선 최승희의 주요 작품 중 하나다. 에로틱한 의상과 관능적 몸짓으로 관객들의 사랑을 받았다. 1939년 2월 최승희의 브뤼셀 공연을 관람한 고고학자 김재원 박사도 보살춤이 현지 관객에게 갈채를 받았다고 소개했다.

◇'과연 유럽에서 통할까, 의심했지만…'

김재원은 1937년 2월 독일서 잠시 귀국한 당일, 경성 부민관에서 열린 최승희의 공연을 봤다. 친척과 지인들이 최승희 공연장으로 이끌었다. 그는 ‘솔직히 고백하면 과연 이것으로 구미에서 성공할 수 있을까’하는 의문을 품었다. 하지만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브뤼셀 공연 전부터 파리와 브뤼셀 신문에선 ‘동양 제일의 여무용가’ ‘조선 제일의 여인’ 등의 제목 아래 최승희 인터뷰와 이력, 공연 리뷰 등이 실렸다. ‘동양사람으로선 공전(空前)의 인기를 집중’했던 것이다.

김재원은 ‘조선 민속 무용을 이곳 구주인에게 이해시키도록 연출하는 것은 심히 어려운 일이다. 따라서 이에 성공한 최씨의 천분(天分)이란 비상한 것이다’라고 썼다. 하지만 아쉬운 점도 있었다. 반주자나 보조 출연자 없이 최승희 혼자 축음기 연주에 맞춰 모든 프로그램을 꾸려 단조로울 수밖에 없었다. 경비 문제로 악사나 제자들을 데리고 올 수 없었기 때문이다.

샤요 공연의 성공을 보도한 조선일보 1939년 7월28일자 '구주의 인기를 독점한 파리의 최승희씨' 기사. 피카소, 마티스도 관람했다고 전했다.

◇한국 예술가 첫 세계 투어

최승희(崔承喜·1911~1969)는 1937년부터 1940년까지 3년간 미국과 유럽, 중남미를 순회하며 주요 극장에서 무용 리사이틀을 연 원조(元祖) 한류스타였다. 한국 예술가의 첫 구미 순회공연이었다. 유럽에서만 프랑스, 네덜란드, 벨기에, 이탈리아를 다녔고, 미국과 멕시코, 브라질, 콜롬비아, 페루, 우루과이 등을 돌았다. 월간지 ‘삼천리’ 1941년 4월호에 실린 ‘최승희 귀향감상록’에 따르면, 공연횟수만 150회가 넘고, 투어 여정은 10만 마일 가까운 여행이었다. 최승희는 조선 춤을 바탕으로 서양 댄스를 접목, 한국 무용의 존재감을 세계에 알렸다. ‘월드 투어’란 말이 어색하지 않을 만큼 현지 언론과 평단 반응도 뜨거웠다.

◇살 플레옐 공연 성공이 디딤돌

월드 투어 성공의 기폭제가 된 것은 유럽 첫 무대였던 1939년 1월31일 파리 살 플레옐(Salle Pleyel) 극장 공연이었다. 1927년 10월 개관한 이 극장은 2000석 규모로 당시 파리의 대표적 콘서트홀이었다. 2악장의 몽환적 선율이 인상적인 라벨 피아노 협주곡 G 장조가 초연(1931)된 곳이기도 하다. 지금도 파리의 주요 공연장으로 쓰이는 이 유서 깊은 극장에서 데뷔한 것이다. ‘한량무’ ‘천하대장군’ ‘검무’ ‘감옥에 갇힌 춘향’ 등을 올린 이 공연은 매진될 정도로 인기를 누렸다. 여세를 몰아 브뤼셀, 칸, 마르세유, 밀라노, 피렌체, 로마, 헤이그를 거쳐 다시 샤요 극장에서 두번째 파리 공연을 올렸다.

◇피카소, 마티스가 관람한 샤요 공연

샤요 극장 공연(1939년6월15일)은 피카소와 마티스 등 파리의 쟁쟁한 예술가도 관람할 만큼, 주목을 받았다. 조선일보를 비롯한 국내 신문에도 보도될 정도였다. ‘삼천명이나 들어가는 극장의 객석을 전부 만원시켰을 뿐 아니라 불란서의 극단, 영화계, 화단의 명사들을 일당에 모아놓고 최 여사 독특의 세련된 예술로써 끝까지 미혹시켜 이 불란서예원에 대화제를 제공하고 있다 한다. 그날 밤에 모인 명사들 중에는 피카소, 마티스, 로당상을 필두로 미셸 시몽(영화배우) 등이 있었다 한다. ‘( ‘구주의 인기를 독점한 파리의 최승희씨’, 조선일보 1939년7월28일)

최승희는 잡지 ‘삼천리’(1941년4월호)인터뷰에서 ‘파리에서는 세계적 미술가 피카소, 그밖에 콕트(장 콕토?), 마티스, 데고부라 장고푸드 등 제씨였는데 그분들이 제 무용을 열심히 관람해 주었습니다’라고 밝힌 바 있다.

최승희의 샤요 극장 공연은 몇 년 전 당시 팸플릿이 공개되면서 공연 전모를 알 수있게 됐다. 창작 한국춤 13편을 3부에 걸쳐 올렸다. 승무, 천하대장군, 옥적곡, 장고춤, 신로심불로(身老心不老), 보살춤, 한량무, 낙랑의 벽화, 유랑예인, 초립동, 옥중 춘향의 고통(춘향전), 검무, 서울의 무녀 등이다.

1939년7월1일자로 쓴 최승희의 육필 '무용통신'. 아사히 신문에 보낸 편지이지만, 실리지는 않았다. 최승희는 안나 파블로바가 선 헤이그 무대에서 공연하게 돼 감개무량하다고 썼다.

◇안나 파블로바가 공연한 헤이그 무대 올라

‘이번 헤이그 공연은 초만원의 성황을 이뤄 만족스럽게 생각합니다. (안나)파블로바(1881~1931)와 (라)아르헨티나(1890~1936)가 자주 춤을 췄던 같은 무대에서 춤춘 나로서는 돌아가신 대선배들의 모습이 생각나 감개무량했습니다.’

최승희가 1939년 7월1일자로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아사히 신문에 보낸 기고 ‘무용통신’(신문에 실리진 않았다)이 2016년 조선일보에 공개됐다. 파블로바는 디아길레프가 창단한 발레 뤼스의 여제(女帝)로 전설적인 발레리나였다. 라 아르헨티나는 아르헨티나 출신으로 스페인 현대무용의 개척자로 꼽히는 스타다. 최승희는 샤요 공연을 마치고 헤이그로 건너와 스헤베닝언 쿠르하우스(Kurhaus) 극장 무대에 올랐다.

그해 6~8월 세계음악무용축제가 열린 이 극장에선 피아니스트 아르투르 루빈스타인, 바이올리니스트 프리츠 크라이슬러 등의 연주가 이어졌다. 무용은 이본 게오르기, 하랄트 크로이츠베르크 등 세계적 무용가 다섯 명의 공연이 펼쳐졌는데, 최승희가 여기에 이름을 올린 것이다. 최승희는 그해 4월17~20일 헤이그에서 나흘간 공연한 적 있다. 그런데 다시 초대돼 이틀간(6월말~7월1일) 무대에 섰다.

◇1939년 12월 2차대전 피해 도미

최승희의 주가는 올라갔다. 1939년 4월 말 브뤼셀에서 열린 제2회 국제무용대회 심사위원으로 위촉된 것이다. 무용가로서의 실력과 명성을 인정받은 셈이다. ‘삼천리’(1941년4월호) 인터뷰에 따르면, 1939년 가을 시즌엔 ‘발칸 제국과 이태리, 영국 등 여러 나라와의 60회 공연과 또 북 독일에서 40회의 공연을 하기로 계약까지 했었으나’ 그해 9월 전쟁이 터졌다. 세계2차대전이었다. 최승희는 ‘동란의 파리를 탈출해서 서너달 동안 피난민속에 끼어 쫓겨 다니다가 소화 14년12월에 미국으로 다시 건너가서…’ 공연을 계속했다.

이미 유럽에서 성공을 거둔 뒤라서 그랬는지, 두 번째 도미(渡美) 공연은 전보다 더 수월했던 모양이다. 3개월간의 투어를 성공적으로 마쳤다. 최승희는 1940년 5월부터 ‘중미의 멕시코와 남미의 아르헨티나, 브라질, 칠레, 페루, 코스타리카, 콜롬비아, 에콰도르 등 제국에서 공연해서 분에 넘치는 격찬을 받았습니다’라고 답했다. 최승희는 멕시코를 마지막으로 중남미 순회 공연을 마치고, 1940년 10월5일 동경으로 돌아왔다. 3년 6개월만의 귀환이었다.

최승희는 170센티미터로 알려진 늘씬한 키에 서구적 체형으로 에로틱하면서도 우아한 매력을 발산했다. 당대 조선의 대표적 신여성이자 한국 무용을 세계화한 예술가였다.

◇’에로틱하면서도 우아한 매력 발산’

최승희가 해외에서 환영받은 이유는 뭘까. 2009년 ‘최승희 무용활동에 관한 역사적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윤혜미씨는 최승희의 인기비결을 이렇게 해석했다. ‘대체로 기교면에서 뛰어나지는 않지만 독특한 매력과 흡입력으로 인해 작품에 몰입하도록 하는 카리스마적인 면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러한 면이 최승희의 인기의 비결이기도 하였다. 즉 에로틱한 매력과 동시에 우아한 매력을 무대에 발산하여 많은 관중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던 것이다.’

최승희는 키가 170㎝로 알려졌는데, 커트 머리의 서구적 체형은 동아시아는 물론 서양 관객이 보기에도 매력적이었던 모양이다. 윤혜미씨는 ‘최승희의 춤은 테크닉적인 면에서도 현대무용기법과 한국무용기법을 적절히 사용하였으며, 그녀의 큰 키를 살리는 긴 선과 아름다운 곡선을 강조하여 저돌적이면서 도전적인 현대적 여성미를 표현하면서 또한 에로틱한 환상을 부여한 것이 특징’이라고 했다.

◇도중하차한 미국 순회 공연의 곡절은...

최승희의 월드투어는 성공적이었다. 하지만 그의 해외공연 첫 목적지였던 미국에선 예기치 못한 사건도 있었다. 중일전쟁으로 첨예해진 미국 사회의 친일(親日)과 배일(排日)의 전선(戰線)에 휘말린 것이다. 미국 공연을 책임진 현지 기획사가 계약을 파기해 1년 약정한 투어를 도중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귀국까지 고민했을 정도였다. 최승희의 미국투어를 막다른 골목으로 몰고간 사연은 뭘까.

◇참고자료

김호연, ‘글로컬리즘의 시각에서 바라본 최승희’, 무용역사기록학 제44호, 2017.3.

최성옥, ‘해외공연이 최승희의 예술세계에 미친 영향’, 한국무용기록학 제20호, 2010

윤혜미, ‘최승희 무용활동에 관한 역사적 연구’, 중앙대 박사학위논문, 2009.8

성현경 엮음, 경성 에리뜨의 만국유람기, 현실문화, 2015

김재원, 박물관과 한평생, 탐구당,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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