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소영의 영감의 원천] 미국 '국민 엄마 그림' 화가, 앙심 표출 '더러운 돈' 그린 이유

2022. 7. 30. 0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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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슬러의 ‘어머니’와 ‘공작 방’
미국 화가 휘슬러의 작품 ‘회색과 검정의 편곡: 화가의 어머니의 초상’(1871). [사진 오르세 미술관]

예술가가 돈 문제에 얽힌 사적인 앙심을 표출한 작품도 있을까? 존재한다! 그것도 무명 화가가 아닌 무려 제임스 애벗 맥닐 휘슬러(1834~1903)의 그림이다. 미국 화가 휘슬러는 우리에겐 상대적으로 생소할 수 있지만 미국인들에겐 ‘국민 엄마 그림’인 ‘회색과 검정의 편곡: 화가의 어머니의 초상’을 그린 화가이자 서양미술사에서도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인물이다.

그런 휘슬러가 1879년 자신의 집에 빚을 받으러 쳐들어올 채권자를 조롱하고자 ‘금쪼가리: 더러운 돈의 폭발(채권자)’이라는 그림을 그려서 집에 떡 걸어놓은 적이 있다. 돈 안 갚으면서 적반하장이었던 걸까. 그런데 사실 여기에는 휘슬러와 그의 채권자이자 과거 후원자였던 영국 해운업의 거물 프레데릭 레일랜드 사이의 복잡한 사연이 숨어있다. 물론 그 사연을 알아도 휘슬러쪽에 문제가 더 많아 보이지만.

미국 최초 어머니날 기념우표에 쓰여

그 사연은 2년 전인 1877년 휘슬러가 디자인한 ‘공작 방(Peacock Room)’에 얽힌 것이다. 19세기 말 유럽 탐미주의 시대 동양풍 인테리어의 걸작으로 꼽히는 ‘공작 방’은 레일랜드의 저택 식당을 리노베이션한 것이다. 식당을 동양풍으로 개조하는 일은 집주인 레일랜드가 추진했다. 당시 유럽은 일본 문화가 새롭고 매혹적인 것으로 각광 받는 ‘자포니즘(Japonisme)’의 시대였고, 돈깨나 있고 예술깨나 안다는 사람들 사이에서 집에 일본풍 공간을 꾸미는 것이 유행이었기 때문이다.

휘슬러 ‘금쪼가리: 더러운 돈의 폭발(채권자)’(1879). [사진 샌프란시스코 미술관]

당시 휘슬러와 레일랜드는 화가와 후원자로서 절친한 사이였다. 레일렌드는 식당에 휘슬러의 동양풍 그림 ‘도자기 나라에서 온 공주’를 중심 장식으로 걸고 자신의 동양 도자기 컬렉션을 진열하고 싶어했다. 하지만 거기에 어울리게 인테리어를 개조하는 작업을 처음부터 휘슬러에게 맡기진 않았다. 휘슬러는 화가였지, 인테리어 디자인 전문가가 아니었으니까. 레일랜드는 디자이너 토머스 제킬을 고용했다. 하지만 제킬은 인테리어 작업을 어느 정도 마치고 지병이 심해져 치료를 위해 떠났다.

휘슬러는 자신의 그림이 걸리는 곳이니 자신이 인테리어를 마무리하고 싶다고 요청했고, 레일랜드는 ‘마무리 정도야 괜찮겠지’라고 생각하며 동의했다. 그러자 휘슬러는 집주인, 디자이너와 한마디 상의도 없이 ‘내 그림과 안 어울려!’ 하며 기존 인테리어를 깡그리 뒤엎어버렸다. 그리고는 공작 깃털처럼 신비로운 청색과 녹색과 황금색이 주조를 이루는 ‘공작 방’을 탄생시켰다. 지금까지 자신의 그림에 색채 조화를 음악적으로 말하는 제목을 붙여온 것처럼, 휘슬러는 이 방에 ‘청색과 금색의 하모니’라는 제목을 붙였다. 그러니까 휘슬러는 ‘공작 방’을 자신의 새로운 3차원 그림으로 생각한 셈이다.

휘슬러 ‘청색과 금색의 하모니: 공작 방’(1877). [사진 프리어 갤러리]

문제는 이게 휘슬러의 집이 아니라 레일랜드 집의 방이었고 디자이너도 따로 있었다는 점이다. 레일랜드는 이 독단적인 결과물을 보고 화가 나서 휘슬러에게 디자인 대금을 못 주겠다고 했다. 이에 휘슬러도 ‘내 역작을 몰라본다’고 화를 냈고, 그전까지 화가와 후원자의 관계로 긴밀했던 두 사람은 원수지간이 되고 말았다.

휘슬러는 탁월한 예술가이자 타고난 쌈닭이었다. 그가 밤의 불꽃놀이를 파격적일 정도로 추상적으로 묘사한 그림 ‘검정과 금색의 녹턴-떨어지는 폭죽’을 내놓고 200기니를 가격으로 제시했을 때 영국의 유명한 미술비평가이자 사회경제학자인 존 러스킨(1819~1900)은 “어떤 멍청이가 관객들의 얼굴에 물감 한 병 내던진 대가로 200기니나 요구했다!”하는 비평을 썼다. 그러자 격분한 휘슬러는 러스킨을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다.

재판 중 러스킨이 물었다. “저 그림을 이틀 걸려서 완성했다는데, 이틀 동안 작업한 대가로 200기니나 요구했습니까?” 그러자 휘슬러는 “아뇨, 일생의 작업으로 얻은 지식의 대가로 요구한 겁니다”라고 멋지게 대꾸했다. 결국 재판은 휘슬러의 승리로 끝났다. 하지만 러스킨에게 과해진 벌금은 미미한 것이었고, 반면 휘슬러는 재판 비용 때문에 파산하고 말았다.

바로 이때 그의 주 채권자가 레일랜드였던 것이다. 휘슬러는 레일랜드가 집에 쳐들어올 줄 알고, 그를 조롱하는 그림 ‘금쪼가리: 더러운 돈의 폭발(채권자)’을 그려 걸어두었다. ‘공작 방’의 원한이 남아서인지 이 그림에서 레일랜드는 공작새의 모습이다. 하필 피아노를 치고 있는 것은 그의 평소 서툰 피아노 솜씨를 비웃기 위해서라고 한다. 그림 제목에서 ‘더러운’의 스펠링을 ‘filthy’ 대신 ‘frilthy’라고 썼는데 레일랜드가 평소 프릴 달린 셔츠를 많이 입어서 그걸 비웃느라 그랬다 한다.

하지만 휘슬러가 ‘공작 방’ 사건을 ‘돈 많은 자의 횡포’ 문제로 몰아간 것은 진부하고 치사한 자기합리화로 볼 수 있다. 그는 원래 디자이너인 제킬에게 깊은 상처를 주지 않았던가. 제킬은 돌아와서 자신이 정성 들여 해놨던 디자인이 깡그리 뒤엎어진 걸 보고 충격 받아 쓰러졌다가 지병이 악화되어 세상을 떠났다.

반면 휘슬러의 독단의 결과로 그토록 아름다운 명작 ‘공작 방’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게 됐으니, 이 작품을 대하면 아름다움과 윤리 사이에서 고통에 빠지게 된다. ‘공작 방’ 사건은 흔히 알려진 것처럼 ‘예술가와 돈 많은 후원자 겸 의뢰인의 충돌’ 문제라기보다 ‘예술과 윤리의 충돌’ 문제로 보아야 할지 모르겠다.

휘슬러는 ‘예술을 위한 예술’을 위해서 레일랜드 같은 후원자든 제킬 같은 동료 예술가든 다 밟고 지나가는 성격의 소유자였다. 제목부터 그의 독선적인 쌈닭 기질을 드러내는 자신의 저서 『적을 만드는 상냥한 기술』(1890)에서 휘슬러는 이렇게 말했다. “예술은 모든 부질없는 것들로부터 독립적이어야 한다-예술은 독자적으로 존재하며 오로지 눈과 귀의 미적 감각에 어필해야 하며 그것이 헌신이니, 연민이니, 사랑이니, 애국심이니 하는 상관없는 감정들과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미국 최초의 어머니날 기념우표 (1934). [사진제공=미국 우정청]

그런데 이런 사람이 ‘국민 엄마 그림’을 그렸다니 많이 안 어울리지 않는가. 사실 휘슬러는 자신의 작품이 어머니의 대표적인 이미지가 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이 그림의 원제는 ‘어머니’가 아니라 ‘회색과 검정의 편곡’이다. 앞서 그림들의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그는 작품에 ‘심포니(교향곡)’ ‘하모니(화성)’ ‘녹턴(야상곡)’ 같은 음악적인 제목들을 붙였다. 모차르트 교향곡을 들을 때 그 음악의 이야기를 궁금해 하지 않고 그저 선율과 리듬과 화음의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처럼 그림도 그렇게 보라는 것이 휘슬러의 주문이었다.

‘나는 전설이다’ 등 많은 영화에 등장

하지만 화가의 의도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그림에서 회색과 검정의 아름다움 대신 어머니를 보았다. 가라앉은 색조의 정갈한 실내에서 단정한 의상과 자세로 앉아 있는 늙은 어머니의 모습. 특히 그 가지런히 모은 주름 잡힌 두 손에서, 각자의 엄마를 생각하며 애틋함을 느낀 것이다. 게다가 이 그림의 담담함이 오히려 요란하게 감상적인 그림보다 더 깊은 애틋함을 끌어낸다. 그래서 이 그림은 1934년 미국 최초의 어머니날 기념우표에 쓰였고 그 뒤 ‘빈’ ‘나는 전설이다’ 등 수많은 영화에 등장하거나 언급됐다.

하지만 만약 휘슬러가 우표가 나왔을 당시 생존해 있었다면 펄펄 뛰었을 것이다. 우표에서는 원작의 제목일 정도로 중요한 회색과 검정의 조화도 없고 원작에 없었던 카네이션 다발이 등장했으니까. 실제로 휘슬러의 미학을 아는 뉴스위크지는 “휘슬러는 이 우표를 증오했을 것!”이라는 헤드라인의 기사를 쓰기도 했다.

한편 ‘공작 방’ 뒷이야기는 요즘 국내외에서 유행하고 있는 기업의 미술 협업, 특히 현대미술가에게 제품이나 공간 디자인을 의뢰하는 경우에 시사하는 바가 많다. 기업은 제품에 독창성을 가미하고 브랜드 이미지를 높이기 위해 미술과 협업한다. 또한 현대미술가는 좀더 폭넓은 대중에게 예술세계를 선보이고자 협업에 응한다. 잘만 되면 윈윈이 되는 셈이다. 하지만 디자이너와 달리 현대미술가는 자기 세계에 대한 고집이 강할 수밖에 없고 이것이 기업이 원하는 바와 충돌할 수 있기 때문에 리스크도 크다. 그간 성공적인 미술 협업도 많았지만, 기업과 예술가 양쪽 다 상처만 입고 끝난 사례도 적지 않다. 남발해서는 안 되는 이유다.

문소영 코리아중앙데일리 문화부장 symoon@joongang.co.kr, 미술전문기자. 서울대 경제학부 학·석사, 런던대 골드스미스컬리지 문화학 석사, 홍익대 예술학과 박사 과정 중. 저서로 『그림 속 경제학』(2014), 『명화독서』(2018), 『광대하고 게으르게』(2019)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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