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이면] 음식과 형식

2022. 7. 30. 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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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 달간 집들이 스무번 동안
손님 감동 못 준 양식 요리
간만에 가족 찬사 이끌어낸
엄마 한식 생신상과 대조적
그 차이 뭘까 곱씹어보니
고유 형식 무시했기 때문
당일 코스대로 내올 게 있고
전날부터 공들일 게 있더라
요즘은 집들이를 하지 않는 것이 추세라지만 구식 DNA를 갖고 있는 건진 몰라도 이사 후 석 달간 집들이를 스무 번 가까이했다. 매주 한두 번 집에 손님이 온 것인데 이들을 대접하느라 크고 작은 음식전쟁을 치렀다. 회사 사람들이 열댓 명씩 몰려왔을 땐 어쩔 수 없이 뷔페 서비스를 부르기도 했지만 서너 명씩 초대했을 때는 내가 직접 음식을 장만했다.

모든 것은 루틴대로 하면 쉽다. 샐러드에 스테이크를 굽고 수프를 만들고 해산물 요리를 하나 하는 식으로 말이다. 서너 번을 해보니 손에 붙어 척척해낼 수 있었다. 하지만 매번 같은 음식을 하려니 뭔가 정성이 부족한 것 같고 질리기도 해서 유튜브를 검색해 이색적인 요리를 몇 가지 시도해보기도 했다. 애호박 가운데를 파내고 계란물을 붓는다든지, 추억의 감자샐러드를 만든다든지, 가지에 칼집을 내고 굽는다든지 등. 사람들은 밝은 얼굴로 이 음식들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나도 몸은 고되지만 이런 만남의 시간이 남은 생에서 큰 의미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몸이 좀 지쳐갈 무렵 어머니 생신을 맞아 우리 집에서 가족들이 모이기로 했다. 평소엔 부모님 댁이나 거기서 가까운 형네 집에서 모이던 것을 이사를 핑계로 먼 파주까지 오시게 한 것이다. 오랜만에 생신상을 제대로 한번 차려드리고 싶었다. 가짓수를 늘리기보단 기본에 충실하자는 생각에 음식 몇 가지를 정성껏 마련했다. 양지를 넣고 푹 끓인 미역국, 짭조름하게 간이 잘 밴 조기와 가자미구이, 팥과 찹쌀에 기장을 섞어 윤기가 차르르 흐르게 지어낸 밥, 단골 정육점에서 끊어온 일등급 고기로 볶은 풍성한 불고기가 그날의 메뉴였다.

가족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미역국에서 어쩜 이리 깊은 맛이 나냐, 조기가 너무 맛있다, 자식인 너한테 오히려 살림을 배워야겠다 등 평소 손님을 치르면서는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음식에 대한 찬사가 쏟아졌다. 더 놀란 것은 거기에 내가 보인 반응이었다. 갑자기 엔도르핀이 쏟아지면서 이 맛에 음식을 하는구나 싶은 감동이 물밀듯이 밀려온 것이다.

그 차이가 무엇일까. 왜 스테이크를 굽고 파스타를 했을 때는 들어보지 못한 진심 어린 찬사가 미역국과 조기구이 때는 가능했을까. 답은 시간과 태도였다. 전날 밤 끓여둔 미역국은 하루가 지나 양지에서 맛이 우러났고 미역은 부들부들해졌다. 아침에 구운 생선은 저녁이 될 때까지 상온에서 서서히 식으면서 식감이 꼬들꼬들해졌다. 기장과 팥을 많이 넣고 소금을 풀어 지은 밥은 팥의 팍신팍신함과 기장의 거친 식감이 찹쌀의 찰기 속에 잘 뭉쳐져서 감칠맛을 냈다. 상을 차리면서 막 볶아낸 불고기는 집 안 가득 맛있는 내를 피우면서 사람들의 식욕을 자극했다. 게다가 가족은 손님들과는 달리 선물을 들고 온다든지, 건배를 한다든지, 집에 대해 한마디 한다든지 등도 없이 오로지 먹는 일에 집중했기에 맛에 더 온전하게 반응했다.

반면 서양식 요리는 한식과는 시간이 다르게 흘렀다. 스테이크든 샐러드든 파스타든 감자샐러드든 미리 만들어놓을 수 있는 음식이 아니었다. 만들자마자 먹어야 했다. 그런데 그걸 한 상에 한꺼번에 차려 내려고 기를 쓰고 신경을 썼더니 스트레스가 너무 심했고, 음식도 완성도가 떨어졌다. 음식을 절반쯤 만든 상태에서 두었다가 손님이 도착할 때쯤 마무리해서 상에 올리는 일은 정말 고역이었다. 게다가 손님들은 이런저런 이유로 먹는 데보단 얘기하는 데 더 집중해 요리한 자의 의도대로 먹어주지 않았다. 그렇게 음식과 사람은 겉돌았다.

서양식 디너의 코스 형식을 무시한 것이 큰 잘못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시간차를 두고 음식을 내오고 접시를 거둬가고 하는 것들이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주방에만 머물러 있으면서 코스대로 음식을 만들어낼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건배하고 대화를 나눠야 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번 집들이 경험에서 많이 배웠다. 모임 음식은 그 모임의 성격부터 시작해 식재료와 조리 방식의 특성, 조리 후 관리에 이르기까지 많은 것을 생각하고 안배해야 한다는 것을. 그것을 바탕으로 마련된 형식을 따라야 한다는 것을. 이제 잔치는 끝났지만 음식에 대한 상념은 아직 짙게 남아 있다.

[강성민 글항아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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