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채만 한 혹등고래 순한 눈에 가슴 '쿵' 내려앉았다
국내 유일 고래전문 사진가 장남원
우영우가 본 가로 6m, 세로 3m 크기의 혹등고래 사진은 국내 유일의 고래전문 사진가 장남원(72) 작가의 작품이다. 그는 지난 30년간 공기통 없이 맨몸으로 방수 카메라 하나 들고 수심 10m까지 내려가 수많은 혹등고래 사진을 찍었다. 9번의 고래사진전을 열었고, 세계적으로도 귀한 고래전문 사진집 『움직이는 섬』을 출판했다. 16㎜ 광각렌즈를 수중촬영에 도입한 것도 장 작가가 국내 처음이다.
“1977년 중앙일보에 입사해 사진기자로 일하며 선배들 수중사진에 호기심이 생겼죠. 2년 후 스쿠버 다이빙을 시작했고 본격적으로 수중사진에 빠져들었어요. 국내에 없는 장비는 삼성물산을 통해 외국에서 구해줄 정도로 당시 중앙일보 사진 팀 장비가 좋았거든요.”(웃음)
혹등고래와 운명처럼 조우한 건 92년의 일이다. ‘차별화된 사진’을 고민하던 차에 일본 오키나와 바다로 촬영을 떠났다. “일본인 배 주인이 고래를 보여주겠다고 해서 따라나섰는데 집채만 한 크기의 혹등고래와 마주쳤죠. 물속에선 4배로 확대돼 보이니 얼마나 무서웠겠어요. 그런데 혹등고래는 덩치에 비해 눈이 아주 작고 순해요. 눈 아래위로 두툼해서 대부분 눈을 감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내 앞에 등장한 녀석이 그 작은 눈을 똥그랗게 뜨고는 도망도 안 가고, 위협도 안 하고 계속 바라만 보는 거예요. 그날 6컷의 사진을 찍었는데 한국에 돌아와서도 그 눈이 잊히지 않더라고요. 말 그대로 가슴이 ‘쿵’ 내려앉은 거죠.”
지난해 넷플릭스 최고 다큐멘터리로 꼽힌 작품 ‘나의 문어 선생님’은 번아웃 증후군에 빠진 영상감독과 문어의 1년간의 교감을 다뤘다. 장 작가와 고래 이야기도 못지않다. 그가 던져버린 카메라를 다시 쥐게 된 건 혹등고래 때문이다. 92년 마주쳤던 그 착하고 순한 눈동자를 한 번만 더 보자! “아내한테 음식점을 맡기고 그때부터 고래만 쫓아다녔죠.”
장 작가와 고래의 긴 교감이 시작된 곳은 뉴질랜드 옆 작은 섬나라 통가의 해역이다. 혹등고래들이 7월부터 10월까지 머물며 새끼를 낳고 키우는 곳으로, 해마다 이 기간에 세계 고래전문 사진가들이 몰린다. 성체의 몸길이 11~16m, 몸무게 30t에 달하는 혹등고래는 몸길이 3분의 1에 해당하는 긴 가슴지느러미와 희고 넓은 배에 긴 주름을 갖고 있다.
혹등고래 어미는 통가 앞바다에서 4개월간 새끼를 키우면서 젖을 먹이는 동안 아무 것도 먹지 않는다고 한다. 그렇게 새끼의 몸집을 키운 다음, 어미 고래는 바싹 마른 몸으로 새끼와 함께 6000km를 헤엄쳐 남극바다로 돌아간다.
“어느 정도 혹등고래의 생태를 알고 난 다음부터는 물속에서 엄마 고래의 눈을 보면 너무 측은해서 마음이 아파요. 그렇게 애지중지 키운 새끼를 남극까지 데려가 놓고 결국 엄마는 포경선의 작살에 맞아 죽을 게 뻔하니까요. 자신의 미래를 아는지 모르는지 나를 바라보는 순진한 눈망울 때문에 가슴이 늘 아파요.”
그는 현재 도미니카 공화국에 사진 촬영 허가 신청서를 낸 상태다. 그곳에 새로운 목표가 있기 때문이다. “내가 히딩크 축구감독을 정말 부러워했어요. 자기가 좋아하는 걸 하면서 한 나라를 흔들었잖아요. 내가 좋아하는 고래사진을 찍으면서 이만큼 살았으니 그걸로 소원은 이룬 것 같아요. 이제 향유고래까지만 찍고 그만 두려고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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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릴라’와 모서리살 그리고 된장찌개
장남원 사진가를 인터뷰한 여담을 전한다. 97년 사표를 내고 외국으로 1년간 돌던 장 작가는 한국에 돌아와 중앙일보가 있던 서소문 근처에 작은 음식점을 하나냈다. 밥벌이를 해야 하는데 뭐가 좋을까 고민하다 내린 결론이다. “내가 좋아하는 게 고래 말고 또 하나는 술이거든요.”(웃음)
작은 마당이 딸린 나지막한 한옥에 식사도 팔고 술도 마실 수 있는 음식점을 내고 상호는 자신의 별명인 ‘고릴라’라고 지었다. 당시 그는 키 178cm에 체중이 100kg이 넘었다.
메뉴가 문제였다. 장 작가는 평소 잘 가던 용산의 한 술집에서 맛본 고기가 생각났다. 단골들에게만 조금씩 맛보라고 주던 고기가 너무 맛있었는데, 돼지고기 어느 부위인지 주인에게 물어도 도저히 답을 해주지 않았다. 마침 찾아온 가수 친구 장미화에게 고민을 털어놨다. 그러자 그녀가 “내가 아는 동생들이 마장동에서 고기 대는 일을 하는데, 그들이라면 어떤 부위인지 단 번에 알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실제로 함께 갔던 ‘마장동 동생’들은 고기를 보자마자 대번에 ‘항정살’이라고 알아봤다. 심지어 자신들이 이 고기를 고릴라에 공급해주겠다고까지 했다.
그런데 지금까지 고릴라 메뉴 중에는 항정살이 없다. 대신 ‘모서리살’이라고 불리는 고기가 있다. 장 작가와 매일같이 용산 술집을 드나들며 술을 마시던 문화부 선배 이헌익이 고기 부위를 몰랐던 때부터 “고기를 얇게 저민 모습이 꼭 어디 모서리를 도려낸 것 같다”며 불렀던 별명을 메뉴 이름으로 붙인 것이다.
고릴라의 두 번째 핵심 메뉴인 ‘된장찌개’ 역시 장 작가의 단골집에서 찾아낸 메뉴다. 질리지 않고 먹을 수 있는 메뉴를 고민하다 된장찌개를 떠올렸고, 남대문 시장 알파문구 주변에 있는 단골 된장찌개집을 찾아가 사장님께 “이 맛을 내고 싶다”고 얘기했다. 그랬더니 기자시절부터 장 작가를 알고 있던 인심 좋은 사장님은 직접 이틀씩이나 고릴라를 찾아와 레시피를 전수해주셨다.
“예전에 이름 봐주시는 선생님들이 그러시더라고요. 장사하면 잘 할 거라고.”(웃음)
서소문 일대가 개발되면서 지금은 충정로로 이사했지만 ‘모서리살(항정살)’과 된장찌개는 지금도 고릴라를 찾는 손님들의 ‘최애’ 메뉴다.
마지막 한 가지, ‘모서리살(항정살)’과 된장찌개를 파는 장남원 작가의 ‘고릴라’는 이곳 충정로 딱 한 곳뿐이다.
서정민 기자 meantr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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