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란의얇은소설] 여름 특집

2022. 7. 29. 2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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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염 휴가지서 읽을만한 책으로 제격
누구에게나 기묘한 경험 있지 않을까

무라카미 하루키, <렉싱턴의 유령> (‘렉싱턴의 유령’에 수록, 임홍빈 옮김, 문학사상)

어른이 되었다고 느낀 몇몇 순간이 있었다. 여름이란 계절을 나는 게 유난히 어렵고 힘들게 느껴지는 나이가 되었을 때도 그랬다. 개인적으로 여름에 필요한 것은 과일과 차가운 맥주와 휴식. 휴식을 취할 때 필요한 것은 책과 영화. 평소와 달리 조금 무섭거나 기이하거나 환상적인 스토리라면 더 좋다. 거기서 오는 잠깐의 서늘함이 더위를 잊게도 하며 ‘환’(幻)을 느끼기 적합한 계절도 지금이니까. 일정을 중단하고 짐을 꾸리며 궁리한다. 휴가지에 어떤 책들을 가져갈까?
조경란 소설가
섬으로 가는 길, 먼저 ‘렉싱턴의 유령’을 읽기 시작한다. 오래전에 다른 번역가의 책으로 읽고 무라카미 하루키 단편집 중엔 가장 좋다고 여기게 되었으니 아직 읽지 못한 새 번역본으로 다시 경험하고 싶어져서. 자, 이제 선뜻 믿지 못할 이야기를 읽으려는 참이다. 그런 이야기일수록 이런 첫 문장으로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이건 수년 전에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다.”

소설가인 나는 케이시라는 지인에게서 일주일간 집을 봐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케이시는 훌륭한 재즈 컬렉션과 고풍스러운 저택을 소유하고 있었다. 나는 흔쾌하게 노트북과 책 몇 권을 챙겨 그의 집으로 간다. 첫날, 레코드를 몇 장 들으며 일을 하곤 이층 손님용 침실에서 잠이 들었다. 어떤 기척 때문에 내가 잠에서 깨어난 시간은 새벽 한 시 십오 분. “누군가 아래층에 있다”고 느끼자 식은땀이 흐르며 “의식의 아주 깊은 곳에서 카드가 몇 장 살며시 뒤집어지는 듯한” 감각이 느껴졌다. 그들이 사람이 아니라 유령이라고 알아버리게 돼서. 그런데 유령들은 나에게는 큰 관심이 없는 듯하고 어쩐지 음악 소리, 말소리가 들리는 그 유령들의 파티가 열리는 듯한 방의 문을 함부로 열면 안 될 것 같다. 이제 그들의 존재는 무서움을 넘어서 “어딘지 묘하게 깊고 넓고도 막연한 느낌을 갖게” 한다. 나는 다시 이층 손님방으로 조용히 돌아와 자리에 눕는다.

그 첫날 이후 다시 유령들의 기척을 느끼지 못한다. 약속한 날이 되어 집주인이 돌아오자 나는 렉싱턴을 떠난다. 가끔 그 집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떠올리지만 누구에게도 이야기한 적은 없다. 기묘한 이야기이나 “그 아득함 탓에 그것이 조금도 기묘한 일이라고는 생각되지” 않기 때문에.

누구에게도 말하기 어려운 그런 기이한 일들을 겪은 적이 있는지? 한 번은 같이 사는 부모가 며칠 집을 비우게 되었다. 기록적인 폭염 때문에 사람이 한 명도 지나다니지 않아 골목이 정지 화면처럼 보이던 날들. 나는 그 아래층에서 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 저도 모르게 천장을 올려다보고 말았다. 아무도 없는 위층에 누군가 있다, 라는 선명한 기척 때문에. 호기심은 유령에게만 있는 게 아니라서 나는 살금살금 위층으로 올라가 빈집 현관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그러자 허공에 떠 있던 공기들이 후다닥 바닥으로 가라앉는, 존재를 드러내고 싶어 하지 않는 ‘그것’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해를 끼치러 온 게 아니야, 그저 여기 사는 사람들이 괜찮은지 한 번 다니러 온 거라고, 하는 무언의 속삭임도. 어리둥절한 기분으로, 한편으로는 안심하며 숙연히 문을 닫고 나왔다. 이런 말은 누구도 믿어주지 않을 것 같아서 ‘봉천동의 유령’이란 제목으로 단편을 썼다. 이건 수년 전에 정말 실제로 일어난 일이다.

숙소에 도착하니 저녁이 되었다. 불을 다 끄고 영화를 보는데 낯선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커다랗고 털이 많은 짐승이 쿨쿨 자다가 코를 고는 듯한 소리, 숨소리, 아니 근처 저수지에 몰려든 새들의 소리인가? 어느 다정한 유령이 나를 다시 찾아왔나? 어둠 속에서 고개를 휘휘 둘러본다.

여름 특집으로 기묘한 이야기를 해보았다. 그게 아니더라도 이 소설집에는 하루키의 모든 소설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렉싱턴의 유령’, ‘토니 다키타니’, 그리고 읽고 나면 너무나 슬퍼져 버리는 ‘침묵’까지, 모두 수록돼 있다.

조경란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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