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살만, 살인자 취급서 귀인 대접… 에너지 위기에 달라진 위상

파리/정철환 특파원 2022. 7. 29. 2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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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인 살해 배후로 고립됐다가 우크라 사태 영향 ‘몸값’ 치솟아
美·유럽서 ‘정치적 면죄부’ 받아… 앰네스티는 “빈 살만은 살인자”
부산과 경쟁 중인 ‘2030 엑스포’ 유럽 순방 중 지지 요청하기도
28일(현지 시각) 프랑스를 방문한 무함마드 빈 살만(오른쪽)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가 파리 엘리제궁에서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과 악수하고 있다. 2018년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 피살 이후 따돌림을 당해온 최대 산유국 사우디가 에너지 위기로 몸값이 치솟으면서 각국에서 ‘정치적 면죄부’를 받았다는 평가가 나온다. /EPA 연합뉴스

사우디아라비아의 실세(實勢)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가 프랑스와 그리스를 비롯한 유럽 국가를 방문해 큰 환대를 받았다. 그의 유럽 방문은 2018년 10월 반체제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 살해 사건 이후 3년 9개월 만이다. 빈 살만 왕세자는 당시 살해 지시를 내린 배후 인물로 지목되며 세계적 기피 인물이 됐고, 자국의 외교적 고립마저 자초했다. 하지만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초래한 ‘에너지 위기’로 세계 최대 산유국 사우디의 몸값이 치솟자, 자신을 따돌렸던 미국과 유럽으로부터 ‘정치적 면죄부’를 받았다는 평가가 나온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28일(현지 시각) 파리 대통령궁(엘리제궁)에서 빈 살만 왕세자와 공식 만찬을 했다. 프랑스 일간 르몽드는 “마크롱 대통령이 빈 살만 왕세자를 맞이하려 아프리카 순방에서 급하게 돌아왔다”며 “전통 복장을 뽐내는 왕세자를 긴 악수로 환영했다”고 보도했다. 두 사람은 유럽에 대한 석유 공급 확대와 이란 핵 문제, 경제 협력 문제 등을 논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엘리제궁 측은 로이터통신에 “인권 문제에 대한 언급도 있었다”고 강조했다. 카슈끄지 암살 사건에 대한 ‘책임 추궁론’을 의식한 것으로 해석됐다.

빈 살만 왕세자는 이틀 전 그리스 방문에서도 열렬한 환대를 받았다. 키리아코스 미초타키스 총리는 왕세자를 위해 의장대를 동원해 특별 환영식을 열었다. 빈 살만 왕세자는 “사우디와 그리스를 연결하는 해저 케이블 전력망을 건설, 그리스를 통해 유럽에 싸고 안정적인 전기 에너지를 공급하겠다”고 화답했다. 또 “그리스의 수소 산업에 투자해 유럽의 ‘수소 허브’를 만들겠다”고 밝혔다. 그리스 AMNA통신은 “양국이 아크로폴리스 박물관에서 문화 협력에 대한 양해각서를 체결하는 등 이틀간 총 17건의 양자 협정을 체결했다”고 밝혔다.

빈 살만 왕세자는 지난해까지만 해도 미국과 유럽에서 ‘살인자’ 취급을 받으며 따돌림을 당했다. 서방 정상들이 빈 살만과 절연(絶緣)을 선언하며 사우디 방문을 잇달아 중단했다.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정상 외교에서 빈 살만 왕세자를 의도적으로 멀리했다. 미국은 또 카슈끄지 사건의 배후가 빈 살만이라는 기밀문서를 공개했고, 사우디에 대한 무기 수출도 중단했다. 2018년 암살 사건 발생 당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빈 살만의 연루 가능성을 단정할 수 없다”며 사실상 그의 편을 든 것과 대조적 조치였다.

하지만 국제 유가 급등과 함께 분위기가 급반전했다. 지난해 하반기부터 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한 올해 상반기까지 바이든 행정부가 큰 폭의 원유 증산을 계속 요청했지만, 석유수출국기구(OPEC)의 맹주 사우디는 이에 응하지 않았다. 오히려 러시아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며 고공 행진하는 유가를 방치했다. 이 기간 국제 유가는 배럴당 60달러대 초반에서 120달러까지 2배로 급등했다.

결국 지난해 12월 마크롱 대통령의 사우디 방문을 시작으로, 빈 살만 왕세자와 사우디 고립 전략은 막을 내렸다. 바이든 미국 대통령도 지난 15일 사우디아라비아를 방문, 그와 ‘주먹 인사’를 나누고 이른바 ‘전략적 파트너십’을 논의했다. 미국 워싱턴포스트(WP) 등은 이를 놓고 “빈 살만 왕세자가 서방의 면죄부를 받았다”고 평가했다. 영국 가디언은 “이번 유럽 순방은 카슈끄지 사건 이후 사우디의 국제적 고립이 끝났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라고 전했다.

빈 살만 왕세자는 유럽 순방 과정에서 “2030 세계박람회(월드엑스포) 개최지로 수도 리야드를 지지해 달라”는 요청도 한 것으로 전해졌다. 리야드는 내년 말 개최지 선정을 앞두고 우리나라 부산과 치열한 2파전을 벌이고 있다.

하지만 빈 살만 왕세자에 대한 인권 단체의 비난은 계속되고 있다. 아녜스 칼라마르 국제앰네스티 사무총장은 28일 “(미국과 유럽의 태도 변화에도) 빈 살만 왕세자가 살인자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미국의 비정부기구 ‘아랍 세계를 위한 민주주의(DAWN)’는 빈 살만 왕세자를 고문과 강제 실종 공모 혐의로 파리 검찰에 고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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