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늦게 처음 '원칙' 지킨 복지기준선..윤 대통령 공약 '찔끔' 실현

허남설 기자 2022. 7. 29. 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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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도 기준 중위소득 증가율 5.47%
정부 "재정 부담" 이유로 4.19% 주장
위원회 "취약층 보호해야" 원안 사수
처음으로 '산출식 따른 수치' 지켰지만
"기준 중위소득 현실화 지연" 비판 여전
서울 영등포구 쪽방촌 주민들이 식수를 옮기고 있다. 한수빈 기자

중앙생활보장위원회(중생보위)가 29일 결정한 2023년도 기준 중위소득은 물가 상승 국면에서 저소득층의 생활 수준을 좌우한다는 의미가 컸다. 기준 중위소득은 기초생활보장제도 등 76개 복지사업 기준선이 된다. ‘촘촘하고 두툼한 복지’를 내세운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처음 이 기준선을 조정하면서 2020년 도입한 기준 중위소득 증가율 산출식을 지켰다는 의미 또한 있다. 다만 공식통계상 중위소득과의 격차 해소와 대선 공약 실현이 큰 진전을 못본 점은 한계로 남았다.

중생보위가 이날 결정한 내년도 기준 중위소득 증가율은 5.47%(4인가구 기준)이다. 회의에서 검토된 증가율 안은 5.47%와 4.19% 등 두 가지다. 증가율은 ‘기본증가율’과 ‘추가증가율’을 곱하는 산출식에 따라 나오는 값이다. 5.47%는 산출식에 근거를 둔 원안, 4.19%는 경기·재정 등을 고려해 기획재정부가 제안한 수정안이라고 볼 수 있다.

중생보위가 지난 25일과 29일 두 차례 회의 끝에 최종 결정한 건 ‘원안 사수’였다. 기재부는 “세계와 우리나라 성장률 모두 하향조정 중” “(원안의 증가율은) 최저임금 인상률 5%에 비해 과도하다” “막대한 재정부담이 우려된다” 등 의견을 냈지만 받아들이지 않았다. 박인석 보건복지부 사회복지정책실장은 이날 브리핑에서 “논의 과정에서 위원들이 취약계층에 대한 두터운 보호가 필요하다(고 주장했고), 그리고 취약계층을 두텁게 보호하겠다는 현 정부의 정책 기조를 반영했다”고 말했다.

5.47%는 2015년 기준 중위소득을 기초생활보장제도 기준선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이후 최고 증가율이다. 복지부는 9만1000명이 추가로 기초생활보장제도 수급 대상자가 된다고 추산했다. 기준 중위소득은 기초생활보장제도와 장애인연금, 국가장학금 등 복지제도의 기준선이다. 현재 코로나19 확진 후 격리자 생활지원금 지급 기준으로도 쓰인다.

2020년 만든 기준 중위소득 증가율 산출식을 따른 건 이번이 처음이다. 2021년도와 2022년도 기준 중위소득 증가율을 정할 때 모두 코로나19 유행을 이유로 각각 원안인 6.36%와 6.34%에서 2.68%, 5.02%로 하향 조정됐다. 산출식은 ‘기준 중위소득 현실화’를 위해 만들어 일단 2021~2026년도 6개년 기준 중위소득을 정할 때 쓰기로 했는데, 중생보위가 스스로 이 목표를 저버린다는 비판이 계속됐다.

현실화란 통계청 가계금융복지조사의 중위소득 수준으로 기준 중위소득을 끌어올리는 것을 말한다. 2020년 통계청 중위소득과 기준 중위소득은 1인가구에서 각각 212만원과 176만원으로 36만원 차이가 난다. 통계청 중위소득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서도 빈곤 측정 등에 쓰는 공식통계원이기 때문에 여기에 기준 중위소득을 맞춰야 한다는 지적이 많았다.

시민사회단체는 중생보위가 현실화 목표를 자꾸 지연시킨다고 비판한다. 6개년 내내 산출식을 따라도 통계청 중위소득과 기준 중위소득 사이 격차 해소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지난 2년 연속 증가율을 원칙보다 내린 만큼 올해는 원칙보다 올려야 어느 정도 상쇄할 수 있는 셈이다. 복지부에 따르면 2015년부터 올해까지 8차례 산정한 기준 중위소득 평균 증가율은 3.33%이다. 2015~2020년 가계금융복지조사 4인가구 소득 중앙값은 5차례 평균 3.86% 올랐다. 가계금융복지조사 결과는 현재 2020년까지만 나와있다.

빈곤사회연대,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등 시민사회단체 회원들이 29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장애인과 가난한 사람들의 만민공동회를 열고 있다./문재원 기자

윤석열 대통령의 관련 공약도 일부 실현되는 데 그쳤다. 대선 당시 생계급여와 주거급여 대상자 선정기준을 각각 기준 중위소득 30% 이하에서 35%이하로, 46% 이하에서 50%이하로 높이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이번엔 주거급여 기준만 47%로 1%포인트 높였다.

저소득층의 비극적 사건에서 드러난 문제점도 보완하지 못했다. 지난 4월 서울 종로구에서 가족이 죽은 지 한 달 만에 발견된 이른바 ‘창신동 모자 사망’ 사건은 주택 등 재산 때문에 실질적 소득이 없는데도 기초생활보장제도 대상자가 되지 못하는 맹점을 보여줬다. 수년간 오른 공시지가를 반영해 기준을 조정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왔다.

박인석 복지정책실장은 “중생보위는 현재보다 더 나은 방향의 산정방식이 있는지 검토하기로 했다”며 “생계급여 기준과 재산의 소득환산율 조정은 별도로 논의할 것”이라고 밝혔다.

시민단체 ‘기초생활보장법바로세우기공동행동’ 등은 논평을 내고 “문재인 정부에서 한 해 평균 2%대에 불과한 인상률에 비해 진취적으로 보이지만 여전히 실제 전 국민 소득의 중위값에 비해 기준 중위소득은 턱없이 낮다”고 비판했다.

허남설 기자 nshe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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