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 터 조선총독 '도끼질 쇼' 그리고 베르사유궁

노형석 2022. 7. 29.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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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형석의 시사문화재][노형석의 시사문화재]
무거운 역사의 울림 깃든 청와대 권역
일제강점기, 한국전쟁부터 촛불항쟁까지
현대사 증언하는 엄숙한 장소에 위락지구
베르사유는 청와대와 성격 전혀 달라
17세기 대정원과 궁전 조성된 이후
현재까지 프랑스 정치외교 주요 무대로
지난 5월23일 오전 청와대 영빈관을 찾은 관람객들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문화재청은 이날 외국 국빈 만찬장 등으로 쓰여온 청와대 영빈관과 역대 대통령의 언론 회견 장소로 출입기자들이 상주하던 춘추관 내부를 정비해 시민들에게 공개했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79년 전인 1943년 4월30일, 지금 수많은 관광객들로 붐비는 청와대 옛 본관 앞 뜨락에서는 일본 권력자들의 섬뜩한 도끼질 퍼포먼스가 벌어졌다.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제가 미국과의 물량전에서 밀려 패색을 드러내기 시작한 시절이었다. 당시 청와대의 전신인 경무대 주인은 7대 조선총독이자 패전 뒤 전범이 된 군국주의 장성 고이소 구니아키(1880~1950) 대장. 그가 경무대 관저 건물 앞 뜨락의 아름드리 느티나무 고목 앞에 다가가 도끼를 쳐들더니 힘차게 나무 아래쪽을 내리찍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다나카 총감을 비롯한 총독부 부하 관료들과 기업인들은 열렬히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1956년 백악산 쪽에서 찍은 경무대 관저와 남쪽 서울 시내 풍경. 멀리 중앙청(옛 조선총독부 청사)과 남산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도판 국가기록원 제공
1965년 3공화국 시절의 청와대 정면. 도판 국가기록원 제공
1939년 9월20일 열린 경성 경무대 낙성식 사진. 경성에서 발행된 일본어 신문 <조선신문>에 실린 것이다. 도판 국가기록원 제공

이날 열린 퍼포먼스의 제목은 ‘조선용재수여식’. 경무대 관저 근처에 울창하게 자랐던 느티나무 등의 정목을 도끼로 베어 군함을 만드는 조선소에 헌납하는 행사였다. 당시 상황을 보도한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의 1943년 5월1일치 지면을 보면, 광기 어린 총독과 수하 관료의 행태들을 생생한 르포처럼 엿볼 수 있다. 고이소는 인사말을 통해 “대동아전쟁에 이기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배가 많아야 한다. 관저 뜰 앞 정목을 베어 조선소에 제공할 것이니 선박 건조에 힘써 주기 바란다”고 열변을 토한 뒤 바로 도끼를 들고 나무를 베기 시작했다. 이에 감격한 이시다 체신국장은 “가장 우수한 성적을 올린 조선소에 공급해 선박 공급에 더욱 매진하게 할 것을 맹세한다”고 다짐했다. 신문을 보면, 뒤이어 고목을 찍는 총독의 주위에서 울려 퍼진 청중의 구호를 소개하면서 이런 구절로 기사를 맺었다. ‘느티나무야, 나아가서 배가 되어 미영을 쳐부수는 데 한도움이 되라!고 힘껏 내리치는 (총독의) 도끼 끝에 조선(造船), 조선, 조선의 열의가 불타고 있었다.’

1966년 당시 박정희 전 대통령이 쓰던 청와대 집무실 모습. 도판 국가기록원 제공

<매일신보> 기사는 하나의 사례일 뿐이다. 1943년부터 1945년 일제의 패망 직전 발악기에 총독 관저인 경무대 인근에서는 조선의 기맥을 이어받은 고목을 베어 조선소에 공출하는 광기의 퍼포먼스 행사가 줄이었다. 한국인들은 대부분 해방 뒤 1948년 출범한 이승만 초대 정부부터 올해 4월 청와대를 떠난 문재인 정부까지의 권좌로만 기억하지만, 청와대는 처음 건물이 지어진 1939년 9월부터 아베 노부유키 총독이 내쫓긴 1945년 9월까지 엽기적인 퍼포먼스와 더불어 가장 악랄한 식민지 폭압 정책이 계획되고 집행됐던 총본부였다.

1956년 봄 경무대를 방문한 학생들의 행렬. 벚꽃이 만발한 가운데 학생들 대열 안쪽에 경무대 관저가 보인다. 도판 국가기록원 제공
청와대 경내 한옥영빈관 ‘상춘재’의 내부. 지난 19일 열린 ‘청와대, 한여름 밤의 산책’ 사전 언론공개 행사 당시 공개된 모습이다. 노형석 기자

하여 청와대 권역은 숙연하고 무거운 역사의 울림이 깃든 공간이다. 식민지 폭정의 비사가 숨어 있는 곳이자 한국전쟁, 4월혁명, 10·26사건, 촛불항쟁 등 한국 최고 권력사를 증언하는 엄숙한 장소다. 멀리는 11세기 고려시대 남경 별궁의 자취와 14세기 태조 이성계의 한양 건설의 밑뿌리가 있고, 16세기 임진왜란 당시 경복궁의 소실, 19세기 말 고종과 대원군의 경복궁 중건의 역사가 무언의 공간과 땅속 지층에 올올이 새겨진 곳이다.

이런 내력을 지닌 청와대 공간을 박보균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프랑스 베르사유궁을 참고 사례로 삼아 복합문화지구로 만들겠다는 방안을 내놓고 지금 정부의 치세 기간 내내 추진하겠다고 선언했다. 베르사유궁을 유력한 대안 모델로 검토하면서 고품격 미술관과 대여 전시장, 공연장, 조각공원을 중심으로 자연유산·문화역사를 결합시킨 나들이 문화공간을 만들겠다는 의도로 풀이된다. 그의 구상은 시민적 합의를 얻은 것이 아니고 지금 윤석열 정부가 대선에서 승리한 뒤 내부적으로 기획한 것이다. 여전히 실체가 명확하지 않은 고려시대 별궁터나 조선 초와 19세기에 조성된 경복궁 후원 건물들, 그리고 전통 정원 등의 역사적 서사를 전문가들의 조사로 충실히 파악한 것도 아니다. 당연히 앞으로 운영될 미술관이 어떤 콘텐츠를 지속적으로 내놓을지 정체성의 문제가 제기되지만, 뚜렷한 복안이 보이지 않는다.

지난 19일 열린 ‘청와대, 한여름 밤의 산책’ 사전 언론공개 행사 때 공개된 저녁 나절의 본관. 노형석 기자

점점 뚜렷해지는 것은 경복궁과 창경궁을 비롯한 조선 궁궐 잔혹사의 재림이다. 경복궁과 창경궁은 20세기 초 일제강점기부터 조선물산공진회라는 박람회가 열린 것을 시작으로 1970~80년대까지 온갖 종류의 잡다한 행사들이 열렸다. 적어도 80년대까지 창덕궁·경복궁·덕수궁의 관리 상황을 보면, 궁궐을 역사 사적지에 걸맞게 복원하고 관리한 게 아니라, 주된 콘셉트는 복합문화공간이었다. 스케이트장, 투견대회, 씨름장, 미인대회, 우량아선발대회 등이 궁궐 앞 특설무대에서 펼쳐졌다. 심지어 경복궁 근정전 앞에서 5·16 쿠데타 군인들을 위무하는 대중 연예인들의 공연이 열리기도 했다. 당대엔 시민들의 문화 욕구를 수용할 만한 마땅한 공간이 별로 없었던 점은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러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뒤늦게 문화 지체를 인식한 당국이 궁궐의 원형 복원에 신경을 쓰게 됐고, 그것이 1991년 경복궁 복원 프로젝트로 이어졌다.

관저 근처의 침류정. 1920년대 지은 한옥 건물로 추정된다. 노형석 기자

지금의 청와대 복합문화공간화는 한국의 궁궐 잔혹사로 기억되는 1970~80년대의 궁궐 공연 행사장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퇴행이다. 더욱이 미술관도 청와대 인근인 북촌 곳곳에 많고, 가칭 이건희컬렉션관까지 지어지는 상황에서 충분한 전문가들과의 교감도 없이 베르사유 모델을 거론하며 미지의 전시 시설을 구상하는 모양새가 안쓰럽기까지 하다. 베르사유는 전혀 다른 성격의 유적이다. 17세기 프랑스 태양왕 루이 14세 때 천재적인 조경가 앙드레 르노트르(1615~1700)와 건축가 쥘 망사르도(1646~1708)의 설계로 대정원과 궁전이 조성되어 이후 지금까지 프랑스 정치외교사의 주요 무대로 여전히 건재하다. 한국의 청와대와 성격이 전혀 다를 수밖에 없다. 300년 넘게 유구한 역사적 맥락과 예술품, 정원의 조경 원리의 내력 등이 모두 기록되고 유산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2014년 6~11월 베르사유 궁 정원에서 한국 미술가로는 처음 초대받아 우주와 무한을 상징하는 철과 돌덩이 설치작품들을 전시했던 거장 이우환은 당시 인상적인 소감을 밝힌 바 있다. 작업할 때 300여년 전 정원을 꾸민 천재 조경가 르노트르가 ‘내 완벽함을 깨고 다른 것을 보여봐라’라고 말하는 듯한 환청을 들었고, 시공을 초월해 실력을 겨룬다는 각오로 준비했다는 말이었다. 이우환의 작품은 오롯이 르노트르의 작품과 여러 기록이 수세기 동안 철저히 보존되고 연구가 거듭됐기에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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