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 재판 지연

최원규 논설위원 2022. 7. 29. 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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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인공지능(AI) 알파고가 이세돌을 이겼을 때 민감한 반응을 보인 곳이 법조계였다. AI가 가장 먼저 침투할 분야가 법조계라는 위기감이 퍼졌다. 많은 법조인은 “양심과 상식은 인공지능이 대체할 수 없다”고 했지만 AI는 침투 영역을 넓히고 있다. IBM이 개발한 인공지능 변호사 로스(Ross)는 2018년 미국 대형 로펌에 채용돼 초당 10억건이 넘는 법률 문서를 분석했다. 미국 위스콘신주 대법원은 2017년 AI 알고리즘 자료를 근거로 피고인에게 중형을 선고한 지방법원 판결이 타당하다고 인정했다. AI가 인간 판사를 대체하는 것은 어쩌면 판사들의 재판 지연 때문일지도 모른다.

▶작가 정을병이 1974년에 쓴 단편소설 ‘육조지’엔 이런 내용이 등장한다. “형사는 패 조지고, 검사는 불러 조지고, 판사는 미뤄 조진다.” 경찰은 구타, 검사는 잦은 소환, 판사는 재판 지연으로 국민을 힘들게 한다는 뜻이다. 재판 지연이 경찰의 구타만큼 고통스럽다는 풍자이기도 하다. 그로부터 48년이 지난 지금, 경찰의 구타는 사라졌지만 재판 지연은 여전하다는 사람이 많다.

▶어느 60대 여성이 작년 8월 폭력 남편을 상대로 이혼 및 재산 분할을 청구했는데 첫 재판이 올 6월에야 열렸다고 한다. 열 달 만에 판사 얼굴을 처음 본 것이다. 재판이 언제 끝날지 가늠하기조차 어렵다. 재산 분할은 판결이 확정돼야 돈이 지급된다. 전업주부였던 이 여성은 생계를 위해 허드렛일을 해야 했다고 한다. 게으른 판사가 만든 고난이다.

▶이 여성만이 아니다. 전국 법원에서 2년 내에 1심 판결이 나오지 않은 장기 미제 사건이 최근 5년간 민사소송은 3배로, 형사소송은 2배로 늘었다고 한다. 서울중앙지법에서 5년 넘게 판결을 내리지 않은 ‘초장기 미제 사건’도 5배가량 폭증했다. 김명수 대법원장 취임 이후 고법 부장판사 승진제 폐지, 법원장 후보 추천제 도입 등으로 판사들이 열심히 일해야 할 이유가 사라진 탓이 크다.

▶'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라는 법언이 있다. 우리 헌법은 신속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규정해 놓고 있다. 판사의 재량이 아니라 책무다. 충실한 재판도 중요하지만 뚜렷한 이유 없이 재판을 미루는 건 직무유기다. 세계 여러 나라 법원에는 칼과 저울을 든 동상이 있다. 고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정의의 여신 디케(Dike)다. 우리 대법원 청사에 있는 디케상은 칼 대신 법전을 들고 있다. 공평하게 심판한다는 의미다. 여기에 이젠 시계나 달력을 하나 더 들려야 할 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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