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시·경력 채용이 대세가 된 '대이직 시대'.. 평판조회가 당락 좌우한다
국내 IT 분야 대기업 A사는 최근 기술 영업 분야 경력직 직원을 채용하던 중 동종 업계에서 5년 경력을 가진 B씨의 지원을 받았다. B씨의 경력과 전문성은 안성맞춤이었으나, 면접 결과가 다소 부정적이었다. “영업 업무를 맡기에는 지나치게 조용하고 얌전해 보인다”는 평가가 나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A사는 평판 조회 전문 기업을 통해 B씨의 현 직장 내 평판을 조회한 뒤 B씨의 채용을 결정했다. 실제 B씨와 같이 일해 본 상사 등 직장 동료 4명 모두 B씨 업무 스타일에 대해 “굉장히 적극적이고 주도적”이라는 평가를 한 덕분이다. A사 관계자는 “면접 때는 자신을 과대 포장하거나 긴장해 장점을 드러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며 “실제로 같이 일해보면 면접보다 평판 조회 결과가 맞는 경우가 훨씬 많았다”고 했다.
채용 시장의 무게 중심이 경력 위주 수시 채용으로 옮겨가면서 평판 조회가 핵심 채용 절차로 떠오르고 있다. 취업 포털 인크루트가 지난해 11월 직장인과 인사 담당자를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74.6%는 “평판 조회가 이직 성공에 큰 영향을 끼친다”고 답했다. 평판 조회 방식도 채용 기업이나 헤드헌팅 업체가 채용 후보자 몰래 알음알음 전화를 돌려 평판을 수집하던 방식에서 벗어나 당사자 동의를 전제로 양성화되는 추세다. 더 나아가 정교하게 설계된 설문지를 돌려 인물 평판을 수집하고, 빅데이터나 인공지능(AI) 기술로 분석력을 높인 전문 업체들도 등장했다.
◇대리·과장급도 채용 전 평판 조회
요즘 대기업 중에선 경력 사원 채용 시 평판 조회를 하지 않는 기업을 찾기 어렵다. 삼성그룹 계열사들은 신입을 제외한 모든 경력직 사원에 대해 평판 조회를 진행한다고 알려져 있다. 현대차·SK·LG·CJ 같은 대기업 그룹 계열사와 네이버·카카오·엔씨소프트·스마일게이트 등 IT 업계에서도 평판 조회가 활발하다. 심지어 직장 경험 없이 연구 활동만 한 박사 학위자를 채용할 때도 대학원 시절 평판 조회를 하는 곳도 있다. 헤드헌팅 기업 커리어케어의 평판 조회 전담 조직 씨렌즈센터를 이끄는 배영 센터장(전무)은 “요즘은 대기업뿐 아니라 사람 한 명이 중요한 스타트업까지 평판 조회를 의뢰한다”며 “몇 년 전만 해도 임원급 같은 관리직이 평판 조회의 주요 대상이었지만, 최근에는 대리·과장급에 대한 의뢰 비중이 거의 절반을 차지한다”고 말했다.
과거 임원급 채용 시에만 평판 조회를 했던 가장 큰 이유는 바로 비용이다. 직장 동료 3~4명을 대상으로 평판 조회 서비스를 의뢰하면 평균 90만원이 넘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인건비를 줄인 온라인 서비스를 갖춘 전문 업체들이 많이 생기면서 단돈 몇 만원으로도 평판 조회가 가능해졌다.
가령, 평판 조회 플랫폼 기업 스펙터가 작년 1월 출시한 평판 조회 서비스는 채용 후보자가 개인 정보 수집에 동의한 뒤 직장 동료의 연락처를 입력하면 자동으로 설문지를 전송하고 응답을 받아 집계하는 방식으로 운영되는데, 후보자 1인당 가격이 3만원 수준이다. 윤경욱 스펙터 대표는 “후보자 1명당 평균 이틀 내에 4개의 평판이 등록된다”며 “현재까지 이직자 약 2만5000명에 대한 평판이 등록됐다”고 말했다. 스펙터 서비스를 자주 이용하는 단골 기업은 현대·신세계·롯데·카카오 계열사 등 1800곳에 달한다.
AI를 활용한 평판 조회 분석 서비스도 많이 활용된다. 위크루트가 지난 2020년 12월 출시한 ‘체커오토’는 평판을 자동으로 수집할 뿐 아니라 수집한 평판을 구글 AI 알고리즘을 통해 분석해준다. 삼성물산, 네이버 라인, 현대모비스, LG이노텍, 엔씨소프트, 이마트 등 1000여 기업이 이 서비스를 활용 중이다. 조강민 위크루트 대표는 “인력으로 하는 기존 평판 조회 서비스에서는 채용 후보자에게 리스크(위험 요소)가 있다고 말하는 비율이 3~5% 정도지만, AI 분석에서는 15%에 달한다”며 “오히려 AI가 사람들의 평가를 더 냉정하게 분석한다”고 설명했다.
◇미국은 소셜 미디어까지 들여다봐
평판 조회 활성화 배경에는 국내 채용 시장의 변화가 있다. 대학을 갓 졸업한 사회 초년생을 한번에 대거 뽑아 기초부터 가르쳐 키우는 공채 문화가 발달한 한국에선 이직을 조직에 대한 배신으로 보는 경향이 강해 평판 조회도 음성적으로 이뤄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수시 또는 상시 채용 확산과 함께 이직이 활발해지면서 기업과 직장인들도 평판 조회에 한결 너그러워졌다. 전문가들은 “평판 조회에 응하는 직장 동료들 역시 자신도 언젠가 이직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문제 삼지 않는 분위기”라고 입을 모았다. 혹 채용 후보자가 재직처에 이직 준비 중이라는 사실을 알리기 싫을 때는 그 전 직장이나 현 재직처의 퇴직자를 통해 평판을 조회하는 방법도 활용된다.
기업 관계자들은 “점점 복잡해지는 경영 환경과 빨라지는 신기술 등장 속도에 대응하려면 경력 채용에 기댈 수밖에 없다”며 경력 채용이 앞으로 더 확대될 것으로 전망한다. 당장 국내 10대 그룹만 해도 7곳이 수시 채용으로 전환했다. 인크루트가 올해 1월 채용 계획을 확정한 기업 383곳을 대상으로 한 채용 동향 조사에서도 경력직 위주로 채용하겠다고 밝힌 기업 비율은 43.6%에 달한다. 2년 전 조사에서 이 비율은 38.9%였다. 배영 센터장은 “경력 채용이 늘면서 평판 조회가 이제 정식 채용 프로세스로 자리 잡고 있다”며 “또 하나의 면접이라 봐도 무방하다”고 했다.
미국처럼 노동 유연성이 높은 나라에선 채용 시 평판 조회(reference check)가 필수 과정으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이직을 못 하고 한 회사를 오래 다니면 오히려 무능력하다고 여기는 경향이 있다 보니 이직이 잦고 그에 따른 경력 검증 수단으로 평판 조회가 발달한 것이다. 미국 인사관리협회(SHRM) 조사에 따르면 직원 채용 시 평판 조회를 하는 기업 비율은 92%에 달한다.
평판 조회 강도도 높다. 당사자의 개인 정보 제공 동의만 있으면 동료 평가 외에 학력 검증과 신용 파산 여부, 범죄 이력까지 조회한다. 한 미국계 사모펀드 임원은 “평판 조회 시 후보자에 대한 3년 치 소셜 미디어 활동 내역을 보고서로 만들어 어떤 성향을 가졌는지도 파악한다”며 “몸값이 높은 사모펀드 업계에선 이런 절차가 보편화돼 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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