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환보유액 감소, 큰 걱정 안 해도 될 3가지 이유
미국 달러화에 대한 원화 가치가 20년 만에 최저로 떨어진 가운데, 국가 경제의 안전판 역할을 하는 외환보유액마저 이례적으로 감소해 우려를 낳고 있다. 우리나라의 외환보유액이 지속적으로 감소한 것은 1997년 외환위기,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이번이 역대 세 번째다. 외환보유액 감소가 환율 급등, 수출 부진 등과 맞물려 한국 경제를 수렁에 빠뜨릴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반면 우리나라의 경제·금융 구조가 과거와 많이 달라졌으므로 과도한 해석은 경계해야 한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빠르게 감소하는 외환 보유액
외환보유액은 중앙은행이나 정부가 국제수지 불균형을 바로잡거나 외환시장 안정을 위해 언제든 사용할 수 있도록 보유 중인 대외 지급 준비 자산이다. 외환보유액이 풍족하면 국가 신인도가 올라가 기업 및 금융기관의 해외 자본 조달 비용을 낮추고, 외국인 투자를 촉진하는 효과가 있다. 금융기관 등이 해외 차입에 어려움을 겪어 대외 결제를 할 수 없는 비상 상황에 대비하고, 환율이 급등할 때 시장에 풀어 환율을 안정시키는 역할도 한다. 서방 제재를 받는 러시아가 루블화 가치 하락을 막으며 버틸 수 있는 이유 중 하나도 작년 말 기준 6306억달러에 달하는 든든한 외환보유고 덕분이라는 분석이 많다. 러시아는 중국, 일본, 스위스, 인도에 이어 외화를 세계에서 다섯째로 많이 보유한 나라다.
이처럼 국가 경제를 지탱해주는 핵심 요소인 외환보유액이 최근 가파르게 감소하고 있다. 우리나라 외환보유액은 최근 4개월(올해 3~6월) 연속 감소(전월 대비)했는데, 이는 2015년 11월~2016년 2월 이후 6년여 만에 처음이다. 작년 11월 이후로 따지면 올해 2월을 제외하고 8개월 중 7개월간 감소했다. 1997년 외환위기(연중 7개월 감소)와 2008년 금융위기(7개월 연속 감소) 외에는 없었던 일이다. 금융위기 이후 13년여 만에 처음으로 환율이 1300원을 돌파하자 외환당국이 환율을 진정시키기 위해 황급히 달러를 푼 영향이 컸다. 한은은 올 1분기에만 83억1100만달러를 순매도했다. 유로화 등 기타 통화 외화자산의 달러 환산액이 줄어든 것도 외환보유액 감소에 영향을 미쳤다.
이에 따라 외환보유액은 작년 10월 역대 최고치(4692억774만달러)를 찍은 이후 8개월 만에 6.6% 줄어 4382억7835만달러까지 떨어졌다. 국제통화기금(IMF)이 제시하는 적정 범위(4680억~7021억달러)를 밑돈다. 연간 기준으로는 2020년에 이어 2021년까지 2년 연속 적정 범위 미달이다. 외환위기 트라우마 탓에 국내에서는 이런 상황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 한미 금리 역전으로 자본 유출 규모가 앞으로 더 커질 수 있는데, 현재 보유 외환으로는 위기 시 방어가 어렵다는 것이다.
◇대규모 자금유출 가능성 낮아
하지만 IMF 범위에 조금(작년 기준 -0.01%) 못 미친다고 해서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외환보유액 세계 1위인 중국조차 IMF 범위에 30% 이상 미달하기 때문이다. 팬데믹 이후 주요국의 외환보유액이 하나같이 급감한 것을 감안하면 한국은 오히려 사정이 나은 편이라는 지적도 있다. 한국은 팬데믹 이전인 2019년 평균치 대비 5.6% 감소에 그쳤지만, 영국, 일본, 스위스, 프랑스는 같은 기간 각각 16.9%, 9.1%, 7.2%, 6.3%나 줄었다. 뉴질랜드(-55.3%), 호주(-30.5%), 싱가포르(-20.3%)는 감소 폭이 훨씬 더 크다.
과거와 비교해 대외부채 구조가 장기화된 것도 외환보유액 감소에 지나치게 민감할 필요는 없다는 주장에 힘을 싣는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대외 부채 중 장·단기 비중은 지난달 기준 각각 73.3%, 26.7%다. 1997년과 2008년엔 단기 부채 비중이 절반에 달했다. 김효진 KB증권 연구원은 “부채 규모가 작아도 단기 위주로 구성돼 있다면 대외 금융 환경이 불안할 경우 상환 및 신규 차입이 어려워질 수 있지만 한국은 장기 비중이 꽤 높아 안정적인 편”이라고 말했다.
외환시장의 완충재 역할을 하는 ‘순(純)대외금융자산’이 서학 개미 열풍 속에 수년째 빠르게 늘었다는 점도 간과하기 어려운 사실이다. 순대외금융자산은 경제 주체들이 가진 각종 해외 금융 자산에서 부채를 뺀 것을 말한다. 순대외금융자산이 플러스(+)면 주식 및 채권, 부동산 등에서 우리나라가 투자받은 돈보다 해외에 투자한 돈이 많다는 뜻이다. 2015년 1분기 784억달러 수준이던 순대외금융자산은 지난 1분기 기준 6960억달러로 7년 만에 9배 가까이 불었다. 외환위기와 금융위기 때는 순대외금융자산이 각각(연평균) -729억달러, -1177억달러였다.
순대외금융자산은 위기 때 환율 급등(원화가치 급락)을 막는 방파제 역할을 한다. 원·달러 환율이 올랐을 때, 즉 원화 가치가 떨어졌을 때 해외 주식과 부동산, 채권에 묻어뒀던 달러 자금이 국내로 유입돼 자연스럽게 환율을 안정시키기 때문이다. 반대로 순대외금융자산이 마이너스면 국내로 들어올 돈보다 해외로 유출될 자금이 많아 원화 약세를 가속화한다.
전문가들은 환율 급등 속에 외환보유액이 빠르게 감소하는 것은 분명 경계해야 할 현상이지만, 여러 상황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대응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외환보유액을 늘리는 주요 경로는 통안채나 외평채를 발행하는 것인데, 필요 이상으로 채권을 발행하면 이자 등 상당한 비용만 낭비하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오히려 환율 상승을 부채질할 가능성도 있다. 주원 현대경제연구원 실장은 “외환보유액은 경제 주체들의 심리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신경은 써야겠지만 현재로선 대규모 자금 유출이 일어날 가능성이 거의 없으므로 크게 우려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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