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레니얼 세대, 인플레이션 주범이냐 피해자냐
전 세계를 덮친 인플레이션의 원인을 놓고 미국 내에서 뜨거운 논쟁이 오가고 있다. 돈을 너무 많이 푼 정부, 대처가 안이했던 중앙은행, 원유 공급을 늘릴 생각이 없는 산유국, 공급망 혼란을 가중시킨 러시아 등 책임 소재를 놓고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 뜻밖의 ‘용의자’가 새로 등장했다. 미국에서 가장 큰 인구 집단인 밀레니얼 세대(1981년~1996년생)다.
블룸버그통신은 “밀레니얼 세대가 성장하면서 마침내 어른처럼 소비하기 시작했다”며 이들이 집과 자동차 구매에 나서면서 인플레이션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했다. 자산운용사 스미드 캐피털의 빌 스미드 최고투자책임자(CIO)는 CNBC에 출연해 “밀레니얼 세대가 너무 많은 돈을 갖고, 소량의 물건에 달려들고 있다”며 “밀레니얼 세대가 최근 인플레이션의 주요 요인 중 하나”라고 했다. 이런 주장은 얼마나 신빙성이 있을까.
◇최대 소비 집단 된 밀레니얼 세대
미국 인구조사국에 따르면 작년 말 현재 미국의 인구는 약 3억3000만. 이 중 밀레니얼 세대는 7226만명 정도로 추정된다. 전체 미국 인구의 약 22%로 부모 세대인 베이비 붐 세대(7068만명·21%)를 넘어 최대 인구 집단으로 자리 잡았다.
코로나19 발발 전만 해도 밀레니얼 세대는 부모나 형님 세대보다 소비에 소극적이라는 분석이 많았다. 미국 부동산 정보 업체인 아파트먼트 리스트가 1979년부터 2019년 사이 세대별 주택 보유 현황을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활발하게 주택 구입을 하는 나이인 35세를 기준으로 베이비 붐 세대(1946년~1964년생)와 X세대(1965년생~1980년생)는 각각 70%와 60%가 주택을 보유한 반면 밀레니얼 세대는 53%만 ‘내 집’을 가졌다.
코로나 팬데믹을 겪으며 상황이 크게 변했다. 전미부동산협회에 따르면 2020년 미국 주택 구매자 가운데 밀레니얼 세대의 비율이 37%로 가장 높았고, 올해 들어서는 그 비율이 43%로 증가했다. 차량 구입도 밀레니얼 세대가 이끌고 있다. 시장조사기관 JD파워에 따르면 지난 2020년 미국 내 신차 구매자 중 밀레니얼 세대 비율이 32%로 가장 높았다. 밀레니얼 세대는 명품 시장에서도 큰손으로 떠올랐다. 결제 서비스 기업 클라나 집계에 따르면, 지난 1년간 밀레니얼 세대 중 사치품을 구입한 비율은 63%로 X세대(45%)나 베이비 붐 세대(25%)에 비해 크게 높다. 마케팅 업체 와이펄스에 따르면, 2020년 미국 밀레니얼 세대의 구매력은 2조5000억달러(약 3274조원)로 미국 연간 소매 판매의 30%에 달한다.
밀레니얼 세대의 왕성한 소비가 물가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은 통계로 드러난다. 지난달 미국 노동부가 발표한 소비자물가지수(CPI)를 보면, 에너지와 음식을 제외한 항목의 물가는 평균 5.9% 올랐는데, 신차 가격은 11.4%, 자동차 부품·장비 가격은 14.9% 올랐다. 전미부동산협회가 집계하는 주택 매매 가격도 1년 전보다 13.4% 급등했다. 모두 밀레니얼 세대의 소비가 왕성한 항목이다. 빌 스미드 CIO는 “주택이나 사치품 등 희소한 제품에 대한 밀레니얼 세대의 수요가 과도해 물가가 크게 올랐다”고 주장했다.
공교롭게도 밀레니얼 세대의 부모 세대인 베이비 붐 세대가 20~30대이던 1970~1980년대에도 비슷한 논쟁이 벌어진 적이 있다. 당시 물가상승률 10%를 넘는 초(超)인플레이션이 발생하자 최대 인구 집단이던 베이비 붐 세대가 주범으로 지목된 것이다. 당시 베이비 붐 세대가 소득의 19.5%를 주택에, 6.2%를 자동차에 지출할 만큼 소비 성향이 유독 높다는 것이 주된 근거였다. 85년 7월 7일자 워싱턴포스트는 경제학자들을 인용, “베이비 붐 세대가 저축을 덜 하고 신용카드로 빚을 내 콘도·주방용품·자동차 등을 소비하는 바람에 저축률이 떨어지고 금리가 오르는 현상이 나타났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도했다.
◇”인플레이션 최대 피해자” 반론도
코로나19 기간 가상 화폐와 주가 상승으로 밀레니얼 세대의 주머니 사정이 두둑해진 것은 사실이다. 금융서비스업체 스틸트 조사에 따르면 2020년 미국 비트코인 투자자 가운데 밀레니얼 세대의 비율이 76%로 압도적으로 높았다.
하지만 한창 가정을 꾸려야 하는 처지라 주택이나 자동차 구입에 나섰을 뿐이며, 코인이나 주식 투자로 돈 번 사람은 밀레니얼 세대 중에서도 소수라는 반박도 있다. 이달 초 여론조사기관 해리스폴이 18~41세 미국인 1000여 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밀레니얼 세대 절반은 얇은 주머니 사정 때문에 원하는 것을 사지 못할 것이라고 답했다. 돈 때문에 자주 어려움을 겪는다는 응답도 38%에 달해 미국 전체 성인 평균(13%)보다 훨씬 높았다.
더 나아가 밀레니얼 세대는 오히려 인플레이션의 고통을 온몸으로 받는 최대 피해자라는 주장도 나온다. 경제매체 비즈니스 인사이더는 “밀레니얼 세대는 40세 이전에 이미 두 번의 경기 침체를 겪었고, 하필 주택이나 자동차 등 거액의 돈을 써야 하는 인생의 단계에 있기 때문에 더 큰 고통을 받고 있다”고 했다. 올해 1월 웰스파고 은행 조사에 따르면 25~34세 계층의 체감 물가상승률은 6.8%로, 65세 이상의 체감 물가상승률(5.8%)보다 높았다.
경제매체 포천은 “밀레니얼 세대는 역사적인 불황기에 졸업과 취업을 맞이하는 등 부를 쌓아야 하는 시기에 지속적인 장애물에 가로막혀 있었다”며 “이제는 치솟는 집값, 정체된 임금 인상, 그리고 엄청난 학자금 대출 부채에 직면해 고통받고 있다”고 했다.
미국에서 제기된 밀레니얼 세대 인플레이션 책임론은 집값 급등기 한국에서 나온 ‘30대 영끌족’ 책임론과 유사한 점이 많다. 문재인 정부 때 집값이 폭등하자 ‘무리하게 집을 산 영끌족이 집값을 끌어올렸다’는 주장과 ‘한창 집을 마련해야 하는 시기인 30대가 집값 폭등의 최대 피해자’라는 주장이 맞붙었다. 김태기 전 단국대 경제학부 교수는 “서로 상충되는 두 주장이 동시에 나오는 건 한국과 미국 모두 젊은 세대 내에서 소득과 소비가 양극화됐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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