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기록 초안도 남겨야"..'사초폐기' 논란 10년만에 마무리
文 가세로 최대 정쟁이슈 부각..정작 원본은 남아
盧청와대, 국정원에 회의록 남겨두며 초안은 삭제
대법 "초안도 대통령기록물"..백종천·조명균 유죄
[이데일리 한광범 기자] 2012~13년 여의도 정치권을 뜨겁게 달궜던 노무현정부의 ‘사초(史草) 폐기’ 논란이 10년 만에 마무리됐다. 원본을 남겨뒀더라도 초안을 폐기한 것은 대통령기록물법 위반이라는 것이 대법원의 최종 결론이었다.
사건의 시작은 2012년 대선을 두 달여 앞둔 2012년 10월 정문헌 당시 새누리당(현 국민의힘) 의원(현 종로구청장)의 국정감사 발언이었다. 이명박정부 통일비서관을 역임한 정 의원은 “2007년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속에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해 NLL(서해북방한계선)에 대해 미국이 땅따먹기 하려고 제멋대로 그은 선이라며 앞으로 NLL을 주장하지 않겠다고 말했다”고 주장했다.
‘MB통일비서관’ 정문헌 “盧, ‘NLL 포기발언’ 했다”서 촉발
이와 관련해 검찰은 박근혜 후보의 대선 승리 이후 민주당 고발로 관련 의혹 수사에 나섰지만 2013년 2월 정 의원을 무혐의 처분했다. 회의록을 보관하고 있던 국정원으로부터 관련 부분의 발췌록을 제출받아 분석한 결과 “정 의원의 발언을 허위사실로 인정하기에 부족하다”고 결론을 내린 것이다.
수면 아래로 가라앉아있던 관련 논란이 다시 불거진 것은 같은 해 6월이다. 국정원의 댓글 공작 파문이 커지는 와중에 새누리당이 민주당에 대한 역공 카드로 정상회담 회의록 전문 공개를 추진했다. 민주당 지도부도 전문 공개에 조건부 찬성 입장을 보이며 여기 동조했다.
논란에 기름을 부은 것은 당시 대선 패배 후 잠행을 하던 문재인 당시 의원이었다. 국정원이 비밀기록으로 보관하고 있던 회의록 공개를 거부하던 가운데 문 의원은 “대통령기록관에 보관돼 있는 회의록 원본을 열람해, NLL 포기 발언이 실제 있다면 정계를 은퇴하겠다”고 폭탄선언했다.
국정원은 문 의원 발언 3일 후 전격적으로 회의록을 공개했다. 여야가 국정원 댓글 공작 국정조사에 전격 합의하자 남재준 당시 국정원장이 ‘국정원 직원 사기 진작’을 이유로 회의록 공개를 명령한 것이 원인이었다.
국정원 원본 있음에도 ‘사초폐기’ 규정짓고 공세
하지만 끝내 별도 회의록은 대통령기록관에 없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새누리당은 “노 전 대통령이 NLL 포기 발언을 감추기 위해 회의록을 무단으로 폐기했다”며 이를 ‘사초 폐기’라고 규정짓고 공세를 강화했다.
고발장을 접수한 검찰도 즉각 수사에 나섰다. 문 의원을 참고인으로 공개 소환하는 등 강도 높은 조사 끝에 백종천 전 대통령비서실 외교안보실장과 조명균 전 안보정책비서관(이후 문재인정부 통일부 장관 역임)을 2013년 11월 재판에 넘겼다. 당시 검찰은 “삭제된 대화록과 유출된 대화록이 모두 완성된 형태의 회의록”이라고 판단했다.
검찰 조사 결과 국정원은 2007년 10월 2~4일 열린 정상회담 녹음파일을 토대로 회의록을 작성해 청와대에 전달했다. 조 전 비서관은 이를 일부 수정한 후 같은 달 9일 청와대 전자결재시스템에 정상회담 문서 파일을 첨부해 전자문서(이하 10월 전자문서) 결재를 상신했다.
노 전 대통령은 같은 달 19일 상신된 전자문서를 결재한 후 별도의 처리 의견을 담은 문서 파일을 첨부했다. 조 전 비서관은 지시에 따라 국정원 측에 일부 표현 수정 등을 요청해 같은 달 24일 이를 전송받았다.
전송받은 회의록은 이후 수정을 거쳐 1급 비밀 문건으로 만들어졌고 이는 백 전 실장을 거쳐 2008년 1월 노 전 대통령에게 보고됐다. 노 전 대통령은 이 같은 과정을 거친 ‘완성 회의록’을 국정원에서 보관하도록 하되, 청와대 전산시스템엔 남겨두지 않도록 지시했다.
백 전 실장과 조 전 비서관은 이에 따라 국정원 측에 종이 형태의 ‘완성 회의록’을 건네는 한편 청와대에서 보관 중이던 별도의 회의록은 파쇄하고, 노 전 대통령에게 결재를 받았던 10월 전자문서도 삭제했다. 회의록의 초본인 만큼 별도로 보관할 필요가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법정에서의 쟁점은 삭제된 10월 전자문서를 대통령기록물로 생산된 대통령기록물로 볼 수 있는지 여부였다. 검찰은 노 전 대통령의 결재가 있었던 만큼 명백한 대통령기록물이라고 주장했지만 1·2심 판단은 달랐다.
1·2심은 “결재는 단순히 전자문서 서명을 넘어 결재권자가 내용을 승인해 문서의 효력을 발생시킨 경우다. 노 전 대통령이 구체적 재검토 지시가 담긴 파일을 첨부한 만큼 10월 전자문서는 대통령기록물이 아니다”고 판단해, 백 전 실장과 조 전 비서관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하지만 대법원의 판단은 달랐다. 대법원은 2015년 11월 사건을 접수한 후 무려 5년 동안의 심리 끝에 2020년 12월 “당시 청와대 전자결재시스템은 의사소통 과정과 결과물 축적까지 목적으로 했다. 대통령 서명으로 10월 전자문서는 대통령기록물로 생산됐다고 봐야 한다”며 유죄 취지로 하급심 판결을 파기했다. 청와대 전자결재시스템상에서 주고받는 모든 문서가 대통령기록물에 해당한다는 결론이었다.
대법원 판결 취지에 따라 사건을 다시 심리한 서울고법은 지난 2월 백 전 실장과 조 전 비서관에게 각각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법원은 “대통령기록물관리법에 따라 생성·보존돼야 할 역사적 기록물을 무단으로 파기했다”면서도 “국정원에 회의록이 보존돼 내용 확인이 가능한 점을 고려했다”고 양형 이유를 설명했다. 두 사람의 재상고로 다시 대법원이 심리에 나섰고, 대법원 2부(주심 천대엽 대법관)는 28일 유죄를 확정했다.
한광범 (totoro@e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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