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취·살인으로 이어지는 '가스라이팅'.."범죄화 논의 시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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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경고에 자신이 알맞게 대응하지 못해서 벌어진 일이라는 죄책감이 앞섰다.
올해 들어 '용소계곡 살인사건'에 이어 '프로파일러 성추행 의혹'까지 가스라이팅(Gaslighting)에 기반한 범죄가 속속 드러나고 있다.
가스라이팅이란 타인의 심리와 상황을 조작하여 판단력을 잃게 만든 후, 지배력을 강화하는 행위를 일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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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정 "살인 등 강력범죄로 이어지는 가스라이팅 처벌 근거 미비"
경찰도 "학대당하고 오히려 부모 불쌍히 여기는 아이들 많아 곤혹"
해외선 처벌 정립 움직임..영국 중범죄법 개정·미국도 판례 만들어
[헤럴드경제=박혜원 기자] #1. “어머니가 자해했을 때, 내 잘못이라고 생각했다.” 가정폭력을 지속적으로 당해왔던 강모(28) 씨는 어머니가 눈앞에서 자해를 시도하던 순간, 스스로를 탓했다. 어머니의 경고에 자신이 알맞게 대응하지 못해서 벌어진 일이라는 죄책감이 앞섰다. 강씨는 20대 초반 일찍이 자취를 시작한 뒤에야 “숨통이 트였다”고 털어놨다.
#2. 2016년 ‘문단 내 성폭력’ 고발에 참여했던 A(32) 씨는 “성희롱을 당했으면서도 (가해자가) 나쁜 의도를 가진 건 아닐 거라 생각했다”고 털어놨다. 현업 시인으로 활동하고 있었던 가해자가 지속적으로 자신의 영향력을 과시해왔기 때문이다. A씨는 예술계에서 성폭력 고발 운동이 잇따른 뒤에야 그제야 자신의 피해 사실을 인지할 수 있었다.
올해 들어 ‘용소계곡 살인사건’에 이어 ‘프로파일러 성추행 의혹’까지 가스라이팅(Gaslighting)에 기반한 범죄가 속속 드러나고 있다. 학계 등에선 법과 제도가 전무한 가스라이팅 범죄에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가스라이팅이란 타인의 심리와 상황을 조작하여 판단력을 잃게 만든 후, 지배력을 강화하는 행위를 일컫는다. 1930년대 영국에서 만들어진 연극 ‘가스라이트(Gaslight)’에서 유래한 말이다. 주인공인 남편은 집안의 가스등을 일부러 희미하게 켜놓은 뒤 아내가 어둡다고 할 때마다 “당신이 잘못 본 것이다”라고 답해 결국 아내가 현실감각을 잃게 만든다.
전문가들은 가스라이팅이 용소계곡 살인사건처럼 심각한 범죄로 이어질 수 있어 더욱 위험하다고 입을 모은다. 이수정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는 28일 헤럴드경제와 통화에서 “착취나 살인처럼 다양한 양상의 범죄로 이어질 수 있을 뿐더러 피해자가 범죄를 인지하지 못해 신고도 어려워서 더 문제”라고 강조했다.
‘n번방 사건’ 피해자 상담에 참여했던 황미향 젠더연구소 상임이사도 “심리적 지배를 당한 상태에서 피해를 당한 이들이 많았다”고 전했다. 황 이사에 따르면 피해자는 사건 당시 중학교 2학년으로 교우관계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가해자는 문화상품권 등을 보내주며 SNS(사회관계망서비스)로 3개월에 걸쳐 접촉하며 인간관계를 고립시켰던 것으로 전해졌다.
피해자가 범죄 사실을 부정하게 만드는 가스라이팅은 수사에 차질을 빚게 만드는 경우도 많다. 여성청소년과에서 근무하는 서울의 한 경찰관은 “아동학대 피해자들이 오히려 부모를 불쌍하게 여기는 경우가 많아 진술 확보에 어려움을 겪곤 한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범죄 발생 시에 가스라이팅 정황을 고려해 가중 처벌할 수 있는 제도는 전무한 상황이다. 이 교수는 지난달 27일 펴낸 한국경찰연구학회 학회지 ‘한국경찰연구’에 게재한 논문에서 “관련 법률이 제정되어 있지 않아 범죄 성립이 어렵고 처벌 근거가 미비하다”고 지적했다.
반면 해외에서는 가스라이팅에 대한 처벌이 정립되는 추세다. 지난해 미국에선 남자친구를 비난하는 내용의 메시지를 7만5000개에 걸쳐 보내 결국 극단적 선택에 이르게 만들었던 한인 여대생에게 과실치사를 적용해 처벌했다. 2015년 영국은 ‘중범죄법’을 개정해 친밀한 관계나 가족관계 내에서 통제적인 행동을 반복적으로 행할 경우 처벌하도록 했다.
이 교수는 “자기결정권을 중요하게 여기는 인식이 세계적으로 보편화된 영향”이라고 설명했다. 황 이사 역시 “아동학대법, 스토킹처벌법, 가정폭력처벌법 등을 개정해 가스라이팅 정황이 발견되면 가중처벌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며 “특히 성범죄 대다수는 가스라이팅에 기반한 경우가 많아 제도 마련이 시급하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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