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azine] 선비가 반한 계곡, 여인이 사랑한 폭포

진성철 2022. 7. 28. 08:00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안덕계곡 기암절벽. 창고천이 기암절벽을 휘감아 돌아 흘러간다. [사진/진성철 기자]

(서귀포=연합뉴스) 진성철 기자 = 여름이 오면, 제주 선비들은 계곡에서 시를 읊었고, 제주 여인들은 폭포에서 물을 맞았다.

제주 돈내코 계곡의 원앙폭포 [사진/진성철 기자]

추사 김정희가 좋아한 안덕계곡

안덕교 위에서 바라본 안덕계곡 [사진/진성철 기자]

제주 서귀포에는 유배당한 선비들이 좋아하던 계곡이 있다. 계곡 자체가 천연물 제377호다. 기암절벽과 상록수림으로 숨겨져 있어 깊이를 쉽게 가늠하기 힘들다. 귀양 온 추사 김정희와 권진응, 임관주 등 조선 후기 선비들이 즐겨 찾아 글을 읽고 시를 읊었던 안덕계곡이다.

안덕면 감산리에 있는 이 계곡은 어쩌면 잊혀 가는 명소일 수도 있다. 안덕면 사계리 포구의 식당 직원에게 말을 거니 "뭐 볼 게 없어서 안 가봤어요"란 답이 돌아왔다. 한때는 유료관광지였으나 방문객이 줄어 무료 개방됐다.

암반이 넓게 펼쳐져 있는 안덕계곡 [사진/진성철 기자]

안덕계곡은 직접 들어가 봐야 그 멋을 알 수 있다. 한라산 남서쪽으로 흐르는 창고천이 기암절벽을 끼고 돌아 나오는 지점이 가장 멋지다. 주차장에서 걸어 10여 분이면 갈 수 있다.

안덕면 감산리 해안에 있는 박수기정. 대평리 포구에서 잘 보인다. [사진/진성철 기자]

감산리 해안에 있는 박수기정이 잘 보이는, 대평리 포구 가는 길 초입에 주차장이 있다. 박수기정은 바가지로 마실 샘물(박수)이 솟는 절벽(기정)이란 뜻이다.

안덕계곡 입구의 돌하르방(왼쪽)과 용천수인 조배남송이. [사진/진성철 기자]

안덕계곡 입구로 걸어가면 돌하르방이 서 있다. 그곳에서 길은 돌로 포장된 안덕계곡 가는 방향과 나무 데크로 된 샛소다리 쪽으로 나누어진다. 먼저 샛소다리로 향했다. 짧은 나무 데크 길이 끝나는 곳에 우물이 하나 보였다. 용천수가 솟는 '조배남송이'다. '조배남'은 구실잣밤나무를 말하고 '송이'는 샘물을 뜻한다.

주상절리 아래 바위 그늘 집터 [사진/진성철 기자]

길을 되돌아 안덕계곡으로 갔다. 바위 절벽 아래와 주상절리 아래 언덕에 동굴이 하나씩 보였다. 선사시대 사람들이 살았던 바위 그늘 집터다. 집터 샘물도 두 곳이 있다. 여기서는 토기와 곡물을 빻는 데 사용한 공잇돌이 발견됐다고 한다.

안덕계곡 [사진/진성철 기자]

유료관광지 개발 때 장식용으로 가져다 둔 연자매를 지나면 계곡 바닥으로 내려가게 된다. 계곡은 암반이 넓게 펼쳐있고, 절벽이 양쪽에 병풍처럼 둘러쳐 있다. 암벽 위와 계곡 언덕에는 나무들이 울창하다. 물길은 크지 않지만 물장난하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안덕계곡 [사진/진성철 기자]

계곡 바닥 가운데 섰다. 눈은 절로 앞에 보이는 절벽 사이의 검은 곳에 닿았다. 계곡 양쪽의 깎아지른 두 절벽과 울창한 푸른 나뭇잎들이 빛을 가려버린 공간이다. 검은 어둠에서부터 물길이 흘러 내려오고, 사람들은 그곳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듯했다.

안덕계곡 기암절벽 [사진/진성철 기자]

때마침 검은 공간 바로 앞에 선 여인의 붉은 원피스가 눈에 선명했다.

안덕계곡 기암절벽 [사진/진성철 기자]

기암절벽에 이르니, 이번엔 어두운 기암절벽을 가운데 두고 양쪽 계곡 사이로 들어오는 빛이 눈 부셨다. 우뚝 솟은 절벽과 그 아래 넓은 못에 담긴 신록, 절벽을 휘감아 돌아 나가는 창고천, 협곡으로 사이로 쏟아지는 빛의 강에 사람들이 매료되는 안덕계곡이었다.

계곡 안에서 본 풍경에 감탄해 계곡 바로 위를 지나는 안덕교에 섰다. 그냥 지나칠 때 알 수 없었던 계곡이 더 깊어 보였다. 글 읽는 선비들이 반할 만한 계곡이란 생각이 들었다.

여인들이 사랑하는 원앙폭포

원앙폭포 [사진/진성철 기자]

제주 돈내코 계곡에는 여자들이 사랑하는 폭포가 있다. 높이는 5m 정도로 낮지만, 크고 작은 물줄기 한 쌍이 양 갈래로 떨어지는 원앙폭포다. 금실 좋은 원앙 한 쌍이 살았다고 '원앙폭포'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큰 물줄기 옆으로는 원앙 새끼들 마냥 조그만 물줄기도 흘러내린다. 매년 백중날이면 제주 여인들이 여름철 물맞이를 했던 곳으로 이름난 폭포다.

두 갈래 폭포가 떨어지는 원앙폭포 [사진/진성철 기자]

가물었던 제주에 며칠간 비가 내려 원앙폭포는 시원하게 흘러내렸다. 원앙폭포를 찾은 이 날도 흐리고 부슬비가 내렸다. 기온은 20℃ 초반으로 서늘했다. 폭포 아래에는 물놀이할 수 있는 제법 넓은 소(沼)가 있다. 주변은 바위로 둘러싸여 있다. 계곡의 바위들 위엔 현무암으로 쌓은 돌탑들이 군데군데 보였다.

원앙폭포 아래 소에 수영하러 가는 여성들 [사진/진성철 기자]

젊은 여성 두 명이 겉옷을 벗기 시작했다. 수영복 차림이다. "물에 들어가실 거예요"라고 물으니 주저 없이 "네"라고 대답했다. 물은 허리께에 닿았고, 맑고 투명한 초록 물속에 여인의 하얀 발이 또렷했다.

원앙폭포 폭포수를 맞는 여성과 사진 촬영하는 친구 [사진/진성철 기자]

그들은 "아! 차가워"를 외치면서도 두어 차례 연못에서 헤엄을 쳤다. 그리곤 한 명은 큰 물줄기의 원앙폭포까지 걸어가 여름날의 폭포수를 맞았다. 친구는 스마트폰을 들고 "(사진)하나 건졌어!"라고 했다.

원앙폭포에서 물멍을 즐기는 여인들 [사진/진성철 기자]

중년의 두 여인은 짙푸른 이끼가 뒤덮은 바위들 사이에 조용히 앉았다. 핑크빛 우산을 받쳐 들고 20여 분가량 속칭 '물멍'을 즐겼다.

물멍을 끝내고 일어서며 "생각이 끊어져서 좋아요"라고 한 여인이 근사한 답을 남겼다. 또 "걸어 걸어 어디론가 가겠죠"라고 했다. 친구는 "맑은 날에 오면 더 예뻐요"라고 귀띔했다. 원앙폭포의 소가 흐린 날엔 무채색이지만 맑은 날엔 영롱한 에메랄드빛이 나는 까닭이다.

지나치면 섭섭한 제주바당과 사계리 해변

안덕면 사계리 해변 [사진/진성철 기자]

제주에 왔으니 바다를 보지 않고 갈 수는 없다. 요즘 인기 있는 사계 해변과 포구, 설쿰바당에 들렀다.

사계 해변의 바다로 뻗어있는 넓은 바위 터 [사진/진성철 기자]

사계 해변은 넓게 펼쳐진 평평한 바위, 바다로 길게 뻗어있는 현무암 덩어리들, 모래 해변의 순비기나무 등이 바다와 어우러져 있다.

사계리 앞바다 형제섬 [사진/진성철 기자]

사계 해변 형제섬 쉼터에 앉으니 종 모양을 닮은 산방산, 용머리 해안, 감산리 박수기정 등이 왼쪽으로 보였고, 앞바다에는 형제섬이, 그리고 송악산이 오른쪽으로 보였다.

사계리 해변, 사계 포구, 용머리 해안, 한라산이 앞에서부터 차례로 보인다. [사진/진성철 기자]

상모리로 넘어가는 해변 끝에는 사람, 사슴, 말 발자국 등 화석 흔적이 남은 넓은 바위 터가 있다. 이곳 화석 산지는 출입 금지라 직접 들어가 볼 수 없었다.

순비기나무들이 자라는 사계리 해변 언덕과 산방산 [사진/진성철 기자]

해변을 따라 있는 낮은 언덕에는 발목 높이로 순비기나무가 빼곡히 자랐다. 사계 포구에서 만난 할머니들은 순비기나무를 순베기, 순북이라고 했다. 열매를 따 베개를 만들면 아이들 건강과 두통에 좋다고 했다.

사계리 해변 현무암에 부딪히는 파도 [사진/진성철 기자]

모래 해변 곳곳에는 파도에 아랫부분이 패이고 위에는 큰 구멍들이 군데군데 난 바위들이 펼쳐져 있었다. 바다의 검은 현무암들 사이사이로 부딪치는 파도도 인상적이었다.

사계 포구에 있는 해녀 동상 [사진/진성철 기자]

사계 포구는 해녀로 널리 알려졌다. 포구에는 현무암으로 벽을 장식한 해녀 탈의실과 해녀의 물질 장비들이 보관된 곳이 있다. 해녀 동상도 있고, 1991년 러시아의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이 방한했을 때 동행한 라이사 여사가 해녀들과 정겹게 얘기하는 조형물도 있다.

설쿰바당 용암언덕에서 바라본 산방산과 용머리 해안 [사진/진성철 기자]

사계 포구에서 용머리 해안 쪽 해변은 설쿰바당이란 이름이 가졌다. 설쿰은 '바람 때문에 쌓인 눈에 구멍이 뚫린다'는 뜻이라고 한다. 설쿰바당 용암 언덕에는 현무암이 덩어리로 뭉쳐 바위 언덕을 이루고 있다.

설쿰바당에서 바다를 바라보는 여행자들 [사진/진성철 기자]

바람이 세찬 날 설쿰바당에선 바람을 맞다 기운이 다 빠질 지경이었다. 그래도 눈을 감고 바람 소리를 듣다 하늘로 불쑥 솟은 산방산 한번 보고, 파도 소리를 듣다 바다로 튀어나온 용머리 해안 한번 바라보니 기분이 오히려 웅장해졌다. 한 청년도 그렇게 한 시간여 바람과 맞서다 일어섰다.

설쿰바당 용암 언덕에서 한 청년이 거센 바람을 맞고 있다. [사진/진성철 기자]

※ 이 기사는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22년 7월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zjin@yna.co.kr

▶제보는 카톡 okjebo

Copyright © 연합뉴스. 무단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