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에 판결 3개만 하자는 게 암묵적 합의"
본지는 현직 판사 20명에게 ‘재판 지연 원인’에 대해 물었다. 이 가운데 7명이 ‘고등법원 부장판사 승진 제도 폐지’를 원인으로 지적했다. 법원은 전통적으로 재판을 열심히 하고 좋은 판결을 쓰는 판사를 고법 부장으로 발탁하는 제도를 운영해 왔다. 그러나 김명수 대법원장이 2017년 취임 후 이 제도를 폐지했다. 법원장을 소속 판사들의 추천을 거쳐 뽑는 제도도 도입했다. 수도권 지방법원의 한 판사는 “과거에는 판사들이 고법 부장이 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부처럼 일이 많고 힘든 자리에서 묵묵히 일했는데 지금 인사 제도는 그런 동기 부여가 안 된다”고 했다. 고법 부장 출신인 한 변호사는 “대법원장에게 잘 보이거나 후배 판사들에게 인기를 얻으면 법원장도 될 수 있는데 어떤 판사가 배석 판사들에게 욕먹어가며 열심히 재판하려고 하겠느냐”고 했다.
판사 8명은 “‘일주일에 판결문 3건’ 관행이 새로 생긴 것도 재판 지연의 원인이 될 수 있다”고 했다. 2019년 무렵 전국 지방법원 민사 합의부 배석 판사들 사이에서 각자 주심을 맡은 사건을 기준으로 일주일에 판결문을 3건만 쓰겠다고 암묵적으로 합의가 이뤄졌다고 한다. 한 지방법원 부장판사는 “원래는 법원행정처나 일선 법원장이 재판 통계를 확인해 미제 사건 처리를 독려했는데 지난 정부의 사법 행정권 남용 수사 이후 아예 손을 놓아버린 상황”이라고 했다. 이에 대해 배석 판사나 단독 판사들은 “2019년에 과로사한 판사도 나왔는데 판사들에게 야근을 강요할 수는 없다” “판사나 재판 연구원을 늘려 사건 부담을 줄여야 제때 판결이 나올 수 있을 것”이란 의견도 내놨다.
본지는 국민의힘 전주혜 의원실을 통해 대법원에 장기 미제 사건이 늘어나고 있는 원인이 무엇인지를 공식 질의했다. 대법원은 “법원의 인적, 물적 자원이 충분하지 못한 데에 근본적인 원인이 있다”고 답변했다. 판사 한 사람이 처리하는 사건 수가 다른 나라에 비해 현저하게 많다는 것이다. 하지만 판사 출신인 한 변호사는 “그 답변은 김 대법원장 취임 후 재판 지연이 급격하게 심화된 현상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면서 “사건 수는 비슷하고 판사는 늘었는데 재판만 지체된 것”이라고 했다. 실제로 법원에 접수된 민·형사 사건은 2010년 이후 해마다 150만 건 안팎으로 크게 변화가 없었고, 전체 판사 숫자도 2014년 2800명 수준에서 연간 50~80명씩 증원돼 왔다.
과거보다 사건이 복잡해진 것이 재판 지연의 원인이 된다는 지적도 있다. 한 고등법원 판사는 “10년 전만 해도 대형 형사 사건 기록이 500쪽짜리 8권쯤이었는데 지금은 수십 권이 됐고 민사 사건에서도 당사자가 10명 이상인 사건이 크게 늘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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