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시장 완전정복] 생명의 끝에 남는 숯으로..미술시장 대세로 떠오르다

김슬기 2022. 7. 27.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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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상반기 경매 낙찰액 43억원
이우환·박서보와 '빅3' 급부상
2주간 가마에서 구운 숯으로
음과양, 밝음과 어둠 공존 담아
佛 페로탱 갤러리 전속 작가로
'포스트 단색화' 대표주자 부각

◆ 미술시장 완전정복 ⑩ '숯의 작가' 이배 ◆

색깔을 버리고 숯 작업에 몰입해 유럽을 사로잡은 이배 작가. [사진 제공 = 조현화랑]
'숯의 작가' 이배(66)가 미술시장에서 새로운 대세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지난해 국내 경매 낙찰 총액 순위에서 8위를 기록한 데 이어 올해 상반기엔 6위까지 올라왔습니다. 지난해 매출 약 59억원을 올린 데 이어 올해는 6개월 만에 약 43억원을 팔았습니다. 작년 낙찰률은 95.73%였고, 올해는 88.3%를 찍었습니다. 출품작 추정가가 꾸준히 오른 걸 감안하면 상승세라고 볼 수 있습니다.

6위보다 더 눈에 띄는 건 국내 작가 중 이우환(86) 박서보(91) 김환기(1913~1974)의 뒤를 이어 4위에 오른 점입니다. 작년 시장의 주인공이었던 물방울 작가 김창열(1929~2021) 앞에 섰고, 생존 작가 '빅3'에 진입했습니다.

2~3년 전까지 1000만~3000만원대 작품이 주로 팔리던 이배는 최근 '붓질' '무제' '풍경' 등 작업을 막론하고 꾸준히 1억원을 넘기고 있습니다. 특히 지난가을은 이배의 계절이었습니다. 작년 9월 케이옥션에서 '불로부터-ch55'(175×140㎝)가 4억원을 찍으며 추정가의 3배를 넘어섰습니다. 곧장 11월 서울옥션에선 200호 대작 '불로부터 ch29'가 4억4000만원에 도달했습니다. 고단한 작업 방식이 집약된 2000년대 초반 '불로부터'의 인기가 가장 좋아 낙찰가 상위권을 싹쓸이하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절단한 숯 조각을 접합하고 표면을 연마해 숯이 품고 있는 광택을 끌어냅니다. 평면이 된 숯 위에 흰색 드로잉 라인을 더해 '음과 양, 밝음과 어둠, 존재와 부재'의 공존을 이야기합니다.

고향인 경북 청도에 숯가마가 있습니다. 소나무를 구해 끈으로 묶은 뒤 이글루처럼 생긴 가마에서 2주를 굽고 2주를 식힙니다. 숯은 천천히 오래 구울수록 광택이 나기 때문입니다. 이 숯가루를 짓이겨 화면에 두껍게 붙이거나 드로잉을 합니다.

1989년 파리로 건너간 그는 '가난한 이방인' 시절 숯을 만났습니다. 재료 살 돈도 없던 그의 눈에 값싼 바비큐용 숯이 들어왔습니다. 파리 근교의 빈 담배공장에서 숯으로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자신의 정체성과 작품세계를 고민하던 시기에 '모든 생명이 끝에 도달하는 세계'인 숯을 만나게 된 겁니다. 홍익대 서양학과를 나왔지만, 역설적으로 숯의 수묵화로 서구의 눈에 들 수 있었습니다. 백남준과 친분이 두터웠던 기자의 보도로 프랑스 화단에 자리 잡기 시작했습니다. 2019년 베니스 비엔날레 기간에 빌모트 파운데이션 개인전을, 뉴욕 도쿄 등에 이어 파리에서는 올해 초 다섯 번째 페로탱 개인전을 열었습니다.

'풍경(Landscape)' 시리즈는 농부가 밭을 갈아 골을 내듯, 캔버스라는 대지에 숯으로 고랑을 냅니다. '무제'는 단순한 드로잉 같지만 재료 덕분에 특별한 물성을 얻습니다. '불로부터'는 20여 년을 이어온 작업이지만 매 작업이 새롭습니다. 파리 청도 대구 서울 뉴욕의 작업실을 오가는 '글로벌 노마드'가 가장 한국적이고, 향토적인 작업을 하는 것도 흥미롭습니다.

지난 7월 3일까지 전속 화랑인 부산 조현화랑에서 열린 개인전 'Oblique(비스듬히)'에도 실험적인 작업을 선보였습니다. 전시장을 캔버스 삼아 벽과 바닥을 가득 채우는 거대한 회화를 선보였습니다. 화이트큐브(Whitecube)를 찾은 이들은 흑과 백만 남은 숯의 수묵을 만나 고양된 감정을 느끼고 돌아갔습니다. 주민영 조현화랑 실장은 "전시에 하루 2000명이 올 만큼 성황이었다. 최근 이배의 수요가 폭발했는데 작업 방식 때문에 작품 수가 많지 않다. 해외 갤러리가 주목하고 리움과 국립현대미술관 그룹전 등 미술관 수요가 이어지는 것이 맞물린 듯하다. 최근 자극적인 전시가 많은데 이배는 고요하고 정적인 전시라는 점도 각광받는 이유 같다"고 설명합니다.

국제적 평판을 가장 중시하는 국내 수집가들에게 해외 전시 계획이 빽빽한 이배의 시장가치는 순풍에 돛을 단 것으로 보일 것 같습니다. 이배의 체급이 높아지려면 다음 도전은 생존 작가로 박서보, 정상화 뒤를 이어 5억원의 벽을 깰 필요가 있습니다. 이배의 기록 도전은 '포스트 단색화 시대'를 열 수 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습니다. '장유유서' 문화가 뚜렷한 한국에서 왕성한 현역인 60대 작가가 어디까지 도달할 수 있을지 기대됩니다.

[김슬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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