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이머들이 되찾은 문화재..왕실 도장 담는 '보록' 英서 금의환향

유승목 기자 2022. 7. 27.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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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외소재문화재재단, 조선시대 문화재 환수..10년 넘게 국외문화재 환수 지원 라이엇 게임즈 역할 커
최응천(오른쪽부터) 문화재청장, 김인규 국립고궁박물관장, 양세현 라이엇 게임즈 한국퍼블리싱 사업총괄이 27일 서울 중구 한국의 집에서 열린 환수 문화재 '보록' 언론공개행사에 참석하여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27일 오전 서울 중구에 있는 복합문화공간 한국의 집에서 문화재청 산하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하 재단)과 라이엇게임즈가 만났다. 수 백년 전 만들어진 문화재를 다루는 기관과 21세기 놀이문화를 만드는 게임회사가 뜬금없이 한 자리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접점은 물론 정책·사업적으로 엮일 일이 없을 것 같은 재단과 라이엇게임즈 관계자들은 네모난 낡은 상자를 바라보며 연신 웃었다.

이들이 단상에 올린 상자는 '보록'이다. 조선시대 왕과 왕비에게 존호나 시호 등을 올리며 제작된 어보(御寶)를 담아둔 외함이다. 역사성을 두루 갖춘데다, 조선왕실 관련 연구 외연을 넓힐 수 있는 단초가 되는 문화재라 가치가 상당하다. 종묘나 국립고궁박물관에 보관돼 있어야 할 이 보록이 한국 땅을 밟은 것은 불과 한 달이 채 되지 않았다. 문화재당국과 게임회사가 한 자리에 모인 이유다.

이날 문화재청과 재단, 라이엇게임즈는 국외소재문화재로 타지를 떠돌다 고국에 돌아온 보록의 국내 환수 성공 소식을 발표하고, 언론에 처음 공개했다. 문화재청은 다음달 중으로 현재 국립고국박물관에서 진행 중인 '나라 밖 문화재의 여정' 전시를 통해 일반 관람객에게도 이 보록을 선보일 계획이다.
'이역만리' 떠돌던 보록, 어떻게 돌아왔나
보록. /사진=문화재청
문화재당국에 따르면 전 세계에 흩어져 떠도는 국외소재문화재는 올해 기준으로 21만4200여점에 달한다. 19세기 구한말부터 일제강점히, 6·25 전쟁 등을 겪은 지난 100년이 워낙 혼란스러웠던 탓에 문화유산 역시 도난과 약탈에 무방비로 노출된 탓이다. 보록 역시 이 같이 해외로 반출됐고 지난해 영국에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보록을 되찾아오는 과정은 마치 영화의 한 장면 연상케 한다. 지난해 말 재단이 보록이 경매에 올라온다는 유통정보를 입수한 후 6개월 간 긴박한 매입 작업이 이뤄졌다. 코로나19(COVID-19)로 소장자와의 협의나 가치 파악 현지 조사가 쉽지 않았지만, 올해 1월부터 4월까지 전문가 검토와 법률자문 등을 진행해 보록의 문화재적 가치를 확인하고 소장자를 설득해 예정돼 있던 매도를 막았다.

재단 관계자는 "당시 유물을 판매하려 준비하던 소장자에게 보록의 가치와 반환 중요성을 설명했고, 소장자도 이를 납득해 재단에게 매도하기로 의사를 바꿨다"며 "지난해말 정보를 입수한 후 매입까지 평가 등 관련 절차가 오래 걸렸는데, 제반 과정도 (소장자가) 기다려줘서 무사히 들여올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환수문화재 매입자금, 라이엇게임즈가 쐈다
27일 오전 서울 중구 한국의집에서 영국에 반출됐다가 최근 환수된 조선 왕실 유물 '보록'이 공개되고 있다. /사진=뉴스1
라이엇게임즈가 존재감을 드러낸 시점은 평가과정을 마치고 실질적인 매입을 결정한 5~6월부터다. 소장자를 설득해 환수하기로 결론이 났지만, 어떻게 매입할지에 대한 부분이 해결되지 않았던 때다. 재단은 국민들이 복권을 구매할 때마다 쌓이는 복권기금 중 '문화재보호기금 전출' 명목으로 지원받은 예산 일부를 쓰지만 이 자금이 한정적인 데다, 앞서 미국 크리스티 경매에서 '독서당계회도' 등을 환수해오느라 예산이 빠듯했기 때문이다.

이에 재단은 지난 5월 라이엇 게임즈와 문화재 매입을 협의했고, 자금을 포함해 환수절차 전반을 라이엇 게임즈가 지원사격하며 보록의 환수가 가능해졌다. 앞서 라이엇 게임즈는 2012년부터 '한국 문화유산 보호 및 지원'이란 이름의 사회환원 프로젝트를 시작해 정부 문화유산 지원에 68억원 이상을 기부했고, 이 중 국외문화재환수를 위해 22억원을 사용했다.

재단 관계자는 "문화재 보존과 관련해 라이엇 게임즈로부터 여러 지원을 받고 있다"고 강조한 뒤 "국외소재문화재 환수가 예정돼 있지 않고, 어떤 시점에 어떤 계기로 들여올지 전혀 예측할 수 없어 민간기업의 지원이 쉽지 않은데 10년 간 꾸준히 지원해주고 있다"고 감사의 뜻을 표했다.
'페이커 보유국' 韓게이머, 문화유산도 지킨다
채수희(왼쪽부터) 문화재청 문화재활용국장, 김인규 국립고궁박물관장, 양세현 라이엇 게임즈 한국퍼블리싱 사업총괄, 최응천 문화재청장, 서준 문화재 전문위원이 27일 서울 중구 한국의 집에서 열린 환수 문화재 '보록' 언론공개행사에 참석하여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라이엇 게임즈의 지원사격을 받아 해외를 떠돌던 국보급 문화재를 되찾은 사례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라이엇 게임즈는 2014년 '석가삼존도'를 시작으로 △효명세자빈 책봉 죽책(2018) △척암선생문집 책판 △백자이동궁명사각호 △중화궁인(이상 2019년) 등 다섯 번의 국외 문화재 환수를 지원했다. 현재까지 국외문화재환수를 위해 할당한 자금 중 누적으로 10억원 이상 사용된 것으로 알려졌다.

라이엇 게임즈의 이런 장기 프로젝트는 회사 임직원들의 문화재에 대한 관심과 게이머들의 참여로 완성됐다. 실제로 초기 롤에 나오는 한국계 챔피언 아리 관련 아이템 판매금 6개월치에 회사 자금을 보태 기부금이 마련됐다. 석가삼존도를 시작해 이번 보록까지 6점의 환수문화재에 '게이머들이 되찾아온 문화재'란 평가가 나오는 배경이다.

라이엇 게임즈는 앞으로도 장기적으로 기금을 조성할 계획이다. 구기향 라이엇 게임즈 사회공헌사업총괄은 "우리는 문화재 분야에 문외한이지만 문화 뿌리를 보호한다는 의미로 미리 필요한 기금을 준비하고 빠르게 지원하고 있다"며 "미국에 본사를 둔 글로벌 게임사라 여러 지역에서 사회공헌활동을 펼치고 있는데, 한국 문화재 사업은 다른 지역에서도 참고할 만큼 진정성을 갖고 임하고 있다"고 밝혔다.

조혁진 라이엇 게임즈 대표도 "한국에서 우리 문화유산을 보호하고 지원한지 올해로 만 10년이 넘었다"며 "문화의 힘을 믿고 진행했고, 문화재청과 재단 같은 파트너들이 있어 가능했다"고 말했다. 이어 "(문화재 환수가) 민간기업이 참여하기 쉽지 않은 영역이지만, 앞으로도 우리 문화재가 제자리를 찾을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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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승목 기자 mok@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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