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도동-귀하지도 험하지도 않은 평범한 이들의 골목[골목 내시경]
2022. 7. 27. 09:23
서울 노량진에서 남쪽으로 향하면 상도동이 있다. 상도동은 권역이 상당히 넓은 동네다. 지하철 7호선 숭실대입구역, 상도역, 장승배기역, 신대방삼거리역을 두루 걸쳐 지난다. 그 넓이만큼이나 주민 수도 상당하다. 12만명 이상이 살고 있다. 상도동은 국사봉(179m)에 기대 북쪽을 향해 비탈을 이루며 펼쳐져 있다. 전망과 주변 여건에 따라 일찌감치 대단위 아파트로 재개발이 이뤄졌다. 골목은 사라졌고 이제는 아파트단지의 통로가 말끔한 길을 이어준다. 미처 재개발이 이뤄지지 못했던 곳도 지난 흔적을 밀어내고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날 준비를 하고 있다. 장승배기역 주변에 남아 있던 옛 골목과 집도 이주와 철거가 한창 진행 중이다. 골목을 걸어 들어가다 보면 곧바로 출입을 금하는 표식을 만난다. 버려진 쓰레기가 수북이 쌓여 있어 그곳에 살던 이들의 뒷모습을 보여준다. 어느 집엔 아직 떠나지 못한 이들이 남아 있는지 인기척이 들렸다. 벽엔 수도와 전기를 끊었다는 표시가 크게 남아 있다. 골목의 휑한 모습을 보니 마지막 남은 이들 또한 곧 떠날 것임을 알 수 있다.
장승배기역 근처는 온통 땅을 파고 다지는 토목 현장이 곳곳에서 보인다. 시장통 바로 곁에 동작 행정타운 건설 현장이 분주하다. 동작구청과 공공기관을 한곳에 모아 짓고 있다는데 건설이 끝나면 장승배기 주변은 그야말로 옛 모습을 완전히 벗을 것 같다. 공사는 바쁘게 진행 중이다. 공사장 앞으로 근근이 남아 있는 골목시장도 영광의 시대는 과거로 돌려야 할 것 같다. 상인도 심드렁한 표정으로 먼지 쌓인 상품을 지켜본다. 추억할 옛날도 말라가고 있다.
40년을 올라도 힘든 비탈길
장승배기역과 신대방삼거리역 남쪽의 골목은 아파트 재개발을 비껴간 지역이다. 느리게 골목길을 걸어볼 수 있지만, 국사봉에 다가설수록 가팔라지는 비탈은 단숨에 정상까지 걸어 오르기엔 버겁다. 마을버스 종점이 있는 상도근린공원에 이르면 한여름에도 나무 사이를 따라 흐르는 바람의 세례를 받을 수 있다. 잠시 자리에 앉아 세상일을 잊고 멀리 보이는 한강이며 남산 자락을 아련히 바라볼 수 있다. 상도동의 매력이다. 공원 옆에 있는 사자암은 도심 속 절이라 세속에서 짊어진 마음의 무게가 힘겨울 때 잠시 들러 쉴 수 있다. 법당 안 노인 한분이 연신 절을 하며 기도하는 모습이 간절해 보인다.
비탈은 산에 가까울수록 더 가파르다. 오가기에 불편할 터라 다리를 두드리며 골목을 오르는 주민에게 괜찮냐고 물었다. 그는 “이 길을 30대부터 40년을 오르내렸는데, 이골이 나서 편해질 만한데도 하루하루가 힘들다. 그래도 움직이지 않으면 병난다 생각하며 공원도 오고 때 되면 시장도 보러 간다”라고 했다. 그가 덧붙인 ‘쉬는 날이 죽는 날’이란 말이 무겁게 와닿았다. 그 쉬는 날이 언제가 될지 알지 못하기에 앞을 보며 살아간다.
오래된 동네인 만큼 골목에서 허리 굽은 노인들을 자주 만날 수 있다. 치매 노인을 실어나르는 ‘노인주간돌봄센터’의 차량도 볼 수 있고, 제법 큰 규모의 노인요양병원도 있다. 시장에서 멀리 떨어진 골목 깊숙한 곳인데도 오래된 방앗간이 문을 열고 있다. 진열장 안에 때아닌 쑥떡이 눈에 띈다. 손님 없는 가게는 아닌 듯 한쪽에 짜둔 기름병이 수북하다. 고춧가루를 빻는 기계는 열심히 돌아간다. 골목 안 낡은 상가엔 어린이도서관이 있어 마을 분위기를 새롭게 만들고 있다. 젊은이들과 이런저런 실험적인 활동도 함께 펼치고 있다. 상도동에 쌓인 시간의 그루터기를 확인할 수 있는 오래된 가게도 보인다. 그중 대륙서점은 1987년에 간판을 달아 문을 열었다. 근자에 주인이 바뀌었다. 책을 파는 곳에서 영화와 음악, 식물과 커피를 함께 담은 곳으로 영역을 넓혔다고 한다. 토박이들은 그곳을 상도동을 대표하는 공간으로 받아들였다. 그 옆으로 매일 콩을 갈아 두부를 만드는 두부가게가 있다. 주인과 손님이 나누는 대화는 이웃의 이야기 그대로다. “오늘 콩물 좋다. 날도 더운데 국수 삶아 시원하게 콩국수 말아 드시라”는 권유에 손님은 웃으며 지갑을 연다. 대부분의 가게는 한자리에서 20~30년씩은 장사를 해온 듯 손님과 막역한 모습이다. 약국에 들러 부모가 맡겨둔 물건을 찾아가는 아이도 있다. “오늘 참외 못 먹으면 평생 후회한다. 꿀이 흘러 자르기도 아깝다”라고 외치는 과일가게 주인은 5000원에 7개라는 참외를 팔며 자두 두어개를 덤으로 담아준다.
지금의 모습, 언제까지 남길 수 있을까?
언덕 위로 마을버스가 서자 학생과 주민들이 흩어져 집을 향한다. 교복을 입은 중·고등학생들이 목청껏 떠들며 골목을 휩쓸고 지나간다. 골목 안 공동주택들은 언젠가 물갈이를 한 듯 대체로 새로 지은 모습이다. 재활용품을 정리하던 노인은 “여긴 다 그만그만한 사람들이 산다. 크게 부자도 없고 먹을거리 못 챙기는 사람도 없다. 세상에서 살다 보니 뾰족한 데는 닳고 닳아 몽돌처럼 순해진 사람들이다. 골목 안에서 큰 소리 날 일이 별로 없다”고 했다. 사이사이 오래된 단독주택도 있지만 대부분은 연립주택에서 다세대주택이며 소규모 아파트들이다. 택시를 호출하고 기다리던 한 주부는 “요즘엔 휴대전화 앱으로 편리하게 차를 부르지만 (옛날엔) 짐이라도 있으면 어디 나다니기도 힘들었다. 이 동네 살면서 유일하게 불편한 점인데 이제는 그럭저럭 견딜 만하다”고 했다. 부동산 업소에는 재개발 언급이 별로 없었으나 골목골목 민간 재개발을 권하는 시공사의 현수막이 보인다. 개발업자들은 역세권과 숲세권이 공존하는 대규모 개발 가능지로 상도동의 매력을 꼽는다고 했다. 주변의 개발 속도를 보면 국사봉 아래 지역의 골목도 언제까지 지금의 모습을 남길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살 만한 동네의 요인 중 장보기가 편하다는 점도 중요하다. 신대방삼거리역을 나서면 성대전통시장이 있다. 아마도 상도동에 남은 가장 큰 시장일 것이다. 이곳부터 국사봉 골짜기까지 이어진 마을의 이름이 성대굴이었다 하여 시장과 길 이름으로 남아 있다. 시장 어귀에는 이곳에 살던 누군가의 무덤에서 복숭아꽃 한아름이 나왔다 해서 성도화리(成桃花里) 등으로 부르다가 성대리가 됐다는 설명도 붙어 있다. 어떤 연유인지 알 수 없으나 그래도 복숭아꽃 향기가 실린 이름이라니 다시 돌아보게 된다. 부디 이곳을 지나는 이들의 마음에 복숭아 향이 깃들기를.
시장은 살거리, 볼거리를 내세우며 잘 정비돼 있었다. 작은 노점상보다는 규모가 있는 점포 위주였다. 굳이 흠을 잡자면 시장의 주도로로 차가 지나다녀 혼잡한 감이 없지 않다. 반찬가게며 생선가게, 고기가게와 잡화점 등이 제법 규모 있게 자리 잡고 있어 필요한 물건을 찾을 수 있다. 시장은 여러모로 번창하고 있지만 일반적인 전통시장과는 약간 결이 다르다. 시장 안에는 대형마트도 있어 사람들은 필요에 따라 장을 보고 있다. 시장에서 벗어나 사자봉을 향하는 성대로에도 해물전이며 반찬가게들이 있다. 주택가와 가까워서인지 이곳 가게들을 찾는 이들도 상당했다.
어딘지 닫혀 있는 듯한 골목길
골목에서 잘 가꾼 화분을 내놓은 집을 볼 수 있다. 그런 집은 골목 안의 보석이다. 상도동 골목의 집들은 꽃을 가꾸거나 화단을 꾸미기에 무심한 듯해 꽃이 보일 때마다 새삼스레 돌아보게 된다. 비교적 잘 정비가 되고 새롭게 지은 공동주택들이 깔끔하긴 해도 골목에 자신이 가꾼 꽃 한포기를 내놓는 여유는 찾아보기가 어려웠다. 길은 잘 나 있지만 골목은 어딘지 닫혀 있는 듯해 함께 나누는 공간은 찾아보기 힘들다. 주택가에서 기념품 도매점을 하는 주민은 “여긴 이사 오고 나가는 이들도 많고 해서 옆집에 누가 사는지 관심이 별로 없다. 나처럼 오래 산 사람이야 이웃사람 대충 보면 알지만 젊은이들이야 서로 섞이는 것 자체를 싫어하지 않는가”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는 예전에는 산비탈 집들에 가내공장도 많았는데 지금은 거의 없어졌다고 했다. 그래도 비탈길을 한참 올라온 뒤 호프 한잔에 노가리를 안주 삼아 목 축일 동네 주점도 보이고 동네 아주머니들이 모여 수다를 떨며 머리를 손질하는 동네 미용실도 아직은 건재하다. 산마루엔 오래된 작은 집을 고친, 세련된 협소 주택도 있고, 아직 함석지붕을 이고 선 블록집도 남아 있다. 한데 모아 무엇이라 정의할 수 없는 다양한 삶이 혼재된 모습이 이 골목의 정경이다. 너무 귀하지도 험하지도 않은 평범한 이들이 골목을 메운다.
상도동엔 고 김영삼 대통령의 사가가 있었다. 때문에 그와 관련된 정치적 사안이 있을 때마다 상도동이란 동네 이름을 신문에서 볼 수 있었다. 상도동 혹은 상도동계라는 명칭은 한국 정치사에 상당한 무게를 갖고 있었다. 그의 사가가 있던 자리에는 김영삼민주센터가 들어섰다. 인근에 있는 김영삼도서관이 그의 시대를 증명한다. 상도동엔 어쨌든 그의 그림자가 남아 있다. 누구라도 태어난 이의 필연을 피할 수 없으니 그는 갔고, 그에 대한 평은 남았다. 오늘의 상도동은 그와는 무관하게 건재하다. 시장통엔 사람들이 북적인다. 오래된 것을 아끼는 이들과 새로운 것을 만들어가는 이들이 오늘의 골목을 만들어가고 있다. 과거 상도동이란 지명이 갖는 무게보다 오늘 건강하게 살아가는 골목 사람들의 삶이 역사의 자리를 채워간다. 마음이 심란한 날, 상대로를 거슬러 올라 국사봉에 다다르면 바람이 반기는 순간을 맞을 수 있다. 상도동은 그 신선한 바람만으로도 즐겁고 귀한 곳이다.
김천 자유기고가 mindtempl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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