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춤을 보면 어딘가 찌르르하거든[양다솔의 기지개 켜기](8)
2022. 7. 27. 08:25
크게 눈여겨본 적은 없었다. 언젠가 까맣게 그은 얼굴에 하얀 덧니를 드러내고 웃는 그 미소가 꼭 입체파 화가가 그린 작품 같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주근깨도 없이 매끈한 살결, 소년인지 소녀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순박함을 가진 그 애는 매주 끝내주게 재밌는 글을 가지고 나타났다. 보고도 믿기 어려운 것들을 글로 써왔다. 매일 아침 중년 여성들로 가득한 조기축구회에 나가 미친 듯이 공을 찬다는 얘기나, BTS가 너무 좋아 모든 안무를 다 외워버렸는데 막상 쓸 데가 없어 원하는 사람이면 누구든 모아 가르쳐준다는 얘기, 해외여행을 가서 새벽 6시부터 밤까지 돈 한푼 쓰지 않고 갈 수 있는 곳은 샅샅이 다 돌아다닌다는 얘기, 가스도 들어오지 않는 달동네에 살면서 매일 언니와 동생의 밥을 해주고 친구들과 단체로 김장을 하고 밤새 파티를 한다는 얘기, 제주도의 신비로운 동굴 같은 곳에서 종일 쉬지 않고 다이빙을 한다는 얘기, 친구들과 밤마다 옷을 다 벗어 던지고 나체로 미친 듯이 춤을 춘다는 얘기….
먹고사니즘 없는 자유
매주 글방에서 그 실체를 마주하면서도 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의 주인공이 맞나 번갈아 보았다. 우리가 같은 지구에 사는 것이 맞나 싶었다. 어디서도 그런 애는 본 적이 없었다. 언어의 세계가 아무리 방대한들 그 애를 담을 수는 없을 듯했다. 공중으로 펄떡펄떡 튀어 오르며 햇살에 눈부시게 빛나는 우람한 한마리의 물살이를 보는 듯했다. 어떤 이야기든 몸이 가장 먼저 보이는 육감적인 언어, 끝을 알 수 없는 에너지, 어디로 튈지 모르는 무규칙성, 누구보다 살아 있는 듯한 생생함. 그 애를 볼 때마다 나도 모르게 입을 다물고 자세를 낮추게 됐다. 미간에 힘을 주고 숨을 죽이게 됐다. 야생을 목격하고 있었다.
돌아보면 그 애는 뭔가가 없었다. 우리 모두가 가진 무언가가 없었다. 그것은 먹고사니즘이었다. 그가 다른 이의 삶을 곁눈질하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사회의 기준에 대한 갈등과 미래에 대한 불안이 그 눈에는 없었다. 없었다기보다는 오늘 뭐 하고 놀면 재밌을까에 대한 생각이 너무 커서 다른 건 끼어들 여지가 없어보였다. 옷은 입어야 하니까 걸치는 것 같았고 의외로 마늘과 참깨 같은 보편적인 음식을 심하게 편식했으며 눈 뜨고 있는 모든 순간 끊임없이 노래를 불렀다. 옆에 있으면 정신이 조금 혼미해질 지경으로 가만히 있을 줄 몰랐다. 노는 거라면 아무리 바빠도 빠지지 않았다. 흐르는 듯 사는 것처럼 보여도 마주친 눈은 늘 형형했다. 지금이라는 순간과 나라는 존재의 몸과 마음의 싱크(간격 조정)가 정확히 맞는 이의 눈이었다. 실로 누구보다 살아 있지만 실제로 그 애가 어떻게 살아 있는지는 불가사의였다. 그럴 것이, 나는 걔가 일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아무리 노력해도 상상할 수가 없었다. 걔가 어딘가로 출근하고 퇴근하고 사무실에 앉아 종일 컴퓨터를 보는 모습을. 꼭 만화 속 주인공 같았다. 나이도 불문이고 직업도 불문인데 하루하루는 사건과 이야기로 가득한 주인공. 이야기에서 그들이 돈을 벌거나 값을 치르는 장면은 찾을 수 없었다. 그 세계에는 돈이 부재했다. 우리의 세계는 아니었다. 나는 물었다.
대체 어떻게 먹고사는 거야? 그는 아침이면 축구를 하고 점심이면 비건 브라우니며 빵을 구워다 카페에 납품한다고 했다. 그걸로 얼마간의 생활비를 할 수 있다고 했다. 알바 9단인 나는 딱 봐도 그것으로 얼마를 벌지 예상할 수 있었다. 한 사람이 살기에는 한참 부족한 돈이었다. 돈이 더 필요하지는 않니? 하고 묻자 일을 더 하면 더 벌 수는 있지만 그럴 필요도 시간도 없다고 했다. 그러기엔 춤도 추고 파티도 해야 하니까. 그러다가도 그 애는 하와이나 남미나 중동 같은 곳으로 훌쩍훌쩍 떠나갔다. 몇백에서 몇천까지 하는 돈이 대체 어디서 났냐고 물으면 그냥 안 쓰고 놔두다가 어느 날 확인해보니 모여 있었다고 했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매일 쉬지 못하고 직장으로 출근하고 하루의 대부분을 일하는 데 쓰면서도 통장은 늘 비어 있었다. 삶을 살기 위한 시간과 돈 모두 없었다. 하와이에 남미에 중동에 간다면 현실에 찌들고 납작해져 버린 내가 가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어딘가 잘못됐음을 느꼈다. 시간과 돈을 헤아리는 숫자는 우리 서로에게 어떤 의미로 존재할까 궁금해졌다. 내가 장애라고 장벽이라고 부르는 것들이 그에게는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세상에는 돈 없이도 누릴 수 있는 것이 너무나 많다고, 모든 순간이 나의 삶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사람으로 가득한 출근길의 지옥철에서 그 애를 떠올렸다. 멍하니 삶을 돌아보았다. 지금쯤 중고 마켓에서 산 축구화를 야물게 고쳐매고 햇볕이 내리쬐는 잔디밭 위를 달리고 있겠지. 그러던 어느 날 그 애가 글방에서 사라졌다. 글방 선생님은 그가 춤을 추기 위해 글방을 떠났다고 했다. 몸으로 하는 일의 경지에 다다르려면 글을 놓아야 한다며.
‘찌르르’한 느낌이 마음을 움직여
그 애는 훌라를 추는 사람이 되기로 했다고 말했다. 처음 듣는 말인데도 전혀 놀랍지 않았다. 마치 오래전부터 때를 기다려온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그 애만큼 춤추듯이 살아온 애는 없었으니까. 생각해보면 그 애의 삶에는 늘 ‘알로하’가 있었다. 푸르고 넓은 바다 같은, 끝없이 치는 파도 같은, 순수하고 곧은 수평선 같은, 있는 그대로의 방대하고 장엄한 매혹과 힘이 있었다. 꽃핀을 달고 하와이 치마를 입고 물결치듯 흔들거리는 그 애는 기품 있고 우아했다. 성스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임자를 만난 듯 보였다. 한국에서 나고 자란 아이가 아무런 연고도 없는 하와이의 전통춤과 이토록 천생연분이라니 놀라웠다. 평생 춤이라고는 생각해본 적도 없는 내가 이런 말을 하고 있었다. 나도 춤추고 싶어. 그 애가 물었다. 네가? 나는 말했다. 근데, 훌라 말고 섹시 댄스.
그의 춤을 보면 어딘가 찌르르했다. 세상은 수많은 사람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것을 수많은 마음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살아오며 그 마음을 움직이는 힘은 무엇일까를 생각해왔다. 내 답은 ‘찌르르’다. 그 어떤 분야에도 그 어떤 모양으로도 찌르르가 조금은 있어야 사람을 움직일 수 있다고 믿었다. 그 사실을 알고부터 나는 그것을 배우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다. 문제는 그렇게 중요한 것을 어디에서도 가르쳐 주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길들지 않은, 타고난,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압도되는’은 내가 그 애에게 주고 싶은 단어들이다. 동시에 섹시라는 단어를 이루는 것이기도 하다. 나는 지금 여성을 성적으로 대상화하는 그 의미로서의 사용을 말하고 있지 않다. 그가 바위같이 무겁게 내려앉은 마음도 움직이게 만드는 찌르르를 가졌음을 말하고 있다. 그 애만큼 섹시하게 살아온 이가 없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선생을 만난 것이다. 그러니 간절히 청한 것이다. 너와 섹시 댄스를 추고 싶어.
양다솔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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