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안보' 부르짖는 尹대통령, 범부처 공급망기획단은 헛바퀴..외교·산업부 "사람 보낼 수 없어"
기재부 주도 공급망기획단 넉달째 '헛바퀴'
산업부·외교부 인력 파견 소극적으로 일관
외교부 "사무관 세종시 파견 예산 없어서.."
“경제 회복과 성장을 위해 공급망 해결에 집중해야 합니다.”
이달 19일 서울 강서구 LG화학 첨단소재사업본부를 방문한 재닛 옐런 미국 재무부 장관은 글로벌 경기를 억누르는 공급난 극복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미국이 주도하는 공급망 동맹 전략인 ‘프렌드 쇼어링(friend-shoring)’의 한국 참여를 독려했다. 옐런 장관은 “원자재 등과 관련해 자신의 지정학적 힘을 활용하고, 이를 통해 경제적 압력을 주는 현상이 목격된다”며 프렌드 쇼어링이 중국 견제 목적이라는 사실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공급 네트워크에서 중국 의존도가 높은 한국으로선 국가 경제의 명운이 걸린 시험대에 오른 셈이다.
그런데 이런 중차대한 시기에 한국의 공급망 전략 컨트롤타워 역할을 해야 할 범부처 경제안보공급망기획단(공급망기획단)은 출범 4개월이 넘도록 필요한 인력조차 채우지 못하고 있다. 산업통상자원부와 외교부가 공급망기획단을 이끄는 기획재정부에 인력을 보내지 않아서다. 서울에 있는 외교부는 세종에 상주 직원을 보낼 예산이 없다는 이유를 댄 것으로 전해진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23일 장차관 워크샵에서 “국정 목표는 어느 한 부처의 논리로만 접근할 것이 아니다. 모든 부처가 함께 목표를 공유하고, 전체를 보고 일한다는 마음가짐으로 임해달라”고 했음에도 공급망기획단의 공전 상태는 지속 중이다. 윤 대통령이 연일 ‘경제안보’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지만, 공급망 이슈를 주도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외교부와 산업부의 토라진 마음을 돌리지 못하고 있다.
◇ 출범 넉 달째 산업부·외교부 인력 파견 감감무소식
27일 관가에 따르면 산업부와 외교부는 7월 현재까지 기재부 공급망기획단에 인력을 보내지 않고 있다. 기재부는 올해 3월 공급망기획단을 정식 출범하면서 관계 부처에 인력 파견을 요청했다. 농림축산식품부·행정안전부 등은 사람을 보냈으나, 산업부·외교부는 넉 달째 무소식이다.
공급망기획단의 시작은 지난해 문재인 정부가 만든 임시 조직인 ‘경제안보 핵심품목 태스크포스(TF)’다. 당시 정부는 중국의 요소 수출 금지로 불거진 요소수 품절 사태에 대응하기 위해 이 TF를 가동했다. 이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터지고 글로벌 공급난과 각국의 자원 패권화가 심화하자 정부는 경제안보 핵심품목 TF를 기재부 1차관이 단장을 맡는 정식 조직으로 재정비했다. 부단장(기재부 국장)을 포함한 기재부 실무자 10여명과 관계부처 파견자들로 이뤄진다.
하지만 공급망 대응의 핵심 파트인 원자재(산업부)와 외교(외교부) 부문 직원은 해당 부처들의 비협조로 4개월째 공석이다. 산업부는 내부 인사 지체와 인력 상호 교류의 필요성 등을 거론하며 인력 파견을 미뤄온 것으로 알려졌다. 서울에 있는 외교부는 세종시까지 가려는 직원이 없을 뿐 아니라 그들을 세종에 머물게 할 예산도 부족하다며 난색을 보인 것으로 전해진다.
공급망기획단 관계자는 “산업부와 외교부가 내부적으로 (파견에 관한) 공모 절차를 진행 중인 것으로 안다”며 “파견은 아직 이뤄지지 않았지만, 각 부처와 소통하면서 공급망 3법 재·개정 등 기획단 핵심 업무는 잘 진행하고 있다”고 했다.
◇ “기재부가 ‘총괄’ 핑계로 조직 확대 시도”
정부 안팎에서는 공급망에 관한 부처 간 주도권 다툼의 측면에서 이 상황을 바라보는 시각이 많다. 실제로 올해 초 경제안보 핵심품목 TF가 공급망기획단으로 재출범했을 때 산업부와 외교부 직원들 사이에서는 “이미 자체적으로 대응 시스템을 갖췄는데, 기재부가 총괄을 명분 삼아 조직 확대와 성과 챙기기를 시도하는 것 아니냐”는 불만이 제기된 바 있다.
산업부의 경우 작년 2월부터 ‘산업안보 TF’를 꾸려 공급망 이슈에 대응해왔다. 산업부 1차관이 팀장을 맡은 산업안보 TF에는 통상차관보(동향·협상반)·무역투자실장(무역안보반)·산업정책실장(산업반)·에너지실장(에너지자원반) 등 산업부 내 주요 부서가 모두 투입된 상태다. 외교부 역시 지난 5월 “경제안보 이슈에 체계적으로 대응하겠다”며 경제안보외교센터를 개소했다.
산업부 관계자는 “공급망기획단은 파견을 받는 조직으로 어차피 실무는 각 부처가 하고, 기재부는 안건을 취합하는 역할에만 머물 것이다. 공급망은 산업·통상 전문가 집단에서 주도적으로 나서야 하는 영역이라고 본다”며 기재부의 인력 파견 요구에 대해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반면 기재부는 작년 10월 요소수 사태의 교훈을 기억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당시 중국은 자국 내 석탄·전력난으로 요소 물량이 부족해지자 ‘요소 수출 검사’를 의무화하면서 수출을 사실상 중단했다. 주중 한국대사관은 이 상황을 인지하고도 열흘가량 지나 외교부에 보고했다. 외교부가 산업부 등 소관 부처에 전달했을 때 국내에서는 이미 요소수 대란이 시작됐다. 기재부 관계자는 “요소수 대란은 부처 간 칸막이를 보여준 뼈아픈 사례”라며 “사태 재발 방지를 위해서라도 총괄 조율자의 역할이 절실하다”고 했다.
◇ 韓 수입산 부품 40%가 중국산…“밥그릇 싸움할 때 아냐”
각 부처가 밥그릇 싸움을 벌이는 사이 글로벌 공급망 재편 분위기는 더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다. 한국산업기술진흥원(KIAT)은 최근 발간한 ‘러-우크라 갈등으로 인한 글로벌 자원 공급망 변화 및 대응 보고서’에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미·중 갈등 등이 진영 논리를 더욱 확산시켜, 향후 지정학적 리스크를 포함하는 경제안보 정책이 확산할 것”이라고 했다.
이달 19~20일 방한한 옐런 장관이 1박 2일의 짧은 일정에도 LG화학을 찾은 게 주요국의 경제안보 강화 의지를 보여주는 상징적 장면이다. 이 자리에서 옐런 장관은 “공급망을 더 강화하기 위해 주요 우방과 경제 협력을 굳건히 해야 하고, 여기에는 한국도 포함된다”고 했다. 또 그는 중국을 직접 겨냥해 “특정 국가의 경제 통합은 법칙 기반의 국제 질서를 망가뜨리는 아주 큰 타격을 가져올 수 있다”고도 했다.
공급망 관련 중국 의존도가 높은 한국 입장에서는 미국의 이런 행보가 민감한 문제일 수밖에 없다.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한국 수입 부품에서 중국산이 차지하는 비율은 1996년 2.9%에서 지난해 39.7%로 불어났다. 산업부 출신의 한 원로 관료는 “한국으로선 미국의 공급망 동맹 압박과 그에 따른 중국의 반응을 어느 때보다 세심하게 관찰하고 대응해야 하는 시기”라며 “정책 주도권 다툼에 쓸데없는 힘을 낭비할 여유가 없다”고 했다.
추경호 부총리는 5월 15일 서울 광화문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경제장관간담회에 참석해 “이제 막 새 정부가 출범했지만, 전열을 가다듬을 여유도 없이 비상한 각오로 출발해야 한다”며 “새 정부 경제팀은 부처 간 칸막이를 넘어 원팀으로 합심해 당면한 위기를 극복해 나가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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