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밥상] 달큼한 살·은은한 향..은어가 선사하는 '여름맛'
[향토밥상] ⑫ 경남 하동 은어밥
자연산 잡히는 6~8월 제철
잡곡밥에 올려 뜸들여 먹어
담백한 맛…재첩국과 ‘찰떡’
곡물가루 섞어 죽처럼 끓인
‘참게가리장’도 대표적 음식
몇년 전 TV를 보다가 깜짝 놀란 일이 있다. 듣도 보도 못한 낯선 음식이 나와서다. 윤기 도는 흰쌀밥에 생선 대여섯마리가 통째로 머리부터 박혀 있는 모습이 가히 별났다. 음식 이름은 ‘은어밥’. 언젠가 꼭 맛보리라 벼르고 별러왔다.
은어는 이름처럼 배 부분이 은빛으로 빛난다. 강에서 태어나 바다로 나갔다가 이듬해 봄 하천을 거슬러 올라와 알을 낳는다. 고향으로 되돌아오는 동안 내내 굶다가 산란을 마치고 생을 마감한다. 그 성질이 마치 선비처럼 곧다고 해서 ‘수중군자(水中君子)’라고도 불렸다. 성정만큼 맛도 유별나다. 민물고기임에도 특유의 잡내가 나지 않는다. 그뿐일까. 싱싱한 은어는 은은한 수박향까지 날 정도란다. 맑은 하천에 살면서 바위에 붙은 깨끗한 이끼만 먹어서 그렇단 소문이다.
요즘은 양식이 잘돼 3월말부터 늦은 11월까지 활은어를 맛볼 수 있다. 자연산은 6월부터 8월까지 나온다. 제철의 한가운데인 7월 은어밥을 먹으러 경남 하동으로 향했다.
예부터 하천지역에선 은어를 흔히 먹었다. 강원 양양·영월, 경북 영덕·안동 등지에선 지금도 특산품으로 꼽히며 다양한 요리가 발달했다. 주로 은어로 육수를 내 국수를 말거나 구이로 즐겼다. 섬진강을 낀 하동에선 은어로 밥을 지었다.
화개면 십리벚꽃길 초입에 있는 혜성식당은 40년째 성업 중인 향토음식 전문점이다. 명성을 말해주듯 입구 앞 수족관에 싱싱한 은어가 한가득이다. 동네 토박이인 김판곤 사장(68)은 “적당히 비가 내려야 이끼가 잘 자라 은어가 풍년”이라면서 “지난해와 올해는 가물어서 은어가 적었는데 얼마 전 비가 내려 오늘 자연산이 많이 들어왔다”고 기자를 반겼다.
이곳에선 ‘영양돌솥 은어밥’을 내놓는다. 솥에 멥쌀·흑미·콩·은행과 편으로 썬 인삼을 고루 섞어 밥을 짓다가 밥물이 졸아들면 내장을 따 손질한 은어를 살포시 올려 뜸을 들인다. 밥이 다 되면 식기 전에 은어 머리를 잡고 젓가락으로 몸통을 죽 훑어내려 살만 발라낸다. 여기에 양념을 넣어 비벼 먹는다. 김 사장은 “예전엔 은어를 세워 꽂아 밥을 짓기도 했는데 그러면 나중에 모양이 망가져 뼈를 바르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꿈에 그리던 밥상을 받았으니 이젠 맛을 볼 차례. 강렬한 생김새에 비해 맛은 순하다. 생선이 들어갔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비린내가 없다. 짠맛도 적다. 고소하면서 달큼한 감칠맛이 입맛을 돋운다. 가시 없이 발린 살은 마치 버터처럼 입속에서 부드럽게 뭉개진다. 양념장이 없어도 간이 맞는다.
연거푸 숟갈을 뜨다가 목이 막히면 같이 나온 재첩국을 먹으면 된다. 해수와 담수가 만나는 섬진강 하구에 서식하는 재첩 역시 이 지역 특산품이다. 크기는 새끼손톱만큼 작아도 국을 끓이면 시원하다. 맛이 세지 않아 담백한 은어밥과 찰떡궁합이다.
은어를 별미로 맛보고 싶다면 튀김을 추천한다. 뼈째 튀겨 먹는데 억세지 않아 먹기에 불편하지 않다. 회나 구이는 특유의 수박향을 듬뿍 느끼기에 제격이다.
하동에서 빼놓으면 섭섭한 음식이 또 있다. 참게가리장이다. 일종의 참게탕인데, 외지 손님들은 수프처럼 걸쭉한 모습을 보고 다들 갸우뚱한단다. 이름에 든 참게가 보이지 않으니 혹 게를 갈아서 끓였나 싶은데, 국자로 뚝배기를 휘저으면 토막 난 참게가 모습을 드러낸다. 탄생 유래를 살펴보면 선조의 지혜에 무릎을 치게 된다. 곤궁한 시절 작은 참게 한두마리로 대식구를 먹여야 했는데 그때 꾀를 낸 것이 지금의 참게가리장이다. 국물에 밀가루를 풀어 죽처럼 걸쭉하게 끓였다. 그럼 은근히 게맛이 나는 국물을 몇번만 떠먹어도 금세 배가 불렀다고. 먹을 것이 넘치는 요즘엔 식당마다 그 나름의 비법으로 변화를 꾀한다. 어디는 깻가루, 어디는 여러 곡물가루를 섞어서 쓴다. 혜성식당은 쌀가루를 푼다. 덕분에 맛이 진하고 구수하다. 뒷맛이 텁텁하지 않고 깔끔하다.
식사를 마치는 사이 식당에 손님이 꽉 찼다. 여름 내내 주중·주말을 가리지 않고 늘 만원이다. 세상이 좋아져 사시사철 은어·재첩·참게가 나온다지만 제철에 먹는 건 또 다른 매력이다. 무더위를 기다리게 하는 섬진강의 여름 맛이다.
하동=지유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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