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인사 가는 길 6km.. 쉿! 속세의 시비 소리 귀에 들릴라 [자박자박 소읍탐방]

최흥수 2022. 7. 27. 0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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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 합천 가야면 홍류동계곡 소리길과 팔만대장경
합천 가야면 대장경테마파크에서 해인사까지 이어지는 홍류동 계곡 소리길. 가야산 홍류동 계곡은 최치원이 인생의 마지막을 보낸 곳으로 알려져 있다.

“첩첩 바위에 세차게 부딪치며 겹겹 봉우리 울리니 / 지척에서 하는 소리 알아듣기 어려워라 / 속세의 시비 소리 귀에 들릴까 염려하여 / 일부러 흐르는 물로 산을 둘러싸게 하였다네.”

최치원이 지은 ‘제가야산독서당(題伽倻山讀書堂)’의 시구다. 독서당은 가야산 서남쪽 홍류동 계곡에 지은 정자다. 지금은 시구의 한 대목을 따 ‘농산정’이라는 명패를 달고 있다. 최치원은 12세에 당나라로 유학해 6년 만에 빈공과에 장원급제했지만, 귀국해서는 고운(孤雲)이라는 호처럼 구름 같은 삶을 살았다. 태어난 해(857년)는 알아도 언제 어디서 사망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홍류동 계곡은 그가 마지막으로 머물렀던 곳으로 추정된다. 그래서 이야기꾼들은 농산정을 일러 최치원이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올라간 곳이라 한다.

가야산 소리길과 해인사 여행 지도. 그래픽=성시환 기자

마음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가야산 소리길

홍류동 계곡은 합천 가야면 소재지에서 해인사까지 약 6㎞ 이어진다. 가을에 단풍이 떨어지면 계곡이 온통 붉은 기운을 띤다고 해서 붙인 명칭이지만, 빼어난 경치는 계절을 가리지 않는다. 그 개울과 숲길을 따라 ‘소리길’이라는 탐방로가 조성돼 있다. 새소리 물소리 바람소리 음미하며 천천히 걷다 보면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게 되는 길이다.

전체적으로 완만한 오르막으로 특별히 힘든 구간은 없다. 가야산국립공원에서 관리하기 때문에 탐방로도 대체적으로 깔끔하다. 시원하게 발 한 번 담글 수 없다는 점이 아쉽지만, 짙은 그늘 속 청량한 물소리와 함께하는 길이니 한나절 더위를 식히기에 부족함이 없다. 대략 2시간이 걸린다.

소리길 출발 지점인 대장경테마파크. 팔만대장경의 제작 과정을 영상과 미니어처로 볼 수 있다.
대장경테마파크에 팔만대장경 이운 행렬 모형이 세워져 있다.
대장경테마파크 천년관에 팔만대장경 제작 과정이 전시돼 있다.

소리길 출발점은 대장경테마파크다. 2011년 고려대장경의 우수성을 알리기 위해 조성한 공원이다. 천년관과 빛소리관에서 대장경 제작 과정과 경판의 모습을 영상과 미니어처로 살필 수 있다. 외부에는 인공폭포와 바닥분수 등을 조성해 가족 여행객의 쉼터로 적당하다.

테마파크 아래 개울가에는 조선 중기의 문신인 내암 정인홍이 지은 부음정이라는 소박한 정자가 있다. 이 고을 출신 정인홍은 광해군 즉위 후 영의정에 올랐던 인물로 임진왜란 때는 3,000명의 의병을 모아 활약했다. 때문에 지역에서는 팔만대장경을 지켜낸 인물로 떠받든다.

소리길 들머리는 산자락에 터를 잡은 민가와 논밭을 지나는 정겨운 시골길이다. 계곡 옆 비탈밭은 합천군에서 꽃밭으로 가꾸고 있다. 대부분 막 움을 틔운 새싹으로 덮여 있고, 간간이 백일홍이 피어 있다. 바람이 선선해질 때라야 제 모습을 갖출 듯하다.

소리길 들머리의 부음정. 광해군 때 영의정을 지낸 정인홍이 지은 정자다.
소리길 입구에 커다란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황산마을까지 가는 길 들판 너머로 우람한 가야산 능선이 보인다.
황산마을에 옛 도자기 업체 표시가 희미하게 남아 있다.

시골길 정취는 약 1.5㎞ 상류 황산마을까지 이어진다. 30년 전만 해도 도자기를 굽는 소규모 업체가 몰려 있었는데 지금은 일부 체험 공방만 남아 있다. 산비탈에 옹기종기 모인 집들 뒤로 가야산 바위 능선이 그림처럼 아름답다. 황산마을 주차장에 차를 대면 걷는 길이 그만큼 단축된다.

마을을 통과하면 물소리는 더욱 가깝고 그늘도 짙어진다. 계곡이 좁아져 수량은 오히려 풍부하다. 소나무와 활엽수가 적당히 섞인 숲으로 오솔길이 이어진다. 일정한 간격으로 나무 의자 쉼터가 조성돼 있고, 계곡을 가로지르는 다리도 서너 개 놓여 있다. 다리 위는 그늘이 없지만 내려다보는 경치는 시원하다. 닳고 닳은 하얀 암반 위로 초록을 가득 머금은 계곡물이 연이어 작은 폭포를 이루고 있다.

탐방로는 중간쯤에서 도로로 잠시 나왔다가 다시 숲으로 들어간다. 해인사 매표소인 홍류문을 통과하기 때문이다. 홍류문 바로 위에 최치원의 유적인 농산정(籠山亭)이 있다. 1922년 해체·복원했고 1936년 보수했다고 한다. 정자 앞 커다란 바위 사이로 옥빛 물줄기가 몇 차례나 미끄러져 떨어진다. 홍류동에서 경치가 가장 빼어난 곳이니 암반 곳곳에 방문객의 이름이 줄줄이 새겨져 있다. 정자 옆에 ‘고운최선생둔세지(孤雲崔先生遯世地)’라는 비석이 있고, 암반에 그의 시가 새겨져 있는데 세월에 닳아 흔적이 희미하다.

홍류동 계곡을 따라 가는 소리길은 소나무와 활엽수가 적당히 섞인 숲길이다.
고운 최치원이 머물렀다는 농산정 앞 암반 위로 맑은 계곡물이 떨어져 내리고 있다.
농산정 앞 암반에 최치원의 시를 비롯해 이곳에 다녀간 무수한 사람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농산정 암반에 새겨진 최치원의 시. 물살에 닳아 윤곽이 희미해졌다.

정자에 걸린 여러 시판 중에서 노상동이라는 인물이 쓴 시가 농산정의 의미와 최치원의 삶을 잘 묘사한 것으로 평가된다. “나는 듯한 정자 푸른 산에 있고 / 풍월과 연무는 계곡 사이에 있네 / 이곳은 선생께서 신선되신 곳 / 천지는 드넓고 산은 구름 같네.” 산이 정자를 감싸고 있다는 건지, 정자가 산을 품고 있다는 건지 헷갈린다.

개울 건너편에는 가야서당과 학사당이 위치한다. 가야서당은 최치원이 세상을 등지고 책과 씨름한 곳으로, 학사당은 그의 영정을 봉안한 곳으로 소개하고 있는데, 학사당은 제대로 관리가 되지 않아 곧장이라도 허물어질 듯해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소리길을 걷다 보면 서너 차례 계곡을 건넌다. 다리가 놓인 곳마다 울창한 숲과 맑은 계곡이 어우러져 있다.
소리길의 아름드리 소나무는 대부분 일제강점기에 행해진 송진 채취의 아픈 상처를 안고 있다.
소리길을 걷는 내내 크고 작은 폭포와 시원한 물소리와 동행한다.
소리길의 험한 구간에는 목재 산책로를 조성해 대체로 순탄하다.

농산정에서 다시 숲길을 통과하면 해인사의 부속 암자인 길상암이 왼편 바위절벽에 매달려 있다. 암자 앞에도 차를 댈 공간이 제법 넓다. 전체 구간을 걷기가 부담스러우면 이곳부터 시작해도 괜찮다. 탐방로를 따라가며 검푸른 연못과 크고 작은 폭포가 이어진다. 계곡은 험한데 길은 오히려 순하다. 그렇게 짧은 숲길을 통과하면 드디어 해인사 입구다.


매주 80명에게만 공개되는 팔만대장경의 비밀

해인사는 큰 절이다. 802년 창건한 화엄종 사찰로 주변 골짜기에 원당암, 홍제암, 삼선암, 약수암, 국일암, 지족암 등 수많은 부속 암자를 거느리고 있다. 가야산 서편 산자락 일대가 사실상 해인사인 셈이다. 고려대장경판을 비롯해 사장경판전, 반야사원경왕사비, 치인리마애불입상 등 국보와 보물을 포함해 문화재도 70여 점을 보유하고 있다. 속속들이 살피자면 2~3일로도 모자랄 판이다. 수십 채의 전각을 거느린 해인사 경내만 돌아봐도 2~3시간은 훌쩍 지나간다.

소리길 끝의 해인사. 가야산 서편 산자락 일대를 품고 있다.
해인사 탐방은 자체로 숲속 산책이다. 전각보다 더 오래된 아름드리 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다.
무려 1,200년이 됐다는 고사목이 해인사 입구를 지키고 있다.

그래도 탐방객이 빠지지 않고 찾는 곳이 팔만대장경이 보관돼 있는 장경판전이다. 사찰 가장 위쪽에 있어 주차장에서 천천히 걸으면 30분가량 걸린다. 대장경은 고려 시대에 두 차례 간행됐는데, 처음에 만든 것은 몽골군의 침입 때 없어졌고 해인사에 보관된 건 두 번째로 만든 경판이다.

장경판전은 수다라장, 법보전, 동사간판전, 서사간판전 네 개의 건물로 구성된다. 가파른 돌계단을 오르면 수다라장의 연화문을 통과한다. 호박처럼 둥그런 모양인데, 1년에 두 차례 춘분과 추분 오후 2시경 문안으로 햇살이 들이치면 음영의 윤곽이 연꽃 모양으로 선명해진다고 해 붙여진 이름이다. 문으로 들어서서 좌우 문살을 통해 팔만대장경을 볼 수 있다. 바로 위는 경판을 인쇄한 책이 보관된 서고다. 문을 통과해 법보전 마당에 서면 직사각형을 이루고 있는 장경판전의 외부 구조가 파악된다. 일반 관람객이 볼 수 있는 건 여기까지다.

팔만대장경이 보관된 해인사 장경판전으로 오르는 계단.
팔만대장경이 보관된 해인사 장경판전. 앞뒤 좌우 4개 건물로 구성된다. 일반 관람객은 이 마당까지 갈 수 있다.
해인사의 팔만윤장대 체험. 무료로 나눠주는 동전을 넣고 윤장대를 한 바퀴 돌리면 경전 한 구절이 적힌 두루말이가 나온다.

건물 내부로 들어가려면 해인사 홈페이지에서 ‘팔만대장경 순례’ 프로그램을 예약해야 한다. 매주 토·일요일, 오전 10시와 오후 2시, 회당 20명까지만 신청을 받는다. 이미 8월까지 예약이 찼고, 9월분 일부가 남아 있는 상태다. 순례 프로그램은 해인사 일주문에서 시작해 40~50분간 진행된다. 법보전 안에서는 팔만대장경의 제작과 보관의 비밀, 역사적 의의 등의 해설이 곁들여진다.

장경판전 내부는 의외로 시원하다. 장마철 특유의 눅눅함도 느껴지지 않는다. 크기가 다른 위아래 문살로 들어온 바람이 끊임없이 순환하기 때문이다. “바닥은 깊이 60~90cm의 숯, 소금, 황토와 회로 다져져 있습니다. 강회다짐 공법으로 벌레를 막고 습기를 제거해 줍니다. 제가 아는 한 20년 동안 특별한 작업을 한 적이 없는데, 기둥에 거미줄 하나 없습니다.” 해인사 팔만대장경 연구원 보존국장인 일한 스님의 설명이다.

해인사 장경판전 중 법보전 내부. 벽 위아래에 뚫린 구멍을 통해 들어온 바람이 끊임없이 순환해 습도와 온도를 조절한다. 내부 사진 촬영이 금지돼 있지만 사찰 측의 특별 허가로 촬영했다.
해인사 법보전에 보관된 팔만대장경판. '팔만대장경 순례' 프로그램 예약자만 들어갈 수 있다.
팔만대장경 보존에는 과학의 원리가 숨어 있다. 경판 사이도 일정한 틈이 있어 바람이 통하게 했다.

“경판 양옆에는 옻칠이 돼 있고 네 귀퉁이에는 순동으로 만든 금속 장석이 손잡이와 서로 맞닿는 부분을 단단히 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경판과 경판 사이에 약 10밀리미터의 틈이 벌어져 내부까지 바람이 통할 수 있죠.” 고려 시대에 제작한 팔만대장경이 800년 가까이 온전한 모습으로 전해지는 비결이다. 설명을 들을수록 오래된 유물이 현실의 과학으로 눈앞에서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장경판전은 안에서는 사진 촬영이 금지된다. 슬리퍼를 신거나 반바지를 입어도 입장할 수 없다. 사찰 측은 신앙의 공간이기 때문에 기본적 예의를 갖출 것을 당부한다.

솔밭쉼터식당의 생약채비빔밥.
파프리카와 김말이의 조합, 가야산별빛농장의 키토파샐.
가야산별빛농장에서는 체험과 식사를 함께 해결할 수 있다.

사찰 앞 식당은 대개 산채비빔밥이 주요 메뉴다. 가야면 소재지의 솔밭쉼터식당은 조금 특화된 비빔밥을 내놓는다. 기존 비빔밥 재료에 파프리카, 인삼, 도라지 등이 들어간 생약채비빔밥에 청국장과 두부두루치기가 함께 나온다. 1인 1만2,000원.

해인사IC에서 멀지 않은 가야산별빛농장에서는 색다른 체험으로 식사를 해결할 수 있다. 해발 400m에 위치한 파프리카 농장으로, 파프리카 피자와 샐러드(키도파샐), 청란햄버거 만들기 체험을 할 수 있다. 40~60분 정도 소요되며 1인 2만 원으로 체험과 식사를 함께 즐길 수 있다. 예약 필수. 가야산 능선을 배경으로 즐기는 ‘팜핑(농장 캠핑)’도 운영한다.

합천=글·사진 최흥수 기자 choisso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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