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해양환경·전선·정보력 활용한 전략·전술 천재..다른 민족에게 자랑할 수 있는 역사와 신화 남겨

2022. 7. 26.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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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성웅'이순신과 대해전 (下)
여수 엑스포 전시장 앞 거북선 모형

이순신은 군인으로서 남다른 삶의 방식과 특별한 용기를 가졌다. 칠천량 전투로 조선 수군은 거의 사라졌고, 임금조차 수군을 해체한 뒤 충청도로 와서 훗날을 도모하라고 특별히 전했다. 하지만 이순신 장군은 장계에 이렇게 올렸다. “신에게는 전선이 아직 12척 있습니다. 전선은 비록 부족하지만 미천한 신이 죽지 않았으니 감히 저를 업신여길 수 없습니다.” 기가 질린 부하들이 주저하자 홀로 적진에 뛰어들었고, 결국 명량 전투에서 조선 수군은 일본군 133척을 격파했다.

그런데 이순신 장군은 수군으로 근무한 적이 별로 없었다. 오히려 짧은 기간의 수군 만호에서 파직된 이후에는 두만강 하구인 함경도의 조산보에서 만호로 근무했다. 1592년 4월 12일 거북선을 건조했는데, 다음날 일본군이 부산에 상륙했다. 그리고 5월 7일 첫 전투인 옥포 해전부터 승리를 이어갔다.

이순신 장군은 뛰어난 작전을 구사한, 전략과 전술의 천재였다. 해양환경과 전선 그리고 전술의 미묘한 상관성을 정확히 파악했다. 조선의 판옥선은 1555년 을묘왜란을 겪고 왜선에 대응할 목적으로 개발한 것이다. 하지만 연안용이자 방어용이며, 소나무 등의 침엽수를 이용했다. 길이가 보통 15m에서 20m에 달해 천자총통, 지자총통 등의 함포를 장착해서 먼 거리에서도 쏠 수 있다. 승선 인원은 100여 명이고, 다수의 노꾼을 가동해 속력을 낼 수 있어 신속한 전투에 편리했다. 반면에 일본의 ‘안택선’ ‘관선’ 등은 원양용인 데다 선체가 삼나무여서 내구성이 약했다. 따라서 크고 단단한 판옥선이나 거북선으로 충돌 작전을 펼 수 있었다. 거기에 이순신 장군은 뛰어난 정보력을 바탕으로 가능한 한 수적으로 우수한 상태에서 전투를 벌였다.

당포성과 당포만

아울러 이순신 장군은 조선 수군에게 익숙한 해양환경을 유효하게 활용했다. 승전의 현장을 뗏목과 배를 타면서 조사해보니 암초, 해안선, 만, 해류, 조류, 바람 등으로 인해 물길이 복잡한 곳이었다. 견내량, 명량, 노량 등은 바다의 여울이고, 당포, 당항포 등은 만과 항로의 ‘목(項)’이었다. 다만 한산도 전투는 넓은 바다로 유인해 ‘학익진’으로 반격한 뒤 대승을 거두는 전략을 구사했다. 노량 전투에서도 이순신 장군의 80여 척과 명나라의 300여 척은 일본의 500여 척과 캄캄한 축시(새벽 2시 전후)에 전투를 벌여 북서풍을 이용한 화공으로 기선을 잡은 뒤 200여 척을 침몰시켰다.

노량 전투가 벌어진 날. 이순신 장군을 애도하면서 오늘의 우리를 위해 두 가지 가정을 해본다. 첫째, 그가 전쟁에서 때때로 졌다면, 특히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기 전에 크게 패배했다면 어떤 상황이 전개됐을까.

조선은 멸망했을 확률이 높다. 물론 국가의 흥망은 특별한 일이 아니고, 더구나 ‘조선’이라면 새로운 세력이 새로운 사상으로 새 나라를 건국하는 게 나을 수도 있다. 하지만 당시 상황을 고려하면 한민족은 역사에서 사라졌을 가능성도 있다. 일본군이 조선 전체를 신속히 점령하고, 명나라가 우려했듯 서해안 여러 해안에 상륙할 수 있었다. 이후 만주를 침공해 여진족과 대결했을 수도 있다. 도요토미가 강화 조건의 하나로 할양을 요구한 4개도, 즉 현재 대한민국 땅은 일본의 영토로 편입되고 북한 지역은 명나라, 뒤이어 청나라의 영토가 됐을 수도 있다.

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사마르칸트대 교수

둘째, 그가 노량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고 전사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긍정적인 가정은 그가 최고의 공신으로 출세한 상황이다. 은퇴 후에는 재야 인사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을 것이며, 백성에게 존경받는 상황이다. 하지만 실현 가능성이 낮은 가정이다. 전쟁 패배의 책임자인 선조는 그를 극도로 싫어했고, 성리학적 세계를 고수하려는 문반 사대부와 군인들의 시기는 심해졌을 것이다. 결국 숙청돼 사약을 받거나 참수형을 당했을 수도 있다. 전쟁의 상흔과 고마움을 망각한 백성의 무관심과 방조에 배신감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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