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역 의사'로 50여년..이젠 자식들과 행복한 노후 보내세요
■사랑합니다 - ‘마이 스타’ 아버지 이일영
아버지 팔베개가 야위어 갑니다. 물새 같은 4남매를 키워 오신 팔베개가 오늘은 마른 풀처럼 돌아눕습니다. 깜빡 잠이 든 어깨가 힘겹게 부풀었다 내려옵니다. 손끝 떨림이 허공을 연하게 쥐었다 놓습니다. 가늘게 주무시는 아버지 팔베개는 지금도 채송화랑 봉숭아가 한창입니다. 아빠가 매어 놓은 새끼줄 따라 나팔꽃도 어울리게 피었습니다. 어린 시절 꽃밭은 그렇게 무럭무럭 자라 이제 아버지의 곤한 잠을 다독입니다. 50년 동안 내어 준 팔베개, 그 팔베개에서 자란 내가 오늘은 내 팔을 아버지에게 베어 드립니다.
1937년에 태어난 아버지는 고려대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1971년 종로5가에서 이일영 피부비뇨기과를 개원해 지금까지 50여 년을 현직에 계십니다. 지인과 자식들이 그만 쉬라고 말씀드려도 매일 만나는 환자와의 약속을 저버릴 수 없다며 고집스레 오늘까지 오셨습니다. 연중 쉬는 날은 딱 두 번 설날과 추석, 그 외는 병원 문을 닫는 일이 없었습니다. 보다 못해 아버지와 가깝게 지내던 당숙께서 쉬지 않고 일하시는 게 안됐던지 아버지 동의 없이 ‘매월 셋째 주 일요일은 휴원합니다’라고 안내문을 써 붙였습니다. 그 후부터 어쩔 수 없이 한 달에 하루는 쉬셨습니다. 그 덕분에 그날은 우리 집 잔칫날이 되었습니다. 지금이야 법적으로 매주 쉬어야 하지만 그때는 흰 가운을 천직으로 아시고 매일 환자를 돌보셨습니다.
평소 술을 안 하시는 아버지는 말수가 적었으나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은 이 세상에서 1등이었습니다. 환자 진료와 가족 사랑밖에 모르던 아버지는 2000년 9월 할아버지 장례식 영정 앞에서 한참을 일어나지 못하고 통곡하셨습니다. 저는 아버지가 그렇게 우시는 모습을 처음 보았습니다. 그때 아버지가 할아버지를 무척 사랑하셨구나 하고 생각하며 나는 과연 아버지 같은 효자가 될 수 있을까? 어린 4남매를 키워주신 저 사랑의 팔베개를 위해서라도 최소한 아버지만큼 부모님을 사랑하는 자식이 될 수 있을까? 하고 반문하는 순간 내 안의 효는 작은 풍선이었습니다.
어쩌다 걸음걸이만 조금 불편해도 어디 아프냐고 묻는 부모님은 365일 자식 걱정입니다. 그러나 자식은 이웃집 노인 안부 묻듯 건성입니다. 요즘 세상이 각박해 부모와 자식 간에도 정이 없는 삭막한 세상이 되었지만, 그것은 부모님에 대한 자식의 도리가 아닙니다. 부모님에 대한 도리와 사랑은 인위적으로 바꿀 수 없는 천륜입니다. 그 천륜을 위해서 나는 아버지께 약속합니다. ‘우리 막내놈 이 세상에서 1등 효자다’ 하시며 더덩실 춤을 추시도록 하루도 빠짐없이 주름진 아버지 얼굴을 미소로 닦아 드려야겠습니다. 너무 늦었지만 이제야 철이 들어 야윈 아버지의 팔베개에 사랑의 입맞춤을 합니다.
아버지는 오는 8월 은퇴하기로 약속하셨습니다. 2020년 8월 16일 사랑하는 어머니를 멀리 보내고 힘들어하십니다.
낮에는 병원에서 환자를 진료하고 퇴근 후에는 어머니를 돌보시던 아버지. 어머님의 마지막 모습을 보며 “이렇게 아름다운 당신, 조금만 더 같이하면 얼마나 좋았나, 뭐가 급해 이리 가시나?” 하며 뜨거운 눈물을 흘리신 후 나날이 더 힘들어하십니다. 어머니가 떠나신 지 올해 2년째입니다. 오늘도 먼 산 홀로 나는 기러기로 남아 한숨을 고르십니다. 그래서 이만 쉬시라고 간곡히 부탁드려 병원을 닫기로 했습니다. 병원 창문이 파르라니 떨며 작별의 인사를 전합니다. 지난 50년, 이일영의 역사가 난간을 붙잡고 계단을 내려옵니다. 그동안 종로5가 이일영 피부비뇨기과를 사랑해 주신 모든 분께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출퇴근에 늘 이용했던 지하철도 아버지의 발걸음이 그리울 땐 가끔은 기적을 울릴 것입니다.
아버지! 하늘을 우러러 나의 존경이신 ‘마이 스타’ 이일영 아버지, 흰 가운에 적힌 ‘의사 이일영’은 이제 고이 접어두고 아버지의 지극한 사랑으로 건강하게 성장한 4남매의 팔베개로 다시 돌아오시어 채송화도 피고 봉숭아도 피던 먼 옛날 그 꽃밭을 만들어 주세요. 그런 날 아빠가 매어 놓은 새끼줄 따라 나팔꽃은 왜 그리도 아름답게 피었을까요?
막내아들 이제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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