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학도병의 '화개 전투' 아시나요

한예나 기자 2022. 7. 26.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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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는 전쟁이 얼마나 무서운 건지, 생명이 얼마나 귀한지도 모르고 어린 나이에 철이 없었죠. 그래도 후회는 하나도 안 해요. 그때로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같은 선택을 할 겁니다.”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전남 보성군의 벌교상업중고등학교에 다니던 정병택(89)씨는 약지를 깨물어 혈서를 쓰고 군(軍)에 자원 입대했다. 17세라 입대 의무는 없었지만 일제강점기 등을 겪었기에 그 무엇보다 조국이 소중하다는 생각을 했다고 했다. 정씨처럼 “펜 대신 총을 들고 나라를 지키겠다”며 전남 여수, 순천, 보성, 고흥, 강진, 광양 등의 17개 중학교에서 모인 15~18세 학생들은 총 183명이었다. 6⋅25전쟁에서 최초의 학도병(學徒兵) 중대로 편성됐다. 1950년 7월 25일 이들은 경남 하동군 화개면에서 북한군 6사단 1000여 명과 첫 학도병 전투인 ‘화개 전투’를 치렀다. 이 전투 덕에 우리 군은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할 시간을 벌 수 있었다.

지난 21일 서울 강서구 자택에서 화개 전투를 치렀던 학도병 정병택씨를 만났다. 당시 함께 참전한 학도병 183명 중 70여 명이 전사하거나 실종됐다고 한다. 지금까지 생존해 있는 학도병은 10명 정도. 정씨는 일제강점기뿐만 아니라, 해방 후 제주 4·3 사건, 여순 사건 등을 겪었다. 그는 “벌교에 소화다리라고 있는데, 여순사건 때 반란군과 군·경이 서로를 이 다리에서 처형해 강물이 벌겋게 피바다가 됐던 것이 기억난다”고 했다. 10대 나이에 참혹한 광경들을 본 그는 스스로 나라를 지키고자 입대를 결심했다고 한다. 6남매 막내인 그는 4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형 손에 자랐는데, 형제들도 그의 결심을 말릴 수 없었다고 했다.

전쟁은 정씨의 각오보다 무섭고 치열했다. 그가 당시 받았던 군사훈련은 순천공업고등학교에서 열흘 정도 총을 어떻게 다루는지 등 기초 훈련이 전부였다. 정씨는 “화개 전투 당시 총알이 하늘에서 쏟아졌던 것이 기억난다”고 했다. 당시 중대장이 ‘어디서 쏘고 있는 건지 살피라’고 고함을 쳤고, 정씨가 인근의 다리 밑에 있는 북한군을 발견해 중대장에게 보고했다. 중대장은 정씨가 갖고 있는 소총을 뺏어 적군에게 총을 쐈다고 한다. 정씨는 “수류탄 파편이 어깨에 박힌 것도 모르고 북한군과 교전을 벌였다”며 “나에게 ‘빨리 오라’고 손짓하던 소대장의 머리에 총알이 관통하는 것을 봤다”고 했다.

그는 “사람들이 한국 전쟁과 우리 학도병들을 기억해주면 좋겠다”고 했다. 정씨는 1950년 당시 혈서 지원을 하고 난 뒤, 학도병들과 전남 벌교역에서 순천으로 향하는 기차에 올라탔던 때를 회상했다. 당시 벌교역을 빼곡하게 채운 사람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잘 싸우고 오라’ ‘무사히 돌아오라’고 이들을 응원했다고 한다. 정씨는 “그때처럼 열렬하게 사람들에게 응원을 받았던 때가 없는 것 같다”며 “온 몸으로 이 나라를 지키려고 했던 어린 청춘들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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