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침공 지켜본 '구소련' 중앙아시아, 미국 쪽으로 돌아서나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상대한 뒤 다음 차례는 우리일 수도 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안보에 위협을 느낀 중앙아시아 지역 구소련 국가들이 러시아와의 동맹을 재고하기 시작했다고 월스트리트저널(WSJ)이 24일(현지시간) 보도했다.
중앙아시아에서 러시아의 가장 큰 우방으로 꼽히는 카자흐스탄이 대표적이다. 카자흐스탄은 지난 1월 반정부 시위가 격화되자 러시아 공수부대의 도움을 받아 시위를 진압했으나 그로부터 6주 후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는 러시아를 지원하지 않았다. 카심조마르트 토카예프 카자흐스탄 대통령은 지난달 17일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열린 국제경제포럼(SPIEF)에 참석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앞에서 자신은 우크라이나 동부 친러 세력이 세운 도네츠크공화국(DPR)과 루한스크공화국(LPR)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밝히기도 했다.
다른 중앙아시아 국가들도 러시아에 미온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우즈베키스탄은 지난 3월 유엔 총회에서 카자흐스탄과 함께 우크라이나 전쟁에 중립을 유지하는 쪽을 택했다. 러시아에 침공 중단을 촉구하는 결의안에 반대표를 던지는 대신 기권하거나 아예 투표권을 행사하지 않은 것이다. 특히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우즈베키스탄 정부는 반전 시위나 시민단체가 우크라이나에 대한 인도적 지원을 요청할 수 있게끔 허용하고 러시아 침공을 지지하는 ‘Z’ 표시 단속에 나서기도 했다. 현재 구소련 국가 중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적극 지지하는 나라는 벨라루스가 유일하다.
중앙아시아 국가들이 러시아와 거리를 두는 것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따른 안보위협 때문으로 풀이된다. 이들은 자국과 여러모로 유사점이 많은 구소련 국가인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의 침공을 받으면서 불안감을 느끼고 있다. 예컨대 카자흐스탄에서 현재 러시아인은 전체 인구 중 약 20%를 차지하는데, 러시아 민족주의자들은 이에 기반해 카자흐스탄 북쪽 지역이 러시아 영토라고 주장해왔다. 푸틴 대통령도 2014년 크림반도를 강제 합병한 후 카자흐스탄은 국가로서의 역사가 없다고 말했다. 이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의 동부 돈바스 지역에서 친러 분리주의 반군의 독립을 승인할 때 내세운 논리와 유사하다.
WSJ은 이러한 상황이 최근 몇 년 동안 중앙아시아에서 영향력이 미미했던 미국으로서는 힘을 키울 기회가 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지난 4월 이후 미 당국자들은 이 지역을 빈번히 방문하며 관계 강화를 도모하고 있다. 우즈라 제야 미 국무부 인권특사에 이어 도널드 루 국무부 차관보도 지난 5월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우즈베키스탄을 방문했다. 지난달에는 신임 미 중부 사령관인 에릭 쿠릴라 중장이 이 지역을 순방했다.
러시아는 중앙아시아의 입장 선회 가능성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모양새다. 푸틴 대통령은 지난달 28일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첫 해외 방문국으로 타지키스탄을 선택했다. 미국의 에릭 쿠릴라 중장이 다녀간 지 일주일 만에 이곳을 찾아 러시아의 영향력이 굳건함을 확인하려 한 것이다. 또 키르기스스탄이 미국의 경제 및 교육 원조를 받을 것으로 알려지자 루슬란 카자크바예프 키르기스스탄 외교부 장관이 러시아의 압력을 받아 사임하는 일도 벌어졌다고 WSJ은 전했다.
김혜리 기자 harr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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