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3나노 누가 사" 애증의 한일..닛케이는 왜 韓 반도체를 때리나
[편집자주] 쇄담은 본래 가벼운 이야기라는 뜻입니다. '닦아낸다, 새롭게 한다'는 의미의 '쇄'(刷)로 고쳐 쓰면 '재계쇄담: 재계를 새로운 시각으로 본 이야기'라는 의미로도 통할 듯합니다. 경제의 한 축을 이끄는 기업과 그 안의 사람들 이야기를 나누겠습니다.
한국에서 일본을 바라볼 때처럼 한국을 향한 일본의 시선도 양가적이다. 한국을 한껏 무시하면서도 한국이 지닌 저력을 두려워한다. 가깝고도 먼 관계. 이만한 애증이 또 없다.
삼성전자를 대하는 일본 언론의 태도도 그렇다. 올 들어 이어진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닛케이) 보도의 온도차는 이런 상반된 시선이 드러나는 단적인 예다.
"반도체 산업 경쟁력의 원천인 기술자를 어떻게 확보하고 육성해야 하는지 삼성전자에서 배워야 할 것이 많다." (2월9일)
"일본 반도체 산업의 영향력이 떨어지는 가운데 삼성전자는 독자적인 제품으로 세계시장을 개척했다." (5월8일)
"언뜻 보면 삼성전자가 대만 TSMC와의 3나노(㎚, 1나노미터는 10억분의 1m) 최첨단 경쟁에서 한발 앞선 것으로 보이지만 실태는 다르다. 고객사도, 생산물량도 명확치 않다." (7월8일)
삼성을 배워야 한다고 외치면서도 깎아내리고 견제하는 속내를 감추지 못한다. 특히 삼성이 메모리반도체 세계 1위에 이어 어쩌면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시장에서도 대만 TSMC를 따라잡고 원톱으로 치고나갈 마중물이 될지 모를, 세계 최초 3나노 공정 양산에 대한 견제의 눈초리는 노골적인 수위를 넘어 윽박에 가까워 보인다.(어느 분야에서나 그렇지만 반도체 업계에서는 특히 고객사나 생산량을 공개하지 않는 게 관례이자 전략이다.) 일본의 이런 시기 어린 시선이 오히려 삼성이 잘 하고 있다는 방증이라는 얘기가 나올 정도다.
닛케이 보도의 복잡한 속내를 이해하려면 반도체 산업을 둘러싼 한일, 더 깊게는 한·미·일·중과 대만을 포함한 동아시아-태평양 역학구도의 속살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수십세기에 이르는 한일 양국의 지난한 역사 못지않게 21세기 미중 패권경쟁의 틈바구니에 낀 한·일·대만 3국의 첨예한 이해관계가 이 사안을 이해하는 핵심 열쇠이기 때문이다.
1945년 이후 줄곧 일본의 국제 정치 전략에서 0순위 타깃은 미국이다. 미국을 향한 일본의 구애는 패전의 트라우마를 안겨준 원인 제공자에 대한 태도가 맞나 싶을 만큼이다.
이런 일본에 지난 5월 하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선(先)방한 후(後)방일'은 가히 충격적인 반전이었다. 당시 미국·일본·인도·호주 4개국 안보협의체(쿼드) 정상회의차 일본을 방문하는 길에 한국을 들르는 일정이었음에도 바이든 대통령이 예상과 기존 관례를 모두 깨고 한국을 먼저 찾아 삼성전자 평택 반도체 공장을 살피는 모습은 이른바 소부장(소재·부품·장비)을 제외하면 반도체 주도권을 고스란히 한국에 내준 일본이 두고두고 곱씹을 수밖에 없을 장면으로 각인됐다.
바이든의 발길을 '한국 먼저'로 돌려세운 삼성에 대한 일본의 눈길이 어떨지는 두말할 나위 없다. 1980·90년대 NEC, 도시바, 히타치로 대표되는 일본 반도체 산업이 미국과 공동산맥을 이루면서 전 세계 메모리반도체 최강이었던 시절 물밑에서 이뤄진 '토귀월래'(土歸月來·일본 반도체 기술자들이 토요일에 한국과 대만에 가서 기술을 전수한 뒤 월요일에 일본으로 돌아오는 일종의 아르바이트 붐) 스토리가 없었다면 이런 오늘이 가능했을까. 세계 최초의 3나노 공정 양산을 저격한 닛케이 보도를 아무런 의도성이 없는 불편부당이라고 주장하기 어렵다.
미국이 주도하는 한·미·일·대만의 반도체 동맹 '칩4' 차원에서도 한국의 입지가 커지는 것은 일본 입장에서 달갑지 않은 시나리오다. 미국의 국제 전략에서 반도체를 위시한 경제안보 논리가 군사동맹의 이데올로기를 넘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미국이 한국 반도체를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는 바이든의 삼성전자 방문에서 이미 확인됐다.
칩4 동맹에서 보면 일본은 자국 반도체 산업의 부활을 위해 한국과는 경쟁구도인 대만과의 협력 강화에도 착수한 상황이다. 파운드리 세계 1위 대만 TSMC가 일본 정부의 막대한 지원을 받아 소니, 덴소 등과 공동 운영할 반도체 공장을 구마모토현에 설립 중이다. 여러모로 한국에 대한 시샘과 견제가 뒤섞일 수밖에 없는 입장에서 보기에 아직은 완성 단계를 향해 달리기 중인 삼성의 3나노 공정 양산은 입맛에 맞는 난타 대상인 셈이다.
삼성전자가 지난달 30일 3나노 공정 양산을 발표한 지 한달만인 25일 3나노 제품 출하식을 진행하는 것도 이런 상황과 무관치 않다. 물론 3나노 출하식이 온전히 닛케이 때문이라고 할 순 없다. 그보다는 애플, 퀄컴, 인텔, 엔비디아를 비롯한 글로벌 반도체 팹리스(설계업체) 고객사를 향한 기술력 호소라고 봐야 옳다. 하지만 그동안 삼성의 3나노 기술력에 대한 시장의 의구심을 키운 세력에 일본이 끼어 있음도 부인할 수 없다.
따지고 보면 어디 일본뿐이랴. 파운드리 1위인 대만이나 한국에 손을 내밀어야 하는 미국조차도 미중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고민하는 삼성과 한국의 선전이 반갑기만 할 리는 없다.
앞으로의 핵심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지난달 유럽 출장 귀국길에 언급한대로 결국 기술이다. 반도체 산업 특성상 팹리스가 파운드리를 바꾸긴 쉽지가 않다. 애플만 해도 파운드리를 바꿨다가 생산을 맡긴 칩에 차질이 생기면 아이폰 출시에 문제가 발생할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이런 우려를 뚫어낼 수 있는 것은 어쨌든 기술이다.
3나노 공정 세계 최초 양산이 삼성의 승부수로 평가받는 이유가 여기 있다. 삼성전자는 3나노 최초 양산에 차세대 반도체 제조기술로 꼽히는 GAA(게이트올어라운드)까지 얹었다. TSMC가 2025년으로 예상되는 2나노 공정부터 GAA를 도입할 때쯤이면 삼성의 수율(생산품 가운데 합격품의 비율)은 안정적인 수준이 될 것이라는 노림수다.
닛케이의 평가절하와 다른 결로 업계에서는 삼성의 3나노 양산이 TSMC와의 향후 10년 경쟁에서 골든크로스가 될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다. 삼성전자가 2004년 파운드리 사업을 시작한 이후 35년 업력의 TSMC(1987년 설립)를 공정 기술에서 앞선 것은 사실상 처음이다. 안기현 한국반도체산업협회 전무는 "수십년 동안 한우물만 판 TSMC를 넘어서는 것은 분명 쉬운 일이 아니다"라며 "그런 면에서 삼성의 3나노 공정 추월은 더 기존 시장 상식과 논리로는 불가능했을 역사"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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