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이란·튀르키예의 '오월동주'
2022. 7. 25. 08:04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이란·튀르키예(터키) 정상과의 3자 회담으로 반미연대를 강화하며 외교무대에서 존재감을 드러냈다. 푸틴 대통령이 미국의 반(反)이란 연대 결집으로 인한 이란의 위기감, 시장 확대가 절실한 튀르키예의 경제상황을 파고든 결과로 해석된다. 3국이 시리아에서 서로 다른 세력을 지원하고 있고, 러시아와 이란은 세계원유시장에서 경쟁관계라는 점에서 이들의 연대는 앞으로 좀더 지켜봐야 할 것으로 보인다.
러·이란·튀르키예, 반미 한목소리
푸틴 대통령이 지난 7월 19일(현지시간) 이란 테헤란에 도착해 세예드 에브라힘 라이시 이란 대통령과 회담하고, 알리 하메네이 최고지도자를 예방했다. 앞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반이란 연대 결집을 목표로 이스라엘과 사우디아라비아 등 중동 국가 순방일정을 마친 지 며칠 만에 이뤄진 방문이다.
이날 회담 후 하메네이 최고지도자는 서방을 겨냥해 “전쟁은 (러시아의) 반대편이 시작했다”면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는 위험한 집단”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란과 러시아는 서방의 속임수를 늘 경계해야 한다. 양국은 장기간 협력을 통해 상호 이익을 추구하는 관계”라면서 “푸틴 대통령의 통치로 러시아는 독립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라이시 대통령은 러시아와의 유대를 강조했다. 시리아·이라크에서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조직인 이슬람국가(IS) 소탕 작전을 함께 벌였던 것을 언급하면서 “양국은 테러에 대항한 좋은 경험을 공유하고 있으며 중동지역 안보를 위해 협력했다”고 말했다. 이어 “우리는 독립국가인 양국관계가 강화되기를 희망한다”고 밝혔다.
이란 국영 석유공사(NIOC)와 러시아 국영 에너지기업인 가스프롬은 이날 400억달러(약 52조4384억원) 규모의 석유 및 천연가스 개발·투자에 관한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이란 국영 통신 IRNA는 이번 전략적 협력은 가스전 개발, 액화천연가스(LNG), 가스관 설치, 원유 제품 생산 분야를 아우른다고 전했다.
푸틴 대통령은 이어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튀르키예 대통령까지 참석한 3자회담에서 이번 회담의 핵심 의제인 시리아 안정 대책 등을 논의했다. 이후 기자회견에서도 3국은 서방 비난에 한목소리를 냈다. 푸틴 대통령은 “시리아 위기는 시리아 내 정파 간 대화로 해결돼야 하며 외세의 간섭은 없어야 한다”고 말했다. 라이시 대통령은 미국이 대(對)테러 활동을 명분으로 시리아 북동부 유프라테스강 일대에 주둔하는 것은 정당화될 수 없다며 즉시 시리아를 떠나라고 했다. 에르도안 대통령도 3국이 틀을 짠 시리아 평화 논의 체제인 ‘아스타나 평화회담’이 시리아의 정치적 혼란을 해결하는 가장 효과적인 대책이라고 강조하며 서방의 개입을 거부했다.
안보 위협, 경제난에 오월동주
3국 간의 과거 역사, 분쟁지역에서의 무력 대치상황을 감안하면 관계가 크게 개선된 것이란 평가가 나온다. 특히 러시아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과 함께 이란을 점령한 악연이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영국군은 철수했지만, 러시아는 이란 북부에 남아 마하바드 공화국, 아제르바이잔 인민 정부라는 괴뢰정부를 세웠다. 튀르키예는 나토 회원국으로 러시아와는 시리아, 아제르바이잔, 리비아 등에서 서로 다른 세력을 지원하며 대립 중이다.
이번 회담은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서방의 각종 제재로 러시아가 점점 고립돼 가고 있던 시점에 열렸다. 로이터통신은 러시아가 서방과의 대결로 더 깊이 빠져드는 동안에도 국제적 영향력이 살아 있음을 과시한 것으로 러시아 국내 여론을 우호적으로 형성하는 데도 도움을 줄 것으로 내다봤다.
이란과 튀르키예가 러시아 쪽으로 확실히 돌아선 데는 각국의 군사·경제적 상황이 작용했다. 이란은 미국이 이스라엘과 아랍국가들을 결집하면서 반이란 전선을 공고히 하는 것에 대항하기 위해 러시아와의 관계 강화에 나섰다. 익명을 요구한 이란의 한 고위관료는 최근 로이터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지정학적 유대가 진화하고 있는 점을 감안할 때 이란은 미국과 그 동맹들의 적대행위에 맞서 러시아의 지지를 얻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란으로선 핵합의 복원 협상이 교착상태에 빠진 시점에서 미국을 압박할 외교적 지렛대도 필요한 시점이었다. 앞서 바이든 대통령은 중동 순방(7월 13~16일) 일정 도중 이란 핵무기 사용을 억제하기 위해서라면 최후 수단으로 무력을 사용할 수 있으며, 핵합의가 파기되는 한이 있더라도 이란혁명수비대의 해외테러조직(FTO) 지정은 해제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로이터통신은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고유가 국면으로 대담해진 이란이 러시아의 지원까지 더해 핵합의 복원 협상에서 미국의 양보를 얻어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고 전했다.
러시아도 군사·경제적으로 이란과 밀착하고 있다. 앞서 미국 정부는 러시아가 이란으로부터 전투용 드론을 공급받는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이미 이란을 2차례 방문했다고 주장했다. AP통신은 2018년 미국의 이란 핵합의 탈퇴 이후 서방의 오랜 제재를 견뎌온 이란이 (유럽·미국산 제품을 살 수 있는) 전 세계 암시장에 접근하는 방법을 러시아에 전수해줄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튀르키예는 최근 급격한 물가상승과 통화가치 하락에 직면했다. 경제난의 돌파구 마련 차원에서 시장 확대가 절실한 튀르키예한테 러시아는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주요 외신들이 지적했다. 7월 19일 튀르키예는 이란과도 투자, 외교, 언론 등 여러 분야에 걸친 사전협정을 체결하고 양국 간 무역 규모를 현재의 3배인 300억달러로 늘리겠다고 약속했다.
시리아 분쟁, 원유시장 경쟁은 관계 변수
다만 시리아에서 벌어지고 있는 튀르키예와 러시아·이란 지원 세력 간 무력 분쟁은 3국 관계 강화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 러시아와 이란은 시리아의 바샤르 알아사드 정권을 지원하고 있고, 튀르키예는 자국 내 쿠르드족 분리독립 세력과의 결탁 우려를 제기하며 시리아 내 쿠르드족이 장악한 지역에 대한 군사행동을 별러왔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시리아의 쿠르드족 무장단체로부터 튀르키예를 보호하기 위해 시리아 북부 국경에 완충지대를 구축하자고 제안했지만, 푸틴 대통령은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고 가디언 등이 전했다. 하메네이 최고지도자는 테러리스트들만 이롭게 할 수 있다며 시리아에서 군사작전을 자제할 것을 튀르키예에 촉구했다.
러시아와 이란이 석유 판매 시장에서 경쟁관계라는 점도 향후 3국 간 협력수준에 변수가 될 수 있다. 러시아는 자국 원유에 대한 서방의 단계적 금수조치에 대응하기 위해 중국, 인도 등으로 판매처를 다변화했다. 특히 러시아가 대폭 할인된 가격을 제시하면서 중국은 러시아산 우랄유 수입을 대폭 늘렸고, 이란산 원유 수입을 줄였다. 서방의 대이란 제재 복원 이후 대중국 원유 판매 수익으로 버텨온 이란으로서는 달갑지 않은 상황이다.
박효재 국제부 기자 mann616@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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