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단추 - 그날이 아버지와의 마지막 포옹이었다[사물의 과거사](2)
2022. 7. 25. 08:03
전미경 대전산내사건희생자유족회 회장은 방에 ‘모셔진’ 작은 상자를 열어 보였다. 그가 유해발굴 현장에서 주워온 작은 뼛조각, 치아, 탄피 그리고 ‘흰 단추’ 하나가 보인다.
대전 동구 ‘골령골’에서는 지금도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 유해발굴이 진행 중이다. 흰 단추는 골령골에서 가장 많이 나온 유품이라고 한다. 희생자 대부분이 같은 단추가 달린 같은 옷을 입고 있었다는 뜻이다. 아마도 대전형무소 재소자들의 죄수복이었을 거다.
골령골은 한국전쟁 당시 대전형무소 재소자와 국민보도연맹원들이 경찰과 헌병대 등에 의해 학살된 곳이다. 2010년 1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희생자 수가 최소 1800명을 넘어설 것으로 봤고, 그중 500여명의 신원을 확인 또는 추정했다.
민간에서는 최대 7000명이 희생됐을 것으로 가늠한다. 암매장 추정지만 8곳. 모두 이으면 그 길이가 약 1㎞에 달해, ‘세상에서 가장 긴 무덤’으로 불린다.
불귀의 객이 된 아버지
“정말 가슴이 녹아내리는 아픔입니다. 아버님을 저런 구덩이에 방치해두고 제가 밥을 넘기고 살았다는 게 죄스러울 뿐입니다. (…) 개인의 일이라면 제가 밥을 굶을망정 아버님을 70년 동안 저 땅속에 방치했겠습니까?”(진실화해위원회 소식지 〈진실화해〉 2호, 2021년 8월)
전 회장의 집은 충남 서천에 있었다. 1950년 6월 전쟁이 일어나자, 가족들은 얼른 삼촌부터 숨겨야 했다. 삼촌은 해방 후 대학에 다니며 좌익활동을 했기 때문이다. 삼촌은 결국 월북을 선택했고, 아버지는 삼촌을 도망시켰다는 이유로 역시나 도망자 신세가 됐다.
그때 전 회장은 두 돌쯤 됐을까. 집안 어른들이 줄줄이 고초를 겪는 통에 돌보는 사람이 없었던 미경은, 그때가 되도록 서지 못했다. 아버지는 산에 숨어 지내면서도 늘 막내 미경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미경이 언제나 서려나, 이 난리통에 어떻게 살려나 마음에 걸렸다.
어느 날 자정이 다 된 시각, 가만가만 발소리를 죽여가며 미경의 집 마당에 들어서는 남자가 있었다.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자던 미경을 깨워 손 위에 세워봤다. 미경은 다리를 발발 떨면서도 넘어지지 않고 섰다. 아버지는 미경을 안고 오랜만에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때 방문이 벌컥 열렸다. 경찰이 구두도 벗지 않고 뛰어들었다. 아버지의 멱살을 잡고 일으켰다. 어린 미경은 바닥에 떨어져 뒹굴었다. 아버지의 손목에 수갑이 채워졌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아버지는 대전형무소에 수감됐고, 골령골에서 불귀의 객이 됐다.
“어릴 때 저기서 놀다가도 우리 동네로 어떤 남자 어른이 들어가면 막 달려 쫓아가는 거예요. 우리 집으로 들어가는가 보려고. 그러다 다른 집으로 가면 우두커니 섰다 돌아오고. 할아버지가 백 밤만 자면 아버지 온다고, 꼭 온다고 했으니까….”(6월 16일 필자와의 인터뷰)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아버지를 매일 기다렸다. 약속한 ‘백 밤’이 훨씬 지나도 아버지는 오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어머니를 개가시켰다. 그래도 미경은 조부모님 사랑으로 살았다.
때마다 집으로 경찰이 찾아왔다. 미경은 경찰인지도 몰랐다. ‘아버지 친구’라는 그 아저씨마저 반가워서, 할아버지 어디 가셨느냐는 물음에 있는 대로 대답만 했다. 다음날 경찰은 조부모님을 잡아갔다. 월북한 작은아들과 접선하고 온 게 아니냐고 매를 휘둘렀다. 간신히 돌아온 할아버지는 그때부터 정신을 놓아버렸다. 이제 어린 미경이 할아버지를 돌봐야 했다.
끝나지 않은 고통
미경은 언젠가 아버지를 만나면 ‘일러주고’ 싶은 이야기들을 차곡차곡 일기장에 써내려갔다. 70년 세월 동안 차곡차곡 쌓인 그리움의 낱말들은 어느새 그를 시인으로 만들었다.
“저 하늘에 뭉게구름을 헤치면/ 아버지가 있을까/ 친구들은 학교에 가고 나는 나무하러/ 천방산에 올라/ (…) / 저 구름을 헤치면 아버지가 있으려나/ 아버지 보고 싶고 그리고 미워” (전미경 시집 〈진실을 노래하라〉 중 ‘저 구름을 헤치면’)
2010년 1기 진실화해위원회는 ‘대전·충청지역 형무소 재소자 희생사건’의 진실을 규명했고, 전 회장의 아버지도 골령골에서 억울하게 희생됐음을 밝혀냈다. 전 회장은 아버지에 대한 재심을 신청해 2013년 무죄 판결을 받아내고, 국가로부터 보상금을 받을 수 있었다.
이제야 아버지의 원통한 죽음에 대한 진실이 밝혀졌지만, 고통은 그걸로 끝나지 않았다. 2016년 육군본부와 검찰이, 보상금이 잘못 지급됐다며 뒤늦게 보상금 반환 소송을 제기했다. 이들은 환수금을 보전한다는 명목으로 전 회장의 집과 토지를 가압류하기도 했다.
“아버지 목숨값으로 받은 돈까지 내놓으라고 온 집 안에 빨간 딱지를 붙여놨어요. 그래 내 전 재산을 다 내놓을 테니까, 우리 아버지 여기다 도로 살려놔유.”(6월 16일 필자와의 인터뷰)
5년간 이어진 법정 싸움 끝에 2021년 11월 대법원은 ‘전 회장이 받은 보상금은 부당이득으로 볼 수 없다’며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억울한 죽음에 대한 사과를 기다려온 유족에게 소송을 안겨준 국가. 전 회장은 소송에는 이겼지만 도무지 웃을 수가 없었다.
골령골에서는 지난해까지 약 1250구의 유해가 수습됐다. 유해발굴이 마무리되면 정부는 이곳에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전국단위 위령시설’과 평화공원을 조성할 계획이다.
대전산내사건희생자유족회는 골령골에 사무실을 구했다. 전 회장은 집과 이곳을 며칠씩 오가며 지낸다. 저녁이면 유해발굴 현장을 혼자 둘러보며 걷는다. 그러다 흙무더기 같은 곳에서 뼛조각이며 치아며 보이는 것이 있으면 주워다 흰 종이에 싸서 작은 상자에 담는다.
그리고 상자에 주워 담은 흰 단추 하나. 혹시 그것이 아버지가 마지막 입은 옷에 달려 있던 단추일까. 단추의 개수만큼 많은 아버지, 또 그만큼 많은 원한이 골령골에 남아 있다.
“저녁에 제가 여기서 자면 이런저런 생각이 나서 잘 못 자요. 창문을 열어놓고 밖을 이렇게 보면, 아버지가 묶여서 끌려가시는 게 눈앞에 선하다니까요.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은) 제가 흙 속에 들어가야 잊어버리지, 못 잊어버려요.”(6월 16일 필자와의 인터뷰)
※대전산내학살사건은 한국전쟁 당시 대전형무소 재소자와 충청지역 국민보도연맹원 등이 경찰과 헌병대 등에 의해 대전 동구 ‘골령골’에서 학살된 사건이다. 희생자 수는 1800~7000명으로 추정된다. 지난해까지 약 1250구의 유해가 수습됐으며, 유해발굴이 완료되면 평화공원을 조성할 예정이다.
최규화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언론홍보팀 주무관
▶ 최신 뉴스 ▶ 두고 두고 읽는 뉴스
▶ 인기 무료만화
©주간경향 (weekly.kha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주간경향.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주간경향에서 직접 확인하세요. 해당 언론사로 이동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