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의 명(明)과 암(暗)⋯경제 회생 기여 지도자 vs 극우 상징
‘당대 가장 양극화된 일본 정치인(the most polarizing Japanese political figure of his time).’ 7월 8일 아베 신조(安倍晋三) 전 일본 총리가 총격 사망한 뒤 워싱턴포스트(WP)가 뽑은 제목이다. WP의 평가대로 아베 전 총리는 지지자들에겐 ‘잃어버린 20년’으로 불리는 장기 경제 불황에서 벗어나 과거 일본의 번영을 다시 재현하기 위해 노력한 인물로, 반대파들에겐 역사에 대한 반성이 없는 우익 정치인의 상징으로 일컬어진다.
아베는 가문이 중요한 일본 정계에서도 ‘정치 명문가’로 꼽히는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아베 신타로(安倍晋太郞)는 외무대신(장관)을, 친할아버지 아베 간(安倍)은 상원 격인 중의원을 지냈다. 하지만 아베에게 가장 큰 정치적 영향력을 끼친 인물은 56·57대 일본 총리(1957년 2월~1960년 7월)이자, 제 2차 세계대전 A급 전범(戰犯)으로 지목되기도 했던 기시 노부스케(岸信介)였다. 아베는 유년 시절 공무로 바빴던 부친 대신 자신을 끔찍하게 귀여워한 외조부 기시 노부스케의 손에서 자랐다. 청소년기에 아버지 신타로와 불화가 깊어질수록 아베는 점점 더 아버지와 반대 노선을 걷게 됐다. 교도통신 정치부 기자 출신 노가미 다다오키(野上忠興)가 쓴 책 ‘아베 신조, 침묵의 가면’에 따르면, 신타로는 공부를 게을리하는 아베에게 “아베 가문엔 도쿄대 졸업자밖에 없다”며 아들의 머리에 사전을 집어 던진 적도 있었다. 훗날 정계에 입문한 아베가 “나는 아베 가(家)의 아들이지만, 기시 가문 유전자를 물려받았다”며, 중도 우파 노선을 걸었던 아버지와 거리를 두고 극우 성향 외조부의 정치 노선을 걸은 것은 이런 어린 시절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세이케이대를 졸업하고 1979년 고베제철소 샐러리맨으로 사회생활을 처음 시작한 아베는 아버지가 1982년 외무대신으로 발탁된 것을 계기로 외무대신 비서관으로 채용됐다. 주변 사람들은 신타로가 아들을 자신의 후계자로 삼을 것이라 기대했지만, 정작 아들에 대한 신타로의 평은 냉정했다. 당시 정치부 기자였던 노가미에게 “신조는 정치가에게 필요한 정(情)이 없다”고 평가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1991년 5월 신타로가 췌장암이 악화해 급사한 뒤, 아베는 아버지의 후계자로서 야마구치(山口) 1구에서 당선되면서 정계에 본격 발을 들였다. 야마구치는 원래 기시 전 총리의 지역구로서 일본이 조선을 차지해야 한다는 ‘정한론(征韓論)’을 주장한 19세기 사상가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을 배출한 곳이기도 하다. 어머니 아베 요코(安倍洋子)는 갓 정계에 입문한 아들 손을 끌고 오자와 이치로(小沢一郎) 등 정계 막후 실력자들을 찾아가 “제 아들을 키워주십시오”라고 머리를 숙였다. 1992년에 펴낸 책 ‘나의 아베 신타로: 기시 노부스케의 딸로서’에서 요코는 “우리 일족은 총리대신 3명, 외무대신 2명을 배출했다. 이는 가문의 자존심”이라고 썼다. ‘차기 총리 0순위’로 꼽히던 남편이 급사한 뒤 요코는 가문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아들을 총리로 만드는 것으로 노선을 틀었다.
하지만 쟁쟁한 실력자들이 모인 정계에서 아베는 한동안 두각을 드러내지 못했다. 그가 일약 스타 반열에 오른 것은 2000년대 초반 북한에 납치된 일본인들을 구출하자는 운동에 앞장서면서부터다. 그때 일본에선 대북(對北) 강경론이 인기를 얻었는데, 강경파에 앞장섰던 아베 당시 관방 부장관은 ‘납치의 아베’라는 닉네임을 얻으며 일약 영웅이 됐다.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전 총리는 아베의 이런 인기를 감안해 그를 여당인 자민당 넘버2 간사장에 전격 발탁했고, 2006년 9월 고이즈미 총리가 퇴진하자 아베는 그의 뒤를 이어 52세의 젊은 나이에 일본 총리 자리에 올랐다.
하지만 전후(戰後)에 태어난 첫 총리로 주목받으며 들어선 아베 내각은 1년 안에 단명으로 끝나고 말았다. 얕은 정치 경험과 주변인 문제로 인한 잡음, 아베 본인의 건강 악화 등이 주된 이유였다. 뼈아픈 경험을 한 아베는 2012년 절치부심 끝에 재기를 도모했고, 이후 2020년 건강상 이유로 자리에서 물러날 때까지 7년 9개월간 역대 최장수 일본 총리를 역임했다.
아베에 대한 평가는 찬반이 엇갈린다. 엔화 약세, 금융 완화 및 재정 지출 확대 등을 통한 경제 활성화 정책 ‘아베 노믹스(Abenomics·아베+경제의 합성어)’를 도입한 이후 수출 비중이 높은 일본 경제는 엔화 약세에 힘입어 한때 호조를 보였고, 그의 지지율도 76%까지 치솟았다. 두 차례 집권하는 동안 치러진 6번의 선거에서도 모두 압승을 거뒀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아베노믹스가 돈풀기에만 급급한 나머지 국가 채무 비율을 높였고, 고질적 디플레이션(물가 하락)도 해결하지 못한 ‘절반의 성공’이라는 평가도 있다. 재임 기간 중 미국을 비롯한 서구 진영과 긴밀한 외교 관계를 구축해 파이낸셜타임스(FT) 등으로부터 “국제무대에서 일본의 위상을 높인 인물”이라는 평가를 들은 반면, 전쟁이 가능한 ‘보통 국가’를 추구하는 보수·강경 노선 때문에 이웃 국가인 한국·중국과 불편한 관계를 맺기도 했다.
한때 승승장구하던 아베는 2017년 지인이 운영하는 사학에 특혜를 준 ‘사학 스캔들’과 2019년 세금이 투입된 벚꽃 관람 정부 행사에 자신의 지역구 주요 인사를 초대했다는 비판을 받은 ‘벚꽃 모임 스캔들’로 정치적 위기를 맞았다. 이후 코로나19에 대한 미숙한 대응과 이로 인해 2020년으로 예정됐던 도쿄 올림픽까지 1년 연기되면서 사퇴 압박이 심해졌고, 결국 2020년 8월 건강상 이유를 대고 물러났다.
하지만 아베는 사퇴를 선언한 지 약 1년 3개월 만인 2021년 11월 집권 자민당 내 최대 파벌의 수장 자리를 꿰차면서 다시금 막후 실력자로 등장했다. 아베의 후광을 업고 당선된 현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총리가 아베 가문의 천적이라 일컬어지는 하야시 가문의 하야시 요시마사(林芳正) 전 문부과학대신을 외무대신으로 발탁하는 등 인사 문제로 마찰을 빚자, 아베 본인이 막후 실력자로 나서서 정치에 관여하려 했다는 게 중론이다. 마이니치신문 등 일본 언론은 “아베가 레이와(令和·일본 현재 연호) 시대의 야미 쇼군(’그림자 쇼군’이라는 뜻으로 당내 막후 실력자를 의미)이 되려 한다”고 평했다.
하지만 정권의 숨은 실세로서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던 아베의 야심은 예상치 못한 총성과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영원히 사라지게 됐다.
Plus Point
일본 참의원 선거, 자민당 압승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가 사망한 지 이틀 만인 7월 10일에 치러진 일본 참의원(상원) 선거에서 기시다 후미오 총리가 이끄는 집권 자민당이 압승을 기록했다. 아베 전 총리의 갑작스러운 사망이 보수파의 집결을 불렀다는 분석이 나온다.
전체 의석수 248석인 참의원은 임기가 6년으로, 3년마다 전체 의원의 절반을 새로 뽑는다. 이번에 새로 뽑는 125석 가운데 여당은 절반이 넘는 76석(자민당 63석, 연립여당 공명당 13석)을 확보했다. 아직 임기가 남아 있어 이번에 선거 대상이 아닌 여당 의석까지 합하면 146석을 확보해 전체 의석의 절반을 넘겼다.
일본 정계는 아베의 충격적인 사망이 압승에 큰 역할을 했을 것이라 보고 있다. 일본 민영방송 TV도쿄 출구조사에 따르면, 아베의 사망으로 지지 정당을 바꾼 유권자는 13%인 것으로 조사됐다. 모테기 도시미쓰(茂木敏充) 자민당 간사장은 “(표심) 13%가 바뀌었다면 아베 전 총리의 마지막 목소리가 국민에게 확실히 전달된 것으로 본다”라고 밝혔다.
여당의 압승으로 향후 아베 전 총리를 비롯한 우익 세력의 숙원인 평화헌법 개정에 힘이 실리게 될 것으로 보인다. 여당 의석에다 헌법 개정에 긍정적인 일본유신회, 국민민주당까지 4개 당 의석을 합하면 개헌안 발의 기준인 3분의 2(166석)를 넘는 176석이 되기 때문이다. 기시다 총리는 7월 11일 공영 방송 NHK에 출연해 “개헌 논의를 심화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개헌을 하면 일본은 다시 ‘전쟁을 할 수 있는 국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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