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온 탕감의 시대..탕감 정책의 역사

2022. 7. 25.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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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부터 정권 초마다 반복..일시적 빚 탕감은 미봉책, 복지 정책 등과 연계해야

[비즈니스 포커스] 

윤석열 대통령이 14일 오전 서울 중구 서민금융통합지원센터에서 열린 제2차 비상경제민생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사진=대통령실 제공


‘탕감의 시대’가 다시 돌아왔다. 정권 초기마다 되풀이되는 빚 탕감 정책이 이번 정부에서도 다시 등장했다. 이번에는 그 강도가 더욱 세다. 배드뱅크 설립을 통해 자영업자와 소상공인 대출의 원금을 60~90% 감면해 주겠다는 계획이 포함돼 있다. 코인 투자로 진 빚도 감면해 주겠다는 말이 나온다.

논란도 뜨거워지고 있다. 성실하게 빚을 갚아 온 이들에 대한 역차별이라는 비판과 함께 무분별한 선심성 정책으로 인해 모럴 해저드(도덕적 해이)를 불러 올 수 있다는 우려다. 

찰스 킨들버거는 ‘광기와 공포, 붕괴 : 금융 위기의 역사’에서 경제학에서 반복되는 역사의 중요성을 언급한 바 있다. 빚 탕감 정책의 역사 또한 마찬가지다. 역대 정권들 역시 경제 위기가 닥칠 때마다 ‘빚 탕감 정책’을 꺼내 들었고 그때마다 비슷한 논란은 반복됐다. 역대 정부의 ‘빚 탕감’ 정책과 관련한 역사를 따라가 봤다. 

 

 소상공인 빚 원금 90% 감면? 들끓는 여론

금융위원회는 7월 14일 제2차 비상경제민생회의에서 125조원 규모의 금융부문 민생 안정 계획을 발표했다. 장기화된 팬데믹(감염병의 세계적 유행)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는 자영업자와 청년 등 취약 계층의 재기를 돕기 위한 금융 지원 프로그램이다.

민생 안정 계획의 핵심 내용은 자영업자·소상공인의 채무 조정을 위해 ‘새출발기금(30조원)’을 조성하고 저금리 대환 프로그램 등을 신설하는 것이다. 새출발기금은 부실 채권을 정리하고 채무 재조정을 지원하는 특별 기금을 운용하는 ‘배드뱅크’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새출발기금은 대출 상환이 어려운 취약층 대출자의 부실 채권을 매입해 채무를 조정해 준다. 거치 기간은 최대 1~3년이고 최대 10∼20년 장기·분할 상환에 대출 금리도 내려준다. 연체 90일 이상 부실 차주에 대해서는 60∼90%의 원금 감면 계획도 밝혔다. 자영업자·소상공인 대출 만기 연장, 상환 유예(잔액 130조원)가 오는 9월 마무리되면 10월부터 새출발기금을 통해 상환 부담을 경감하는 데 중점을 두는 근본적인 재무구조 개선 지원 체계로 전환하겠다는 것이 골자다.

이 밖에 빚을 내 주식·가상 자산 등에 투자했다가 실패한 청년층의 재기를 돕기 위해 저신용 청년층을 대상으로 이자를 최대 50% 감면해 주거나 원금 상환을 3년 동안 유예해 주는 ‘청년 특례 프로그램’과 변동 금리 주택 담보 대출을 장기·저리의 고정 금리 정책 모기지로 전환하는 ‘안심전환대출’ 사업도 포함돼 있다.

이날 비상경제민생회의에 참석한 윤석열 대통령은 “물가 상승 억제를 위한 기준금리 인상이 세계적으로 이뤄지는 상황에서 취약 계층의 채무 부담이 가중되고 있다”며 “정부가 선제적으로 지원하지 않는다면 궁극적으로 사회적 비용은 커질 것”이라며 금융 지원 프로그램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하지만 정책이 발표됨과 동시에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 자영업자·소상공인에 대한 금융 지원의 필요성은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원금의 90%까지 감면하는 것은 ‘선을 넘은’ 정부의 개입이라는 비판이다. 국민권익위가 운영하는 ‘국민생각함’에는 이미 형성평 문제 등을 거론하는 시민들의 의견이 다수 눈에 띈다. 그중 한 시민은 “나는 빚 1억원을 갚는 데 5년이 걸렸는데 이자 감면도 아니고 원금 감면은 사회적 신뢰를 무너뜨릴 심각한 사안”이라며 “빚을 질 때는 갚을 책임과 함께 지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청년 특례 프로그램’과 ‘안심전환대출’ 프로그램에 대해서도 논란이 거세다. 청년층의 재기를 돕겠다는 취지에는 공감한다고 하더라도 빚을 내 코인과 주식 등에 투자한 ‘빚투족’과 영혼까지 그러모아 대출받고 주택을 구매한 ‘영끌족’까지 빚을 탕감해 주는 것은 공정하지 못하는 성토다. 청년층의 표를 잡기 위한 선심성 정책이라는 비판과 함께 그간 성실히 빚을 갚아 온 이들에 대한 역차별이라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재원 마련 또한 빚 탕감 정책이 나올 때마다 도마 위에 오르는 단골 주제다. 빚 탕감 정책을 위해서는 막대한 재원이 필요하다. 특히 이번 정부의 빚 탕감 프로그램에는 빚투족과 영끌족의 빚을 ‘국민의 세금’을 투입해 갚는 데 대한 분노가 점점 커지는 분위기다.
‘투자해 성공했으면 그 이익 중 일부가 국가로 돌아오는 것도 아닌데 실패했다고 그 손실을 세금으로 보전해 주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논리다.

빚 탕감 정책과 관련한 논란이 거세지자 금융위원회는 7월 18일 예정에 없던 기자 간담회를 마련하며 진화에 나섰다. 김 위원장은 “지원 규모인 125조원이 모두 (정부) 예산이 아니다”며 “채권 발행으로 조달하는 부분도 있고 예산 지원 없이 대환으로 지원하는 부분도 있다”고 선을 그었다. 125조원이 넘는 필요 재원 중 현재 편성된 정부 예산은 약 4조7000억원이다. 새출발기금 30조원, 안심전환대출 45조원은 정책 금융회사에서 회사채를 발행해 충당한다. 신용회복위원회의 채무 조정은 정부 예산 대신 해당 대출을 취급한 금융회사가 부담을 나눠 지게 되는 구조다. 김 위원장은 “이번 채무 조정은 ‘빚투’, ‘영끌’ 족을 위한 제도가 아니라 현재 금융 시스템 내 운영 중인 채무 조정 제도 테두리 안에서 청년층 등을 위한 지원 대책을 확대·보완한 것일 뿐”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과거의 채무 조정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정권마다 반복된 ‘빚 탕감 정책’의 역사


빚에 허덕이는 이들을 구제하기 위한 부채 탕감의 역사는 생각보다 뿌리가 깊다. 고대 유대 사회에서는 50년마다 안식년인 ‘희년’이 되면 모든 부채를 탕감하고 빚으로 인해 노예가 된 이들을 해방시키는 율법이 있었다. 신라 문무왕 때는 어려운 백성의 빚을 탕감하고 이자 면제를 단행했다는 기록이 있기도 하다.

그만큼 채무를 경감해 주는 정책은 지나치게 많은 빚을 갚지 못하고 있는 이들의 경제 활동과 재기를 도움으로써 ‘빚의 악순환’을 끊어낸다는 측면뿐만 아니라 장기적으로 국민의 삶의 질을 개선한다는 측면에서도 필요성을 인정받고 있는 제도다. 대부분의 국가들에서 ‘개인 회생 제도’ 등을 운영하고 있고 이는 한국 또한 마찬가지다.

개인 회생 제도와 같은 기존의 금융 시스템 외에 벼랑 끝에 선 서민들을 구제하기 위한 목적으로 별도의 ‘빚 탕감’ 정책을 실시한 것은 1987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대통령 후보였던 김대중 전 대통령이 ‘농어촌 부채 탕감’을 공약으로 내걸며 큰 관심을 모았고 이후 대통령에 당선된 노태우 정부는 1989년 ‘농어가부채에 관한 특별 조치법’을 제정 공포하고 부채 감면을 추진했다.

이후 농어촌 부채 탕감은 선거 때마다 주요 공약으로 떠올랐다. 김영삼 정부 또한 대선 후보 시절부터 42조원을 투입해 농어촌 부채 탕감을 비롯한 농어촌 구조 개선을 공약으로 내걸고 ‘농업 구조 개선 사업’을 시행한 바 있다. 이와 같은 흐름은 김대중 정부에서도 농가 부채에 대한 금리를 탕감하는 정책이 그대로 이어졌다. 이는 산업화 과정에서 경쟁력을 잃어 가는 농업에 대한 보조라는 점에서 일정한 국민적 공감대에 기초한 것이었다.

부채 탕감을 위해 ‘배드뱅크’의 개념이 처음으로 적용된 것은 김대중 정부 시절이다. 당시 정부는 1997년 외환 위기에 대응해 기업의 부실 채권을 정리하기 위한 ‘부실채권정리기금’을 설치, 111조6000억원에 달하는 부실 채권을 매입했다. 당시 조성된 기금만 40조원에 달했다. 이는 금융회사를 대상으로 한 조치였다.

노무현 정부는 2003년 무렵 심각해진 신용카드 대란을 수습하기 위해 배드뱅크인 ‘한마음금융’을 설립했다. 620개 금융회사가 참여해 다중 채무자의 부채 원금의 30~50%를 감면해 줬다.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 때 이명박 정부는 ‘신용회복기금’을 통해 저신용자들을 구제하는 데 나섰다. 3개월 이상 1000만원 이하를 연체한 다중 채무자들을 대상으로 원금의 30~50%를 감면해 줬다.

박근혜 정부는 2013년 18조원 규모의 국민행복기금을 조성해 4년간 58만 명의 빚을 최대 50% 갚아줬다. 기초생활 수급자는 최대 70%까지 감면받았다. 글로벌 금융 위기 이후 1000조원에 달할 만큼 심화된 가계 부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조치였다.

금융 위기 이후 2008년부터 2012년까지 미소금융·햇살론·새희망홀씨 등 저소득·저신용층의 금융 애로를 해소하기 위한 저금리 대출 프로그램에 총 6조8000억원 정도가 공급됐지만 금융 취약 계층의 부채를 줄이는 데는 효과적이지 못했다는 판단에 따라 보다 과감한 부채 경감 방안을 들고나온 것이다.

2017년 문재인 정부 역시 가계 부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칼을 빼들었다. 60만여 명의 장기 소액 연체자(10년 이상, 1000만원 이하)들의 채무를 전액 면제받거나 일부 감면 받았다. 당시에도 모럴 해저드 논란이 있었지만 소액 연체자 중심이라 큰 이슈는 되지 않았다.

 

 부채 탕감 정책은 '착한 사마리아인'? 

흔히 배드뱅크와 같은 채무 면제와 관련한 정책은 ‘착한 사마리아인’ 정책에 비유되곤 한다. 강도를 만나 곤경에 빠진 사람을 도와준 사마리아인의 성경 일화를 빗댄 표현이다. 김주현 금융위원장이 이번 논란과 관련해 ‘선한 온정’을 특히 강조한 것은 이와 같은 맥락이다.

경제학자 찰스 윌버는 ‘착한 사마리아인은 나쁜 경제학자일까?’라는 그의 저서에서 경제학에서도 인류의 도덕성을 배제할 수 없고 빈곤을 해결하고 시장의 불평등을 줄이기 위한 적절한 개입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문제는 개인 회생 제도와 같은 기존의 구제책 외에 이와 같은 개인들의 빚을 탕감하는 데 국가가 어디까지 개입하는 것이 적절한지에 대한 논란이다.

다시 말해 착한 사마리아인이 늘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각 개인의 합리성과 이익을 기반으로 움직이는 경제적 세상에서 ‘착한 사마리아인’은 불공정을 낳을 수 있다. 오히려 성실한 사람이 손해를 보는 형평성 문제다. 이는 신뢰를 기반으로 움직이는 금융 시장을 왜곡할 가능성이 높다. 빚 탕감과 같은 정책에서 특히 정책의 타이밍과 함께 정교함이 강조되는 이유다. 

안재욱 경희대 경제학과 명예교수는 “재산권이 침해되거나 자율성이 훼손되고 도덕적 해이가 만연하면 금융 시장이 잘 작동하지 않는다”며 “채무자들에게 빚 안 갚고 버티는 게 유리하다는 잘못된 신호를 주게 된다면 이런 환경에서 금융 산업이 발전할 수 없고 경제 활동이 활발해질 수 없다”고 말했다. 도덕적 해이가 심해진다면 이는 오히려 서민들이 금융회사에서 필요한 돈을 빌리는 데 더 어려운 환경이 초래될 수 있다. 금융회사들이 리스크 관리를 위해 대출 조건을 까다롭게 적용하면 돈을 빌리지 못하는 이들이 사채 시장을 이용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막대한 예산을 들인 정부의 빚 탕감 정책에도 불구하고 실제 이와 같은 정책들이 ‘빚의 악순환’을 끊어내고 삶의 질을 개선하는 데 얼마나 성과가 있는지 의구심이 드는 것은 이 지점이다. 실제로 1990년대 후반 정부의 농어촌 부채 탕감 정책에도 이 시기 1990년 말 8조3000억원이었던 농가 부채는 2002년 말 25조5000억원으로 약 3배 이상 늘어났다. 이는 배드뱅크의 형태를 띠고 있는 국민행복기금 등에서도 마찬가지다. 2013년부터 4년간 국민행복기금을 통해 빚을 탕감 받은 58만 명 가운데 10만6000여 명이 다시 채무 불이행자(3개월 이상 연체)가 된 것으로 나타났다.

빚 탕감 정책이 그저 선심성 돈 퍼주기 정책에 그쳐서는 금융 취약 계층의 재기를 돕기 위한 목적의 ‘빚 탕감’ 정책이 미봉책에 그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팬데믹이 장기화되는 상황에서도 미국과 스페인 등 몇몇 국가에서 역시 소상공인과 자영업자에 대한 지원을 위해 대출 원금과 이자 상환을 유예하는 조치를 시행하고 있지만 원금 감면과 같은 사례는 찾아보기 힘든 것은 이 때문이다.

전문가들이 강조하는 것은 보다 근본적인 사회 안전망의 구축과 일자리 정책이다. 이군희 서강대 경영학부 교수는 “부채의 금액은 적지만 수백만 명이 몰려 있는 취약 계층은 경제적 측면보다 사회적 측면에서의 모니터링이 더욱 중요하다”며 “당장 빚을 탕감해 주는 것보다 법적·제도적 인프라 구축이 더욱 중요하다”고 말했다. 금융 취약 계층의 재기를 위해서는 근본적으로 소득 창출 능력을 키워야 하고 일자리 프로그램 등과 연계되는 것이 우선돼야 한다.

정교한 정책을 통해 대상자를 선별하는 것도 중요하다. 이 교수는 이어 “소득이 조금 되면서 빚을 갚으려는 사람은 혜택을 받지 못하고 아예 갚지 않겠다고 포기한 사람들에게 혜택이 돌아간다면 금융 질서가 왜곡될 수 있다”며 “사회적 취약 계층에게는 금융 혜택이 아닌 복지 차원에서 지원해 줄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정흔 기자 vivaj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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