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급 한지와 대나무로 만든 '왕의 우산'..수려함에 젖어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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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철 출근길마다 속으로 되뇌는 말이 있다.
'우산 잃어버리지 말자.' 비 오는 아침에 쓰고 나갔다가 날이 개면 어느샌가 품에서 사라져버리기 일쑤다.
우리나라 조선왕조실록엔 '영조가 "인군(人君)이 문을 나서면 반드시 일산(日傘)을 벌리고 비가 올 때는 젖을 것을 염려하여 우산으로 교체하였다"고 말했다'고 적혀 있다.
원료가 되는 한지가 비쌌고 대나무로 대오리를 깎을 때 섬세한 손기술이 필요했던지라 우산값이 꽤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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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년 역사 자랑하는 전통 지우산
무형문화재 장인이 만드는 전주 특산품
아름다운 디자인·친환경 매력 더해 인기
장마철 출근길마다 속으로 되뇌는 말이 있다. ‘우산 잃어버리지 말자.’ 비 오는 아침에 쓰고 나갔다가 날이 개면 어느샌가 품에서 사라져버리기 일쑤다. 그러다 다시 빗방울이 쏟아지면 주저 없이 근처 편의점에서 비닐우산을 산다. 단돈 3000원짜리. 또 잃어버린다 한들 크게 속이 쓰리진 않다. 우산에 관해선 인심 좋은 이가 기자뿐은 아닐 테다.
지금은 잃어버려도 그만인 대접을 받는 우산이지만, 과거엔 왕이 쓰던 고급용품이었다. 역사도 유구하다. 동서양의 고대 벽화에 비슷한 모양의 것이 등장한다. 우리나라 조선왕조실록엔 ‘영조가 “인군(人君)이 문을 나서면 반드시 일산(日傘)을 벌리고 … 비가 올 때는 젖을 것을 염려하여 우산으로 교체하였다”고 말했다’고 적혀 있다. 그보다 앞서 세종·문종실록에도 우산이 등장한다. 왕이 행차할 때 썼거나 사신에게 선물로 주기도 했다.
1950년대에도 우산은 귀했다. 소위 돈 있는 집안의 전유물이었다. 당시엔 종이로 제작해 지우산(紙雨傘)이라 불렀다. 원료가 되는 한지가 비쌌고 대나무로 대오리를 깎을 때 섬세한 손기술이 필요했던지라 우산값이 꽤 나갔다.
지우산은 왕의 물건에서 부잣집의 사치품으로 쓰임을 달리하며 이 땅에서 오백년 넘게 함께했다. 그런데 간혹 종이우산을 일본이나 베트남의 전통 공예품으로 오해하는 이들이 있다. 이는 잘못 안 것이다.
지우산은 전북 전주의 특산품이다. 예부터 이곳 한지가 질 좋기로 유명했고 인근 담양엔 대나무숲이 있다. 재료를 구하기 쉬워 자연스레 지역에 우산 공장이 모였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덕진구 장재마을에 우산공장이 30여곳에 달했다. 활황은 1970년대 들어 그쳤다. 비닐우산이 들어서면서다. 이후 값싼 천우산·수입우산까지 밀려들면서 지우산은 점차 자취를 감췄다. 현재 국내에서 전통 방식을 고수해 우산을 내놓는 이는 전북 무형문화재 윤규상 장인이 유일하다.
장인이 만드는 지우산은 하나에 수십만원을 호가한다. 그럴 만한 것이 하나를 완성하는 데 오랜 시간과 품이 든다. 대나무를 수개월간 말려 대·살·꼭지 같은 것을 손수 깎는다. 작은 부속품끼리 아귀가 딱 맞도록 하는 일이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다. 한지는 끓인 들기름을 발라 막을 입혀야 한다. 그러면 빗물이 스며들지 않고 통통 튄다. 물론 최상급 재료를 구하는 것도 큰일이다.
최근 잊힌 지우산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뛰어난 디자인과 섬세한 완성도에 반해 구입하려는 이들이 늘었다. 게다가 재료는 대나무·한지·명주실. 친환경용품으로 알려지면서 착한 소비를 지향하는 MZ세대(1980년대초∼2000년대초에 출생한 세대)에게 인기를 끈다.
지유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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