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수·삼수 하더라도..정의당, 진보정치 기본 다시 세워야"
"분당 여러 차례 겪으며 창당..토론 금기시 문화 생겨"
"집회 현장에 정의당 안보여..노동자·농민 결합 약해져"
"비례 위주 당선 전략 수정..지역 중심 집권 플랜 짜야"
"블루칼라 노동 여건 변화..그들 요구 기민하게 대응을"
“새로운 얼굴 없이는 새로운 가치도 세울 수 없을 겁니다.”
지난 22일 정의당의 한 당직자는 비장한 얼굴로 말했다. 대선과 지방선거에서 참담한 성적표를 받아든 정의당은 지금 백가쟁명식 논쟁에 휩싸여 있다. 단, 한 가지 사실엔 당 관계자들 대부분이 합의를 이루고 있다. ‘노회찬·심상정’으로 대표되는 “진보정당 1세대의 실험이 끝났다”(심상정 의원)는 것이다. 지난 23일 노회찬 전 대표 4주기를 맞은 정의당은 “어렵지만 지금의 좌절은 진보정치의 종착점이 아니”라며 “노동하는 시민들의 삶에 더 가까이 다가가겠다. 시민들 속에서 진보정치의 길을 다시 개척하겠다”(이은주 비상대책위원장 추모사)고 선언했다. 그러나 진보정치의 존재 이유를 잃은 정의당의 미래는 여전히 위태롭다. “50년 쓰던 고기 판에 삼겹살 구우면 새까매진다”던 2004년 노 전 의원의 ‘불판론’처럼 진보정당은 이제 낡은 불판을 갈아엎고 새로운 리더십을 고민할 때인지 모른다.
<한겨레>는 성별과 나이, 정의당 안팎의 진보정치 의견그룹 등을 안배해 꼽은 2세대 진보정치인 8명에게 정의당이 직면한 위기 원인과 미래 비전에 대해 물었다. 정의당에서 ‘의견그룹’이라고 불리는 ‘정파’들은 ‘전환’, ‘비상’(인천연합), ‘함께서울’, ‘새로운진보’ 등으로 크게 나뉜다. 인천연합에서 분화된 함께서울은 당 밖의 시민사회단체들과 연계하고 있다. 새로운진보는 옛 국민참여당과 의견그룹 ‘진보너머’ 계열이다. 전환은 노동당에서 탈당한 평등사회네트워크와 노동정치연대 계열로 분류된다.
“기성 정당인 양 착각했다”(이보라미 전 전남도의원), “진보의 이념 자체가 공백 상태다”(이기중 전 서울 관악구 의원), “진보정당으로서의 정체성을 만드는 데 실패했다”(조성주 전 정책위 부의장), “변화된 시민의 삶에 역동적으로 대응하는 데 실패했다”(오김현주 서울 마포 지역위원장), “여의도 정치보다 지역을 다시 재건하는 방향으로 헌신해야 한다”(김희서 비상대책위원)는 진단이 나왔다. 선거제도 개혁을 통해 국회에서 다양한 정당이 살아남을 공간을 마련하지 못하면 정의당을 비롯한 진보정치의 앞날은 밝지 않다. 그러나 그에 앞서 정의당 스스로 “가장 치열하게,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며 한국 사회의 문제들과 싸울 수 있는 정당”(권수정 전 서울시장 후보), “사회적 약자, 노동자와 함께 기득권 체제에 파열구를 내는 정당”(김윤기 전 부대표)으로 거듭나고 “국회 담장을 넘는 성과”(정재민 서울시당 위원장)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한, 선거제도 개혁 주장도 탄력받기 어려울 것이다.
이합집산으로 모인 정당의 태생적 한계
2012년 창당한 정의당은 10년만에 어쩌다 이런 위기에 봉착했을까. 태생부터 한계가 컸다. 권수정 전 후보는 “민주노동당처럼 조직적 기반으로 가지고 당을 출범시킨 것이 아니라 통합진보당에서 뛰쳐나와 다양한 정치세력의 이합집산으로 출발한 정당이기에 진보정당의 내용을 갖춰내지 못했다”고 돌아봤다. 그러다보니 “양당 구조에서 제3정당으로서 위치 선점에 실패”(오김현주)할 수밖에 없었고 ‘민주당 2중대론’에 함몰되고 말았다.
‘분당 트라우마’는 당내 이견을 짓눌렀다. 조성주 전 부의장은 “탄생부터 분당 사태를 여러 차례 겪으며 만들어진 정당이어서 이견을 솔직하게 말하기 어렵고 당내에서 토론하는 걸 금기시하는 문화마저 생겼다. 이 때문에 자기 정체성을 만드는, 이른바 ‘정당 만들기’에 실패했다”고 짚었다. 심상정 의원도 최근 내놓은 ‘정의당 10년평가위원회’ 의견서에 ‘조국 사태’를 언급하며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을) 승인하지 않을 경우 최소 4천명에서 많게는 8천명 당원의 대량 탈당이 예측됐다“며 “당 대표로서 총선을 앞두고 거의 분당에 가까운 결정을 내리기란 쉽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이기중 전 의원은 “독자적 정당으로 갔어야 했는데 당내 이견을 제대로 해소하지 못하면서 결국 그때 그때 당원들이 탈당하는 것에만 민감하게 반응하다보니 누구도 정치적으로 확실한 결정을 하지 못했다. 4천명이 탈당하더라도 그걸 감당할 수 있어야 우리가 진보정치를 할 수 있는 것 아닌가”라고 말했다.
기존에 진보정치가 안고 있던 가치를 발전시키지도 못하고 있던 터에 녹색·젠더 등 새로운 담론이 다가왔을 때 정의당이 이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는 자성도 있었다. 김희서 비대위원은 중앙정치에만 함몰된 정의당의 모습을 “모의고사를 계속 봐서 시험 성적은 올랐지만 진짜 공부는 뒷전으로 미뤄둬 실력이 들통난 수험생”에 비유했다. 그는 “‘87년 체제’ 이후에 완성된 제도에서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지 못했고, 녹색·젠더 등 새로운 담론은 우리의 동력이 되기보단 한계만 드러내 보였다. 재수를 하든 삼수를 하든 기본을 다시 세워야 진보정치가 다시 서는 길을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당의 정체성이 또렷하지 않았기에 정의당을 필요로 하는 현장과도 유리되고 말았다. “우리가 기성 정당인 양 착각했다. 그러다보니 의회 정치와 공중전에 주력하며 뿌리가 썩는 줄 몰랐다.” 이보라미 전 의원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문재인 정부에서 정의당이 부적격 판정을 내린 장관 후보자들이 대부분 낙마하며 ‘정의당 데스노트’라는 평가를 받고 심상정 의원이 선거제 개편을 위한 정치개혁특별위원장을 맡을 때 중앙정치에서 당의 존재감은 커졌지만 정작 근본은 무너져내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 전 의원은 “거대 양당 속에서 존재감을 발휘하고 있다고 착각할 때 집회와 파업 현장에선 정의당 지도부를 볼 수 없었다. 노동자·농민과의 결합력이 약해지면서 현장 대중과 멀어졌고 그러니 선거에서 그들이 정의당을 거리낌 없이 선택하지 않은 것”이라고 말했다.
“미조직 노동자들과 정체성부터 다시 세워야”
지난달 29일 비상대책위원회가 출범한 이후 정의당 지도부에선 ‘재창당 수준의 혁신이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됐다. 당명과 강령부터 공직 후보 선출, 지역위원회 활동, 의사결정 구조, 지도부 구성방식에 이르기까지 모든 의제를 올려 뒤바꿀 ‘결의’를 보여줘야 한다는 주문이 나온다. 2세대 진보정치인 대부분은 “원론적인 정의당의 정체성”(이보라미)부터 다시 세워야 한다는 데 의견을 함께 했다. 권수정 전 후보는 “정의당은 지구를 파괴하는 자본주의, 극심한 불평등을 만드는 자본주의에 대해서 문제제기하고 넘어서는 태도를 보여야 한다”고 말했다. 정재민 위원장은 “자본주의에서 발생하는 불평등, 기후위기, 승자독식 능력주의, 여성과 장애인 등 소수자를 향한 혐오, 그런 것들을 근본적으로 극복하는 게 진보정당의 정의”라며 “기득권 양당의 폐해를 극복하고자 하는 세력들을 다 모아서 생태적, 평화적, 민주적 가치를 지향하는 제3의 정당을 구성해야 한다”고 말했다.
‘누구’를 대변할 것인지는 정체성을 다시 세울 때 핵심적인 문제다. 이기중 전 의원은 “사회주의에서 사민주의까지 갔지만 사민주의도 한계가 보이고 새로운 체제는 나오지 않고 있다. 이럴 땐 답이 없다. 우리가 대변하고자 하는 사람이 누구인지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조직되지 않은 노동자, 정치에 실망하고 냉소를 느끼는 무당층”에 효능감을 주는 게 최우선이라고 덧붙였다. 조성주 전 부의장은 지난 대선 막바지에 진행한 ‘지워진 사람들’ 캠페인에 단초가 있다고 했다. 대선 당시 심상정 후보는 기득권 양당이 대변하지 않는 이들의 목소리를 대변하기 위해 고시원에 사는 청년, 중년의 여성노동자 등을 찾아다녔다. 조 전 부의장은 “5060 여성노동자, 조직되지 않은 프리랜서·플랫폼 노동자 등 이중 노동시장 구조에서 시민들의 삶을 보호하는 현대화된 복지 프로그램을 만들어야 한다”고 짚었다.
2세대 진보정치인들은 정의당이 다시 사회적 약자들에게 뿌리내리려면 ‘지역’과 ‘현장’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정체성을 세우는 일도, 누구를 대변할지 고민하는 일도 ‘현장’에 답이 있다는 것이다. 김희서 비대위원은 “예전엔 블루칼라 노동자는 민주당과 정의당이 함께 해야 할 사람들이었지만 지금은 플랫폼 노동자 등 블루칼라의 노동여건도 많이 나뉘었다. 현장에서 민감하게 듣고 조직하는 활동이 전제돼야 그들의 요구에 기민하게 대처할 텐데 현장과 단절돼있어 정체성도 흔들린 것”이라고 말했다. 김윤기 전 부대표는 “비례대표 당선 중심으로 전략을 짜다보니 정의당에게 지역은 선거 동원의 수단으로 전락했다. 거대양당의 개발주의에 찌든 지역정치에서 다른 목소리와 대안을 내주며 지역 중심의 집권전략을 다시 짜야 한다”고 짚었다. 오김현주 위원장도 “이재명도 지방자치를 통해 성장한 정치인이 아닌가. 비례대표 국회의원만 배출하려 할 게 아니라 기초단체장을 배출해 ‘진보정당이 집권하면 내 삶이 어떻게 달라질 것인가’를 보여줘야 한다”고 말했다.
“녹색·젠더·노동…하나라도 땅에 묻으면 다음 비전 없어”
젠더와 환경 등 새로운 의제들을 어떻게 끌어안을지는 새로운 숙제다. 정의당에선 당의 위기 원인을 ‘페미니즘 탓’으로 돌리는 백래시도 나오고 있어서다. 조성주 전 부의장은 “녹색과 젠더, 노동은 진보정당이 가장 중심에 두고 실력을 발휘해야 하는 곳”이라며 “땅에 묻으면 다음 비전은 없다”고 했다.
다만 대중적 진보정당으로서 ‘정체성 정치에 함몰되지 않는 섬세한 전략’도 요구되고 있다. 오김현주 위원장은 “페미니스트 아닌 진보는 있을 수 없고, 중요한 것은 젠더와 녹색을 노동과 어떤 방식으로 조화시킬 것인가의 문제”라며 “‘페미정당’이라는 비판은 대중들에게 설득력있게 입장을 전하지 못하고 섣불리 주장만 했기 때문에 돌아온 것”이라고 말했다. 이보라미 전 의원도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말할 게 아니라 대중들이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방법을 고민하지 못한 게 우리 당의 문제”라며 “노회찬 의원이 ‘불판론’으로 대중의 마음을 움직였던 것처럼 원칙만 주장하기보단 대중의 눈높이에 맞게 녹여내는 언어로 활동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조윤영 기자 jyy@hani.co.kr 임재우 기자 abbad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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