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만원 식사' 상향 개정안 표류 중..외식업계 "망하고 통과되나"
法시행후 외식물가 20% 올라
식당가 "2만원대 김영란 세트
고물가에 원가 맞추기 불가능"
5만~6만원 상향 개정안 계류
정부 "신중하게 검토" 미온적
물가연동제 도입 제언과 함께
사문화된 법 폐지 검토 의견도
◆ 현실 외면하는 청탁금지법 ◆
공공기관이 밀집한 서울 종로구에서 한정식집을 운영하는 김 모씨는 2만8000원짜리 '김영란법(청탁금지법)' 메뉴를 유지하고 있지만 사실 이 메뉴를 주문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털어놓는다. 그는 " '김영란 세트' 메뉴에 맞추려면 결국 음식 가짓수를 빼거나 음식의 양을 적게 할 수밖에 없다"며 "식사가 부실하니 손님들도 불만이 많다"고 덧붙였다. 그렇다고 메뉴를 아예 없애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공공기관 손님들이 썰물 빠지듯 사라질 수도 있어서 유지만 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영란법을 지켜야 하는 공직자들도 어려움을 호소한다. "업무의 연장선에서 이뤄지는 식사자리에서 밥 한끼 계산하려고 해도 '김영란법'에 맞출 수가 없어요. 그런 메뉴를 유지하는 식당을 찾기가 힘듭니다. 저녁 식사는 아예 못하고 있지요." 한 공무원의 말이다.
외식물가 고공행진이 계속되면서 1인당 3만원으로 제한된 김영란법 식사비의 기준을 상향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업무 수행 과정에서 드는 식사비 상한액이 현실과 맞지 않아 결국 잠재적 범죄자를 만들고 있다는 지적이다. 일각에선 "요즘 누가 김영란법을 지켜가면서 밥을 먹나"라는 푸념 속에 법 자체가 사실상 사문화됐다는 의견도 있어 법을 현실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 일명 김영란법은 공직자·언론인·학교법인 직원들이 업무상 부정한 청탁을 받거나 금품을 받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김영란법 핵심 내용 중 하나는 공직자 등이 제공받는 식사비 가액을 3만원으로 제한한 것인데, 문제는 법 시행 후 6년이 지나며 현실 물가는 눈에 띄게 올랐지만 상한액 규정은 요지부동인 점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달 외식물가 상승률은 전년 동월 대비 8.0%를 기록했다. 올해 상반기로 범위를 넓히면 외식물가는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6.7%나 올랐다. 1998년 외환위기 이후 가장 많이 오른 수치다.
사실 '식사비 3만원'이란 기준은 김영란법 도입 당시 공무원 행동강령에서 수수를 금지한 음식물 가액 기준을 그대로 차용한 수치다. 공무원 행동강령은 2003년 제정된 후 19년이나 지났다. 그동안 소비자 물가지수는 55%나 상승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공직자들을 주 고객층으로 삼고 있는 식당들은 난감하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서 외식업계도 규정 변경을 강력히 주장하고 있다. 한국외식산업협회 등은 앞서 윤석열 대통령의 당선인 시절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 김영란법 가액 조정을 요청하는 의견서를 제출하기도 했다.
여의도 정가에서도 외식물가 상승으로 법의 실효성이 상실됐다는 판단에 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한 상태다. 국회 한 관계자는 "김영란법 도입 초기에는 여의도나 정부 청사 근처에 2만9900원짜리 김영란세트들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런 메뉴들을 찾아보기 어렵다"며 "어차피 지키기 힘든 기준이고 물가가 오른 상황에서는 더더욱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물가 상승을 반영한 김영란법 개정안은 반년 넘게 국회에 계류 중이다. 지난 1월 김병욱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김영란법상 음식물 가액을 3만원에서 5만원으로 상향하는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김 의원은 당시 기자회견에서 "청탁금지법 취지를 살리면서도 2003년부터 20년 묶여 있는 음식물 가액을 현실화하고 코로나19로 인한 자영업자들의 어려움을 해소해 내수경제를 활성화해야 한다"고 발의 취지를 밝혔다.
지난 4월에는 박완주 민주당 의원이 가액한도를 3만원에서 6만원으로 조정하는 개정안을 발의한 바 있다. 그는 제안 이유에서 코로나19 확산으로 어려움을 겪는 외식업 종사자 피해를 해소하기 위해 소비를 촉진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정부는 국민 여론을 우선 지켜보겠다는 입장이다. 국민권익위원회 관계자는 "가액 변동은 신중하게 검토하겠다는 입장이며, 이미 법안이 발의된 이상 정부 입법 등은 고려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식사비뿐만이 아니다. 김영란법상 공직자 등이 받을 수 있는 경조사비 한도가 5만원으로 제한된 것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소리도 여기저기서 들린다. 한 고위공직자는 "친구 자녀 결혼이나 부모상에 5만원을 부조할 수 있겠나. 요즘은 통상 최소 10만원은 넣고 온다"며 "이미 유명무실한 기준을 그대로 두는 것은 결국 모든 사람을 잠재적 범죄자로 만드는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음식물·선물·경조사비 등의 상한액을 물가에 연동하는 해법도 나왔다. 문제가 제기될 때마다 입법을 통해 바꾸는 것이 아니라 물가를 반영한 뒤 상한액을 조절하는 현실적인 대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사실상 사문화된 법안이므로 폐지를 검토해봐야 한다는 목소리도 각계에서 흘러나오고 있다.
[류영욱 기자 / 박제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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