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연대 없었다면 '공수처 사찰 논란' 파헤칠 수 없었다
10년 넘게 소송 제기한 통신자료 제도 개선의 '공로자들'
'통신사 열람제도'마련, 포털 통신자료 제공중단 등 성과
[미디어오늘 금준경 기자]
2010년 한 누리꾼이 온라인 게시판에 천안함 사건 관련 의혹글을 올렸다가 경찰의 수사를 받았다. 그는 경찰이 어떻게 자신의 정보를 알았는지 의구심이 들었다. 알고 보니 인터넷 사이트 업체가 경찰에 신상 정보를 넘긴 것이었다. 근거는 '수사기관의 요청이 있으면 통신자료를 제공할 수 있다'는 법 조항이었다. 2010년 참여연대와 이 누리꾼은 헌법소원을 제기했다.
“정보 주체의 개인정보 자기결정권을 침해한다.” 헌법재판소가 지난 21일 영장 없이 통신자료를 수집하는 행위는 합헌이지만 당사자에게 통보를 하지 않는 건 헌법불합치라고 판단했다. 2016년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과 참여연대, 진보네트워크센터 등이 제기한 두 번째 헌법소원의 결과다. 앞서 2010년 사건 당시 헌재는 “권력의 기본권 침해라고 보기 어렵다”며 '각하'했다. 헌법불합치 결정이 나오기까지 12년이 걸린 셈이다. 통신자료는 이름, ID, 주민등록번호, 이메일주소, 핸드폰 번호 등의 이용자 정보를 말한다.
공수처 논란이 계기? 시민과 시민사회가 이뤄낸 결실
보수 언론사들은 헌재 결정을 다루며 지난해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가 고발사주 사건을 수사하면서 기자, 국회의원 등을 상대로 통신자료 조회를 해 불거진 사찰 논란을 집중적으로 거론했다. 중앙일보가 사설에서 “지난해 공수처가 과도하게 통신자료를 들여다보면서 본격적으로 논란이 됐다”고 언급한 식이다.
그러나 통신자료 문제 공론화와 제도 개선의 과정을 돌아보면 공권력의 과도한 집행과 이에 순응한 사업자의 부당함을 지적해온 시민과 시민사회의 '공로'가 절대적이다. 포털, 통신3사, 수사기관, 국가 등을 상대로 한 소송과 헌법소원 등을 제기하면서 조금씩 변화를 만들어냈다.
이지은 참여연대 공익법센터 선임간사는 “처음 시작은 2008년이었다”고 떠올렸다. 이명박 정부 들어 촛불집회에 대한 과도한 대응, 미네르바 사건 등으로 온라인 공간의 표현의 자유 억압 문제가 잇따랐다. 참여연대가 관심을 갖고 대응하던 중 인터넷 사업자가 이용자들의 정보를 수사기관에 제공한 사실을 알게 됐다고 한다. 참여연대에 제보를 해온 피해 시민과 함께 논의하며 대응 방안을 마련했고, 포털 사업자에 대한 법적 대응과 위헌 소송을 제기한다.
2012년 8월 헌재는 통신자료 제공이 정당하다며 '각하'했지만 소득이 없었던 건 아니다. 당시 헌재는 “전기통신사업자는 수사관서의 장의 요청이 있더라도 이에 응하지 아니할 수 있고, 이 경우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아니한다”고 밝혔다. 포털이나 통신사 등 사업자들이 수사기관의 통신자료 제공 요청에 반드시 따를 필요는 없다는 판단을 내린 것이다.
이 판단에 더해 참여연대와 차아무개씨가 NHN(현재 네이버)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은 네이버 정책을 바꾸는 계기가 된다. 차씨는 2010년 유인촌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김연아 선수를 껴안으려다 거부당한 것처럼 편집한 '회피연아' 영상을 네이버 카페에 올렸다가 유 전 장관으로부터 고소당했다. 차아무개씨는 자신의 인적사항을 경찰에 제공한 NHN을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2012년 10월 항소심 재판부가 “NHN 책임이 인정된다”고 판결한 일을 계기로 네이버 등 포털이 수사기관에 통신자료 제공을 중단했다. 판결 이후 현재까지 9년 간 네이버가 수사기관에 제공한 통신자료는 '0건'이다. 네이버가 전향적인 판단을 한 면도 있지만 시민사회의 대응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조치였다.
이용자가 통신사 사이트에 접속해 수사기관 통신자료 제공 내역을 열람할 수 있는 제도도 참여연대 등 시민사회의 소송이 만든 결과였다.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들은 2014년 통신3사가 수사기관에 무분별하게 통신자료를 제공한다며 정보공개·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항소심 재판부는 통신자료 제공 내역을 통지하지 않은 점을 문제로 판단했고, 이를 계기로 통신3사는 이용자가 통신자료 제공내역을 조회할 수 있도록 제도를 개선했다.
이지은 간사는 “제도가 바뀌었지만 처음에는 조회내역을 통신사가 운영하는 직영점에서만 발급 받도록 했다”며 “이후 정보통신망법상 개인정보의 열람·제공은 개인정보 수집방법보다 쉽게 해야 한다는 규정이 있다는 걸 알게 돼 방통위에 진정을 넣는 등 대응을 해 온라인 발급이 가능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여기에는 참여연대와 오픈넷이 주도적 역할을 했다.
이후 지속적으로 통신자료 수집 문제가 사회적 논란이 될 수 있었던 건 통신3사 대상 소송의 성과라고 할 수 있다. 박근혜 정부가 민중총궐기, 세월호 참사를 전후로 기자, 시민사회 인사들의 통신자료를 조회한 사실은 당사자들이 열람을 통해 알아낼 수 있었다. 전과 달리 직접 수사 대상자가 아닌 이들의 통신자료 제공 현황이 수면 위로 드러나게 된 것이다. 지난해 공수처의 사찰 논란 당시 언론인과 현 여권 인사들에 대한 통신자료 조회 사실을 파악할 수 있었던 이유도 같다.
시민사회가 정교하게 대응한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2010년 헌재가 각하했음에도 2016년 민변과 참여연대, 진보네트워크센터 등이 다시 헌법소원을 제기했다. 같은 사안에 재판단을 요구한 게 아니라 전과 달리 '수사 당사자'가 아닌 '일반 시민'에 대한 광범위한 통신자료 수집 문제를 새롭게 부각했다.
'진전'이지만 환영하기는 힘든 헌재 결정
소송을 주도해온 시민단체들은 이를 '진전'으로 받아들이면서도 선뜻 '환영'은 하지 못하고 있다. 소송에 참여한 시민단체들은 21일 논평을 통해 다음과 같이 밝혔다.
“통신자료 제공제도가 헌법에 위배된다는 점을 최초로 확인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그러나 (중략) 남용적 통신자료 수집으로 발생하는 정보주체의 기본권 침해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못했다는 한계가 있다.”
헌재는 '사후 통지제도'가 없다는 점을 지적하며 사후통지 제도 마련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냈다. 정작 통신자료 제공 자체는 합헌이라고 판단했다. 이들 단체는 '사후통지'만을 보강하게 한 건 본질적이지 않다고 본다. 헌재 결정에 따라 법을 보완해도 사전에 통제와 감시가 이뤄질 수 없기 때문이다.
시민단체들은 '영장 없는 통신자료 제공' 자체가 문제라는 입장이다. 시민단체만의 주장은 아니다. 국가인권위원회는 2014년 수사기관이 가입자 정보를 법원의 통제없이 수집할 수 있는 근거가 된 관련 조항 삭제를 권고했다. 2015년 UN자유권위원회 역시 한국 정부에 통신자료수집을 위해 영장제시를 하도록 하고, 사후 통지의무화를 권고한 바 있다.
헌재 판단 전에 국회가 법 개정을 할 수 있었음에도 정치권이 정쟁으로만 다룬 문제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오병일 진보네트워크센터 대표는 지난 1월 미디어오늘과 인터뷰에서 “이전 정부 땐 민주당에서 사찰이라고 이야기했는데, 지금은 국민의힘이 그러고 있다”며 “기자와 정치인뿐 아니라 모든 사람이 통신자료조회 대상자로 연 300만~500만건 가량의 조회가 이뤄지고 있다. 진정 사찰이라고 생각한다면 통신자료 제도를 진작 개선했어야 한다. '근본적인 권리 구제'에 관심이 없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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