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플레 고통 우리만 감내".. 지구촌 노동계 '분노의 여름' [심층기획]

이지민 2022. 7. 24.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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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경제 '고물가' 후폭풍
글로벌 인플레 속 노동계 심상찮아
英, 소비자물가지수 40년 만에 최고
철도·통신 등 파업 돌입했거나 예고
美도 화물철도 노조 등 반발 확산세
타협 실패 땐 9월 중순 파업 현실화
중남미선 파업 넘어 반정부 시위로
정부선 과도한 임금 인상 자제 당부
"인플레 소용돌이 재현" 경고 목소리
파업 장기화 땐 글로벌 경제 직격탄

“우리 경제의 어려움을 고려해 경영계에서는 과도한 임금 인상을 자제해 달라.”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지난달 28일 한국경영자총협회와 만나 임금발(發) 인플레이션을 우려하며 한 이 말에 노동계는 분노를 표했다. 물가가 오르는 고통을 그대로 감내하라는 소리냐는 아우성이 터져 나왔다.
유가 인하를 요구하는 파나마 노동자들이 지난 18일(현지시간) 수도 파나마시티 고속도로를 점거한 채 SUNTARCS(전국건설·유사노동조합) 깃발을 들고 시위하고 있다. 노조 측은 이날 정부와의 협상이 결렬돼 2주 넘게 진행된 도로 봉쇄를 계속한다고 선언했다. 파나마시티=AFP연합뉴스
정부가 임금 인상 자제를 촉구하고 노동계가 반발하는 모습은 한국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비슷한 시기, 똑같은 모습이 영국에서도 나타났다.

지난달 18일(현지시간) 사이먼 클라크 당시 재무부 장관은 BBC와 인터뷰에서 노동자들이 물가 상승과 맞물려 임금 인상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그런 식의 임금 인상은 1970년대식 인플레이션 스파이럴(소용돌이)에 빠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노동계는 즉각 반발했다. 영국 3대 노조인 유나이트의 샤론 그레이엄 사무총장은 임금 인상을 요구하면 안 된다는 정부 주장에 대해 “완전히 잘못된 것인 동시에 혐오스럽기까지 하다”고 일갈했다. 이어 노동자는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생활비 앙등으로 ‘불만의 여름(Summer of Discontent)’을 보내고 있다며 사용자 측이 공정한 임금을 지급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레이엄 사무총장 말처럼 세계적으로 노동자들은 ‘불만의 여름’을 넘어 ‘분노의 여름’을 보내는 모습이다.

글로벌 인플레이션 사태 속에서 노동계 하투(夏鬪·여름철 투쟁) 분위기가 심상찮다. 임금 인상을 요구하는 노동자들은 선택의 여지가 없다며 파업에 나서고 있다. 지구촌 곳곳에서 철도, 화물, 통신 등 공공부문이 마비되고 있으며, 중남미에선 노동자 항의가 파업을 넘어 반정부 시위로 확대되고 있다.
지난달 소비자물가지수(CPI)가 40년 만에 최고를 기록한 영국에서는 철도, 통신, 국선변호사, 우체국 직원 등이 파업에 돌입했거나 예고한 상태다.

BBC에 따르면 조합원 약 550만명이 소속된 영국노동조합총회(TUC)는 공공부문 노동자에 대한 적절한 임금 인상과 최저임금 15파운드(약 2만3500원) 달성을 전면 요구하고 있다. 영국은 법정 시간당 최저임금이 연령별로 다른데 지난 4월부터 올해 인상분이 반영돼 23세 이상은 9.5파운드(1만5000원)를 적용받는다. 정부는 일단 국민보건서비스(NHS) 의료진 4.5%, 교사 최소 5%의 임금 인상을 통해 달래기에 들어갔다. 20년 만의 최대 인상 폭이지만 노조는 올해 물가상승률 전망치 11%엔 턱없이 부족한 수준이라는 입장이다.

영국 철도시설공단인 네트워크레일과 13개 철도회사 소속 철도해운노조(RMT) 노조원 약 4만명은 지난달 33년 만에 최대 규모 파업에 돌입했다. 인플레이션을 반영해 임금 7% 인상을 요구하는 노조와 5% 이상 인상안을 제시한 사용자 측의 입장이 팽팽하게 맞서 협상은 교착 상태다. RMT 노조는 27일과 내달 18, 20일 추가 파업을 예고했다. 파업이 연말까지 이어질 수 있다는 경고도 했다.
지난 6월 30일(현지시간) 영국 런던 워털루 역 출입구가 폐쇄된 모습. 당시 영국 철도노조는 최대 규모의 철도 파업을 앞두고 있었다. EPA연합뉴스
통신업체 브리티시텔레콤(BT) 노조도 30년 만에 전국적인 파업에 들어간다. 노조원 3만여명은 임금 9.1% 인상을 요구하며 29일, 내달 1일 파업을 예고했다.

유럽 항공·공항업계 파업은 휴가시즌과 맞물려 교통대란을 일으켰다.

스페인에 본사가 있는 라이언에어, 이지젯 등의 승무원이 이달 파업에 나섰고, 프랑스 파리 샤를드골공항 직원도 임금 인상을 요구하며 지난 1일부터 14일간 파업했다. 영국 런던,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독일 프랑크푸르트 등 주요 공항에서는 항공기 수천 편이 결항했다. 이탈리아 로마 레오나르도다빈치 국제공항에서는 17일 항공 관제사와 저비용항공사 파업이 겹쳐 항공편 500여편이 결항·지연됐다.

미국도 마찬가지다. 11만2000여명이 가입한 화물철도 노조는 앞서 지난 18일부터 파업에 돌입하겠다고 으름장을 놨다. 정부가 15일 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해 노사 협상에 개입하면서 당장 파업은 막은 상황이다. 비대위는 양측 의견을 수렴해 30일 이내 권고안을 내야하는데 시한을 한번 연장할 수 있다. 타협에 실패하면 60일 뒤인 9월 중순 파업이 현실화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덴마크 코펜하겐국제공항 계류장에서 지난 18일(현지 시간) 조종사 파업으로 발이 묶인 스칸디나비아항공(SAS) 여객기들이 줄지어 있다. 임금인상 등을 요구한 조종사 노조 측과 회사 측이 19일 협상을 타결하면서 보름 동안 항공편 절반의 결항을 가져온 파업이 종료됐다. 코펜하겐=AP연합뉴스 
미국 최대 철도회사 유니언퍼시픽에 따르면 2020년 기준 미국 화물 운송에서 철도가 차지하는 비율은 28%로 집계됐다. 여기에 코로나19로 트럭 운전사가 부족해져 업체들은 철도 운송 의존도를 높였다. 비영리기관 ‘일과 정의’ 에리카 스마일리 전무는 “철도 분야에서 대규모의 파업을 마지막으로 본 것은 1990년대 초반”이라고 했다.

화물철도 파업이 일어나면 제조업체 등 관련 산업의 물류비가 올라 소비자에게까지 비용부담이 전가될 수 있다.

아르헨티나, 에콰도르, 페루, 파나마 등 중남미에서는 공공부문의 임금인상 요구가 반정부 시위로 확산돼 사회불안으로 이어졌다. 파나마 수도 파나마시티에서는 이달 초 교사노조가 먼저 파업 시위를 시작했다. 이후 원주민 단체와 시민의 연료가격 인하요구 시위로 번져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다.

고물가에 항의하는 파업과 시위가 쉽게 잦아들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국제구호단체 옥스팜의 매트 그레인저 정책 담당자는 “팬데믹(대유행)으로 불평등이 심화해 그 후유증이 이제야 나타나고 있다”며 “우리는 이제 점점 더 많은 시위를 보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탈리아 로마 레오나르도다빈치 국제공항에서 승객들이 지난 17일(현지시간) 붉은색 취소 표시가 뜬 전광판을 바라보고 있다. 이날 저비용항공사 직원과 공항 관제사들이 4시간 동안 파업에 들어가 공항에서는 항공기 500여편이 결항하거나 지연됐다. 로마=AP연합뉴스
◆인력난 심화에… 커지는 美 노동자 목소리

미국에서 노조 결성(unionisation) 열풍이 불고 있다. 1971년 창사 후 50년간 노조 무풍지대였던 스타벅스에서 지난해 12월 노조가 결성된 뒤 지난 4월 아마존, 지난달 애플에서도 줄줄이 노조가 설립됐다.

노조 설립 움직임이 활발해진 배경으로는 우선 코로나19 이후 노동시장의 특성이 꼽힌다. 일손 부족 현상이 심화해 노조 결성에 유리한 지형이 만들어졌다는 의미다. 비영리기관 ‘일과 정의’의 에리카 스마일리 전무는 “일손 부족 현상은 전국의 노동자에게 고용자를 압박할 용기를 줬고, 이 용기가 스타벅스와 아마존에서 전례 없는 노조 결성으로 이어졌다”고 설명했다.

조 바이든 정부의 친(親)노동 성향도 한몫한다.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해 1월20일 임기 첫날 노조가 있는 일자리 창출을 행정부의 우선순위 중 하나로 정한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미국 노동관계위원회(NLRB) 법무자문위원장이자 바이든 정부의 노동 분야 주요 참모인 제니퍼 아브루초는 최근 “바이든 정부는 스타벅스, 애플, 아마존 등에 부는 노조 가입 열풍을 지지한다”고 했다.
노조 설립 착수를 위한 움직임도 급증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사측이 자발적으로 노조 설립을 인정하지 않을 경우 30% 이상의 노동자가 노조 설립에 찬성한다는 청원(petition)을 NLRB에 제출한 뒤 노조 설립을 위한 투표를 진행할 수 있다.

지난 12일(현지시간)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NLRB에 청원을 제출한 작업장이 올 상반기에만 1411곳으로 집계됐다. 이는 전년 동기 대비 69% 늘어난 규모이자 2015년 이후 최다다. 청원을 낸 1411곳 중 노동자 수가 2만1000곳 이상인 400개 사업장은 이미 투표를 통해 노조 설립안을 가결했다. 지난해 갤럽 여론조사에 따르면 미국인 68%가 노조에 찬성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1965년(71%) 이후 가장 높은 수치다.

이런 흐름에도 미국의 노조 조직률은 지난 수십 년간 가파르게 하락해 역사적으로 보면 여전히 낮은 수준이다. 미국 조지아주립대 연구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미국 노동자의 약 10.3%가 노조원으로 집계됐다. 이는 1964년 29.3% 대비 19%포인트 감소한 것이다.

이지민 기자 aaaa3469@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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