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게 함부로 못 먹겠다 해녀 숨비 소리 들려서
개업한 후배 술집에 갔더니 안주 하나를 슬쩍 내놓았다. 성게다. 속초 어딘가에서 해녀가 땄다고 한다. 나는 성게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옆자리 친구가 다 먹었다.
“살살 녹는다, 야.” 일식집 요리사들은 성게 구하느라 녹는다. 국산 성게가 모자라기도 하고, 초밥 쥐기에 적당하지 않은 모양이 많아서 수입도 많이 쓴다. 저 추운 홋카이도 성게를 최고로 치는 요리사도 있다. 이른바 ‘헤비급 오마카세’라는 게 있다. 값도 비싸고 온갖 진미를 실력껏 내는 집을 말하는데, 이런 집일수록 계절 불문하고 성게가 빠지면 안 된다. 성게는 말하자면, 한국 고급 미식의 최고급 재료라 할 수 있다. 내가 시칠리아 앞바다에서 일할 때 해변에 깔린 놈들을 우연히 발견했다. 이런 횡재가! 열심히 줍자 주인이 일갈했다.
“그거, 까다가는 다른 일을 못한다. 버려라.”
성게알은 알이면서 알이 아니다. 성게알이라고 불려도 되지만, 틀리기도 하다. 성게의 생식소인데, 암놈이 알을 배면 또 생식소가 알 그 자체다. 그러니 성게알이 틀린 말이네 어쩌네 할 필요도 없다. 생각해보면, 성게는 무서운 번식 의지가 있는 생물이다. 물고기처럼 헤엄도 못 치지, 빨리 움직일 수도 없지 그러니 알을 잔뜩 품기로 작정한 것 같다. 오냐, 날 잡아 먹어라. 대신 많이 낳으리라. 이런 걸 진화라고 하는 것인지. 그래서 보라성게 같은 놈들이 많으면 바다 어장이 황폐화되는 징후라고도 본다. 해조 같은 걸 다 먹어치워 놈들만 남은 셈이니까. 성게알 작업은 심한 노동이다. 칼로 중간을 푹 찔러 배를 가른다. 두 쪽으로 벌어진 성게의 알을 조심스레 찻숟가락 같은 도구로 퍼낸다. 그게 다가 아니다. 성게도 생물이라 내장이 있다. 검고 쓸모없는 내장이며 막을 핀셋으로 집어내야 한다. 수백 마리를 까봐야 500g 한 통 채우기도 힘들다. 해녀들이 제일 싫어하는 작업이 성게다. 멍게며, 소라며, 전복은 따서 달면 그만인데 성게는 뒷작업이 많다. 허리를 부러뜨리는 일이다.
그렇게 작업장에서 허리를 구부리고, 해녀가 작업하는 모습을 보고 나면 그 보드랍고 고운 성게가 목에서 걸린다. ‘모르는 게 약’이라는 말이 여기서 나온 듯하다.
살아서 다행이라는 숨비 소리
가을에 말똥성게는 해변에 가서 줍는다. 물론 어촌계의 몫이고, 해녀의 일이다. 마을 해녀들이 다 나와서 일하는데, 이때는 실력이 남만 못한 하군 해녀들, 허리 아파 쉬던 해녀들, 심지어 인지장애가 온 노인 해녀들도 작업에 나온다. 그저 허리를 굽혀 줍기만 하면 수확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해녀들의 동지애는 무섭다.
평소 수입이 없던 해녀들에게 기꺼이 일을 주려는 거다. 이래서 또 누군가는 말똥성게를 못 먹는다. 그 뜨거운 마음이 걸려서 그럴 것이다.
해녀는 상군-중군-하군 해녀로 대충 나눈다. 실력순이다. 군대 계급처럼 이마에 붙이는 거는 아니어도 대충 그렇게 알고들 산다. 하군은 위로 올라가려고 기를 쓴다. 명예도 그렇지만 수입이 나아진다. 저 바다 몇 발 길이만 더 나아가도 사는 어종이 다르고 크기가 다르다. 상군의 실력으로 따면 씨알이 굵다. 숨이 안 되고 훈련이 모자라면 못 나간다. 맨숨으로 버텨야 하므로 흔히들 삶과 죽음이 한 팔 길이로 달라진다고 한다. 무리하면 큰일 난다.
언젠가 경상도 해안에서 팔자 좋은 바다 구경꾼이 되었다. 바다 보기에 좋은 곳이 우리나라 해안엔 널렸다. 구경하다가 배가 고프면 걱정을 말라. ‘북경’의 짜장면과 브랜드 통닭도 배달된다. 심지어 쟁반에 고이 받쳐서 커피며 율무차도 배달된다. 멀리서 해녀들이 작업을 한다. 오래 그 장면을 보다 보면 괴이한 소리를 듣게 된다. 제주 해녀들은 휘파람 불듯 ‘호오이 호이~’ 하고 들린다고 하는데, 경상도 해안에서는 그렇게 들리지 않았다.
“아아아! 으어어어, 어흐.” 내 귀에 들린 소리를 옮겨본 것이다. 처음엔 비명 소리인 줄 알았다. 어딘가 크게 다쳐서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뱉는 것처럼 들렸다. 이내 그것이 해녀가 참았던 숨을 터뜨리는 소리였다는 걸 알았다. 숨을 골라야 다시 자맥질을 해서 해산물을 따러 갈 수 있다. 해녀가 깊이, 고개를 젖히면서 숨을 들이마신다. 삶을 허파에 채우고 다시 들어간다. 내가 시인이라면 이렇게 쓸 것 같다.
숨비 소리, 살아서 다행이라는 소리 억장 안속에서 나는 소리 먹고사는 일이 엄중하다고 백수들 꾸짖는 소리 숨비 소리는 살아 있다는 소리 다시 바닷속으로 살러 가는 소리
내 밑의 동생뻘은 못 봤다. 해녀는 이제 최하가 예순 줄이다. 보통 예순 중후반, 칠십 초반이 제일 많다. 아마도, 해녀는 이제 사라질 것이다. 바다 보던 날, 어느 해녀가 장비를 챙겨 입수하면서 참으로 고른 건 토마토 한 알이었다. 빨간 토마토 한 알. 그것도 끝내 못 먹고 망사리(수확물 넣는 그물)랑 같이 들고 나오더라.
옛날 적삼 입고 추울 때 일할라치면 다들 탈진하고 얼어서 쓰러지곤 했다. 그때 늙은 해녀들이 장작을 피우고 국수를 끓였다. 미역 풀어 반죽 썰어 끓인 국수다. 그걸 깔때기국수라고 한다. 입맛 깔깔할 때 끓여먹던 거라 그리 불렀다고 하고, 입에 깔때기처럼 밀어 넣고 또 일하러 간다 해서 그리 불렀다고도 한다. 나도 한 젓가락 먹어본 적이 있다. 세상에 맛이 없었다. 그저 칼로리와 에너지와 염분으로 만든, 일종의 전투식량 같은. 바다 일은 전투니까, 수긍이 가는 맛이었달까.
해녀가 고무옷 입고 작업하는 건 어느 영상에선가 많이들 보았을 테다. 막 일을 마치고 옷을 갈아입은 해녀를 본 것은 우연한 일이었다. 말갛게 얼굴 씻고 앉아 있는 할매 해녀를 보니, 사람 사는 일이 얼마나 막막한지 느끼게 된다. 마지막 숨까지 뽑아서 바다에 던져 넣고 와서 사람이 반쯤 쪼그라든 것처럼 보인다. 아직 마르지 않은 머리카락을 털며 할매 해녀가 집에 찾아든 손님에게 밥상을 차린다. 그만두시라고 만류해도 주섬주섬, 어머니들이 그렇듯 뚝딱 밥상이 놓인다. ‘천초’라고 부르는 해조 무침이 맛있어서 기억해두었는데, 나중에 지워버리고 말았다.
“그 천초라는 게, 바다에 무성하게 자라면 작업하는 해녀 발을 붙들고 놔주지 않는다 합니다. 해녀들 중 천초 싫어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박찬일 (셰프)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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