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사범' 앞에만 서면 작아지는 윤석열 정부
“대부분의 대통령 후보들은 선거 때마다 기업 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겠다고 해놓고 막상 집권하면 많은 기업인을 범죄자 취급하거나 기를 많이 죽였다.”
‘친기업·친시장’을 표방한 윤석열 대통령이 대선후보 시절인 지난해 12월 9일 서울 마포구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 회관에서 열린 후보 초청 간담회에서 한 말이다. 대통령에 당선된 후 지난 3월 21일 경제 6단체와의 도시락 오찬회동에서는 “기업이 자유롭게 활동하는 것을 방해하는 요소들이 있다면 제거해 나가는 것이 정부가 해야 할 일”이라고 했다.
윤석열 정부가 ‘경제 형벌규정 완화’에 속도를 내고 있다. 기업인의 처벌 부담을 낮춰야 민간이 활력을 찾고 경제가 살아난다는 이유에서다. “기업인의 실수나 사소한 잘못에도 처벌이 너무 과해 경영활동이 위축되고 있다”는 재계의 주장과 일치한다. 한편에선 민간경제 활성화를 명분으로 한 ‘재벌특혜’이며, 윤 대통령이 강조한 공정과 상식에도 맞지 않다고 한다. 부자감세와 규제완화 등에 이어 ‘재벌중심의 성장정책’을 노골화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처벌 수위, 얼마나 낮출까
정부는 지난 7월 13일 ‘경제 형벌규정 개선 태스크포스(TF)’를 출범시켰다. 방기선 기획재정부 1차관과 이노공 법무부 차관이 공동 단장을 맡았다. 12개 부처와 민간 법률전문가들이 참여한다. 정부는 앞서 6월 16일 발표한 새 정부 경제정책 방향에서 기업인의 형벌규정을 완화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TF 출범은 이를 위한 본격적인 신호탄이다. TF 출범을 이틀 앞둔 7월 11일 추경호 부총리 겸 기재부 장관은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첫 업무보고에서 “기업에 대한 경제형벌을 행정제재로 전환하겠다. 민간 중심의 역동경제 실현을 위한 규제혁신의 하나로 기업의 투자와 활동을 저해하는 규제와 형벌 규정을 정비하려는 것”이라고 했다.
TF는 ‘규제와 형벌 규정의 정비’를 맡는다. ‘정비’ 대상은 공정경제 3법(상법·공정거래법 개정안, 금융그룹감독법 제정안)과 국제노동기구(ILO) 관련법, 중대재해처벌법 등이다. 모두 재계가 줄곧 ‘처벌 완화 대상’으로 지목한 것들이다. TF는 이날 배포한 자료에서 “문재인 정부에서 국회를 통과한 이 법들이 코로나19 위기와 맞물리면서 기업 경영 환경을 악화시키고 있다”고 했다. TF는 논의를 거쳐 ‘필요·최소한의 형벌인지’ 등을 따져 ‘경미한 법 위반 행위’는 전과기록이 남는 징역이나 벌금을 부과하는 대신 형벌 규정을 삭제하거나 이행강제금이나 명단공표, 과징금, 시정조치 등 행정제재로 대체할 계획이다. 기재부는 “기업 최고경영자(CEO)에게 형사벌을 주려고 하다 보니 (처벌의) 실효성이 없는 경우도 있는데 그런 부분까지 포함해 전수조사를 할 계획”(방기선 1차관)이다.
‘경미한 법 위반’의 대표적인 사례는 ‘행정조사 거부’다. 예컨대 공정위 현장조사 등 행정조사를 받는 대상이 위계, 폭행 등 불법행위 없이 단순히 조사를 거부할 경우엔 행정제재로 마무리하도록 법을 고친다. 현행 공정거래법은 폭언·폭행, 고의적인 현장 진입 저지·지연 등을 통해 조사를 거부·방해하거나 기피할 경우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2억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또 자료 은닉·폐기, 접근 거부, 위조·변조를 통해 조사를 거부·방해하거나 기피하면 2년 이하의 징역 또는 1억5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행위자와 기업을 동시에 처벌하는 양벌규정을 손보는 방안도 TF에서 논의될 것으로 보인다. 윤 대통령이 완화를 공약한 ‘중대재해처벌법 위반에 따른 형사처벌’ 역시 행정제재로 낮추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시행령을 개정해 경영책임자의 안전보건 확보 의무를 명확히 규정하고, 법 개정을 통해 경영책임자 처벌 수위를 낮추는 방식이다. 대기업 집단 규제 대상이 되는 동일인(총수)의 친족 범위도 축소할 것으로 보인다.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국정과제에서 예시한 대로 혈족의 범위를 현재 6촌에서 4촌으로, 인척 범위는 4촌에서 3촌으로 각각 바꾸는 방안이 유력하다.
TF는 이달부터 부처별 의견을 받아 초안 작업에 들어간 후 8월부터 실무회의 심의에 들어간다. 정부는 TF의 구체적인 안건이나 결과 도출 시기 등에서 아직 확정된 건 없다고 말한다. 한 정부 관계자는 “TF 출범 이후 몇몇 형벌 규정이 완화될 것이란 언론보도가 여럿 나왔지만 현재까지 어떤 규정을 어디까지 손볼지를 놓고 정해진 것은 없다. 일단 TF를 통해 각계의 의견을 최대한 수렴한 후 이해 관계자들이 참여하는 간담회 등을 열어 중지를 모아 최종안을 만들 계획”이라고 했다.
■공정거래법·중대재해처벌법 등 손볼 듯
재계에선 ‘한국은 기업인을 교도소 담장 위에 세우는 나라’라는 표현을 자주 쓴다. 기업인의 형사처벌 기준이 모호하고 수위가 과도하다는 의미다.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는 TF가 출범한 7월 13일 배포한 자료에서 “기업과 기업인에 대한 과잉·중복 처벌은 경영활동을 저해하는 원인 중 하나였다. 과도한 형사처벌은 기업가 정신 훼손, 기업 투자 감소, 일자리 창출 저해, 글로벌 경쟁력 약화 등의 부작용을 야기했다”고 했다.
특히 공정거래법, 중대재해처벌법, 외부감사법 등에 담긴 형사처벌 조항을 축소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전경련은 지난해 11월 8일 ‘16개 부처 소관 경제법률 형벌조항 전수조사 결과’ 자료에서 ‘과도한 형벌’의 예로 3가지를 언급했다. 외부감사법의 경우 회계업무 담당자가 거짓으로 재무제표를 작성한 사실이 드러나면 형사처벌을 받는데, 형법상 ‘직계존속에 대한 상해치사 형량’과 동일한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에 처해진다. 법 위반은 맞지만 사람이 죽은 것과 같은 수준의 처벌은 너무 과하다는 주장이다. 또 다른 예로는 올해 1월부터 시행된 중대재해처벌법을 들었다. 이 법은 상시 근로자 50인 이상 사업장에서 근로자 사망 등 중대산업재해가 발생하면 사고를 예방하기 위한 의무를 다하지 않은 사업주·경영책임자를 처벌할 수 있게 했다. 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아 중대산업재해에 이른 것으로 판명되면 기업의 최고경영자(CEO)는 1년 이상의 징역 또는 10억원 이하의 벌금을 물어야 한다. 전경련은 징역에 상한이 없고 징역과 벌금의 동시 부과가 가능한 점, 법 위반자와 법인을 동시에 처벌하는 양벌규정이 너무 과하다고 불만을 나타낸다. 공정거래위원회에 매년 제출하는 대기업집단 지정 자료를 허위로 제출했을 때 2년 이하 징역 또는 1억5000만원 이하 벌금을 부과하는 공정거래법 조항도 전경련은 과잉 처벌이라고 주장한다. 전경련은 그러면서 “경제부처 소관 법률 721개 중 경제법률 301개를 분석한 결과 형사처벌 항목이 6568개”라며 “이중 6044개(92%)는 법을 위반한 사람과 해당 기업을 동시에 처벌하는 내용이고, 2376개(36.2%)는 징역·과태료·과징금 등 여러 처벌과 행정제재가 중복돼 있다”고 밝혔다. 김병배 공정거래실천모임 대표는 “(대기업집단 지정 자료 제출 규정의 경우) 실무자들이 총수 일가의 친족 파악이나 우월적 지위 남용의 기준을 명확히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이러한 경제형벌 조항들이 수도 없이 많고 복잡해 의도치 않게 법을 위반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시민단체·노동계 “공정·상식과 배치”
시민단체와 노동계 등에서는 부작용을 우려한다. 참여연대는 지난 7월 18일 논평에서 “(정부가) 대기업의 민원을 수렴해 재벌총수의 경제범죄 봐주기 정책에 나선 것”이라고 했다. 김남근 참여연대 정책자문위원장은 “배임 등 재벌의 경제범죄는 교묘하고 정교하기 때문에 지금의 형사처벌 체계에서도 범죄를 입증하기 쉽지 않고, 개인 주주들이 피해를 구제받기 쉽지 않다”며 “그간 공정과 정의를 강조해온 윤석열 대통령이 재벌특혜라는 비판을 받지 않으려면 형벌규정을 완화하기 이전에 집단소송제와 징벌적 손해배상제 도입 등 피해자 구제책을 먼저 정비해야 한다”고 했다.
기업 경영하기 좋은 환경 조성을 명분으로 한 ‘규제완화’와 ‘부자감세’에 이어 ‘재벌특혜’ 논란까지 더해지면서 윤석열 정부의 경제정책에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하는 의견도 나온다. 이른바 재벌중심 성장정책에 대한 문제 제기다. 윤석열 정부가 누차 강조해온 민간 주도 경제성장의 핵심은 기업의 성장이다. 기업이 활력을 찾아야 지금의 경제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는 논리다. 과연 그럴까. 국회예산정책처의 ‘이명박(MB) 정부 감세정책에 따른 세수효과 및 귀착효과’(2014) 보고서를 보면, MB 정부는 2009년부터 2012년까지 약 4년간 총 26조7000억원에 달하는 법인세를 감면했으나, 이 기간 투자 규모(약 23조원)는 직전 4년간(2005~2008년)의 투자총액(약 33조5000억원)보다 약 10조원 이상 감소했다. 반면 당시 기업의 사내유보금은 2009년의 72조4000억원에서 2011년 165조3000억원으로 대폭 증가했다. 그 결과 세수만 감소했고, 박근혜 정부는 근로소득세의 소득공제를 세액공제로 전환하고 담배소비세와 주민세를 인상하는 등 서민증세를 단행했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은 7월 12일 성명에서 “지난 6월 발표된 윤석열 정부의 경제정책 방향은 재벌특혜·규제완화·부자감세로 요약된다”며 “이는 과거 MB 정부의 실패한 경제정책을 재탕한 것에 불과하다”고 했다. 이러한 재벌 중심의 경제정책에서 노동이 차지하는 비중은 크지 않다. 양경수 민주노총 위원장은 7월 12일 서울 정동 민주노총 사무실에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한국은 가파른 경제성장에 비해 사회안전망이 빈약해 정부의 더 많은 역할과 책임이 요구되지만, 정부는 긴축과 대기업 감세를 추진한다. 오로지 재벌 대기업 이익에만 골몰하는 정부 태도는 노동자·서민의 고통으로 귀결될 것”이라고 했다. 김남근 위원장도 “윤석열 정부의 대기업 중심의 성장정책은 이른바 ‘낙수효과론’이 근간인데, 국내외 연구분석 결과만 봐도 대기업들이 여유자금 대부분을 사내에 유보하면서 노동자들이나 협력업체와 공유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며 “경제위기 땐 대기업 중심 정책을 펼칠 게 아니라 어려움이 큰 중소기업의 신기술이나 신기업 개척, 소상공인 등에 대한 지원을 우선해야 한다”고 말했다.
안광호 기자 ahn7874@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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