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역사, 그 흔적을 따라 걷다/최영·한용운·김좌진 걸출한 위인들 나고 자란 곳/안회당 마루에 앉아 즐기는 비오는 여하정 ‘운치’/‘비운의 화가’ 이응노 생가엔 하얀 연꽃 활짝
뜨거운 여름 한낮 더위를 식히는 비 내린다. 300살 왕버들나무 가지를 드리운 여하정 연못에 잔잔한 파문을 만들며. 문이란 문은 모두 활짝 열고 안회당 마루에 앉았다. 세월의 흔적을 머금은 고택 서까래 사이로 솔솔 흘러드는 바람 따라 코끝으로 스치는 싱그러운 초록의 향기들. 연못엔 수줍은 붉은 연꽃까지 피어오르니 눈에 오래오래 담아도 못내 아쉬워 좀처럼 자리를 뜨기 힘들다.
#연꽃 향기 따라가는 홍주성 천년여행길
충남 홍성은 고려 시대에 ‘운주’로 불린 이후 천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고장이지만 여행지로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심지어 강원 횡성과 혼동할 정도로 낯설어하는 이가 많다. 그래도 청산리전투를 승리로 이끈 김좌진 장군, 만해 한용운 선생, 고려말 명장 최영 장군, 사육신 성삼문의 이름은 모르는 이가 많지 않다. 이처럼 걸출한 위인들이 나고 자란 곳이 홍성이다.
긴 역사와 많은 위인을 배출한 만큼 홍성에는 볼거리가 많다. ‘홍주성천년여행길’을 따라가면 된다. 모두 5개 코스로 장항선 홍성역∼고암근린공원∼김좌진장군동상을 연결하는 고암길에서 여행을 시작한다. 이어 장터길(홍성대장간∼홍성전통시장∼대교리)를 지나 매봉재길(홍주순교성지∼홍주의사총∼매봉재∼들꽃사랑방∼홍주향교∼대교공원)을 거친 뒤 홍주성길(홍주성길∼홍주성역사관∼홍주아문·안회당·여하정∼조양문)을 둘러보고 골목길의 명동거리와 오관리당간지주에서 마무리한다. 8km로 3~4시간 걸리는데 홍주성과 그 안에 자리 잡은 홍주아문, 안회당, 여하정은 꼭 가봐야 한다.
고려 말 공민왕은 자신의 왕사로 14년, 고려의 국사로 12년을 지낸 고려 후기 최고의 선종 승려, 태고 보우를 존경하는 의미로 그의 고향인 홍주를 홍주목으로 승격시킨다. 이중환의 ‘택리지’에는 “충청도에서는 내포 땅이 가장 좋다”라는 기록이 등장한다. 내포는 가야산을 중심으로 서산, 홍성, 당진, 예산의 10개 고을을 말하는데 넓고 기름진 평야를 끼고 있고 바다와 인접해 해상교통의 중심지로 번성했다. 이런 내포에서도 홍주는 목으로 승격되면서 중심도시로 역할을 했다.
옛 홍주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것이 홍성읍 아문길 홍주성 관아 자리. 현재 홍성군청 건물이 들어서 있는데 입구인 홍주아문(洪州衙門) 앞뒤로 거대한 느티나무 4그루가 여행자의 시선을 잡아끈다. 어른 2명이 팔을 쫙 펼쳐도 껴안기 힘들 정도로 엄청난 굵기의 몸통을 자랑하는 느티나무는 공민왕 때 심은 것으로 최소 수령 650년이 넘은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도 무성한 가지에서 햇볕을 모두 가릴 정도로 푸른 잎을 피워내니 대단한 생명력이다.
군청 건물 바로 앞의 암수 한 쌍의 느티나무는 신령스러운 나무로 알려져 있다. 고을에 액운이 감돌 때마다 우는 소리를 내어 미리 알려줬다고 한다. 이에 홍주에 부임하는 목사들은 가장 먼저 나무 아래에 제물을 차리고 고을의 무사평안을 기원하는 제를 올렸다. 홍주아문은 홍주성 관아의 외삼문으로 현판은 흥선대원군이 직접 써서 내려줬지만 친필 글씨는 한국전쟁 당시 사라지고 지금 현판은 중국인 글씨라니 매우 안타깝다.
#안회당에 앉아 비 오는 여하정을 즐기다
원래 홍주아문 안에는 내삼문과 행랑으로 쓰이던 열 칸 반 규모의 큰 건물이 있었다. 하지만 3·1 운동 때 홍성의 만세사건을 진압하려고 주둔한 일본군이 군수를 내쫓고 병영으로 사용하면서 내삼문을 헐어 버려 외삼문인 홍주아문만 덜렁 남았다. 경복궁 근정전 앞에 조선총독부를 세운 것처럼 일제가 이곳에서도 민족정기를 말살하려 한 흔적이다.
그래도 군청 건물 뒤로 돌아가면 운치 있는 풍경이 펼쳐진다. 안회당(安懷堂)과 여하정(余何亭) 덕분이다. 안회당은 홍주목사의 집무실. 1678년 8칸으로 지어졌다가 1870년 한응필 목사가 22칸으로 늘렸다. 안회당 끝에는 한 목사가 아침저녁으로 임금에게 네 번씩 절하던 4칸짜리 누각 ‘취은루(醉恩樓)’가 연결돼 있다. 안회당은 논어의 ‘노자안지(老者安之) 소자회지(少者懷之)’에서 인용했다. ‘노인을 평안히 모시고 아랫사람을 사랑한다’는 뜻이 담겼다.
갑자기 요란한 소나기가 쏟아져 황급히 안회당으로 들어섰다. 앞뒤로 문이 모두 활짝 열리며 바람길이 만들어져 에어컨을 틀어 놓은 것처럼 선선하다. 창문 앞은 커다란 배롱나무가 차지했고 넓은 초록 잔디 너머로 연못에 떠 있는 ‘수상 정자’ 여하정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여기에 정자 위를 거의 뒤덮은 커다란 300년 수령 왕버들나무와 붉은 연꽃까지. 처마를 두드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마루에 두 다리 쭉 펴고 앉아 세상에 둘도 없는 수채화를 눈에 오래, 가득 담아본다. 몇 송이 꽃을 피우기 시작한 배롱나무는 7월 말쯤이면 온통 자홍색으로 뒤덮일 테지. 농염한 자태를 뽐낼 테니 안회당과 여하정은 그때가 가장 예쁠 것 같다.
비 그치기를 기다려 홍주성으로 나선다. 우중충하던 하늘은 뭉게구름 피어오르는 청량한 파랑을 다시 찾았다. 홍주목을 둘러싼 홍주성은 나말여초에 토성으로 지었고 조선 초기 왜구를 막기 위해 석성으로 다시 쌓았다. 원래 1772m였지만 현재 남쪽 810m 성벽만 남았다. 남문인 홍화문 앞에는 선정을 베푼 홍주목사 5명의 선정비가 세워져 그들의 업적을 전한다. 조선 초기 억불숭유정책으로 사찰 건물과 탑을 부숴 관아의 성벽을 쌓는 데 사용했는데 다양한 문양이 새겨진 사찰부재들이 성벽 곳곳에서 발견된다. 성벽을 따라가는 성곽길에는 최영 장군 등 홍성을 대표하는 위인들의 흉상을 차례로 만난다.
동문인 조양문에는 1906년 홍주성 전투에서 항일의병이 일본군에 맞서 치열하게 싸운 흔적이 생생하게 남아있다. 일제는 서문과 북문을 파괴하고 조양문까지 없애려 했지만 읍민들의 강경한 반대로 겨우 보존됐고 1975년 문루를 해체 복원해 옛 모습을 찾았다. 홍주의사총은 홍주성 전투에서 희생된 수백명 의병의 유해를 모신 묘소로 매년 5월 30일 순국의사 추모제를 올린다. 홍주성역사관에선 의병활동과 천주교박해 등 고려시대 이전부터 일제강점기까지의 역사를 생생하게 만난다.
#‘비운의 화가’ 이응노 생가엔 연꽃 활짝 피었네
홍성의 문화예술을 대표하는 인물은 1904년 이곳에서 태어난 화가 고암 이응노. 21살이던 1924년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입선하면서 이름을 알렸다. 해방 후 새로 개설된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교수를 지낸 뒤 50대에 프랑스 파리로 건너간 이응노는 한국의 전통 서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을 선보여 유럽 예술계에서 큰 주목을 받았다. 특히 학교를 세우고 서구 젊은이들에게 동양 예술을 가르쳤는데 그가 남긴 작품 3만여점은 전통 서화부터 현대의 추상에 이르기까지 매우 폭넓고 다양하다. 하지만 작곡가 윤이상 등 예술인과 대학교수 등 194명이 간첩으로 몰린 ‘동백림 사건’에 연루돼 옥고를 치렀고 다시는 고국에 돌아오지 못한 채 1989년 프랑스 파리에서 생을 마친 비운의 인물이기도 하다.
홍북읍 중계리 홍천마을에 세운 이응노 기념관에 17살 나이에 고향을 떠나기 전까지 화가의 뜻을 품던 그의 생가가 잘 복원돼 있다. 그는 1940년대에 고향집 스케치를 여러 장 남겼을 정도로 고향을 다시 찾기를 꿈에도 그리워했단다. 그가 “수양버들이 늘어진 사이로 옛집의 기역자 모습이 보이고”라고 서술한 글들을 토대로 2010년 안채와 헛간 채를 기역자로 복원했다. 짚으로 이은 생가 툇마루에 앉자 삶을 예술로 불태웠지만 끝내 고향으로 오지 못한 그의 슬픔이 가슴 깊숙하게 밀려온다.
생가 앞에는 커다란 초록 연잎 위로 순백의 연꽃이 수줍게 피어오른 연지 공원이 드넓게 펼쳐진다. 이응노 기념관에서 가장 예쁜 곳으로 연인들이 이곳을 그냥 지나칠 리 없다. 연꽃 사이로 데크 길을 놓아 그 안으로 걸어 들어가면 사랑스러운 연인의 얼굴과 연꽃을 구분하기 힘들다. 전시관에는 20세기를 아프고도 치열하게 산 화가의 작품과 자료들이 놓였고 조용한 북카페에 앉아 커피 한잔 마시며 쉬어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