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로 멈춘 시간, 헤밍웨이가 사랑한 곳에 머물다

한겨레 2022. 7. 23.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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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 김남희의 걷다 보면][ESC] 김남희의 걷다 보면 : 스페인 론다·코르도바
스페인 론다에서 코로나 확진
집에 갈 수 없는 유목민 신세
헤밍웨이의 산책로를 거닐고
코르도바에선 안뜰 축제 여행
론다의 구시가지 노천카페에서 맥주를 마시는 독일 관광객들. 김남희 제공

론다에 들어서는 순간, 예감에 휩싸였다. 쉽게 이곳을 떠날 수 없을 거라는 예감이었다. 눈앞의 풍경이 순식간에 마음을 앗아갔다. 120m 높이의 가파른 협곡 위에 자리한 작은 도시는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그 너머로 올리브밭과 양들이 풀을 뜯는 초록의 들판이 이어졌다. 들판의 끝은 높은 산들이 메우고 있었다. 세월을 잊는 일까지는 무리라 해도 시름이나 설움 정도는 잊을 만한 풍경이었다.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의 하얀 마을 론다는 소설가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사랑한 곳이었다. 역마살 제대로 낀 헤밍웨이는 지구 곳곳에 흔적을 많이도 남겼지만 그중에서도 유럽이라면 단연 스페인이다. “신혼여행으로 혹은 연인과 함께 스페인에 간다면 론다에 가야 한다. 그곳은 마을 전체가 낭만적인 무대가 되어준다”고 그가 예찬했던 도시에 내가 서 있었다. 신혼여행은커녕, 연인도 없이 이번에도 혼자서.

파라도르 호텔 테라스에서 바라본 론다의 푸엔테 누에보 다리. 김남희 제공

사스·말라리아 그리고 코로나

나는 하룻밤 머물면서 협곡을 가로지르는 다리 ‘푸엔테 누에보’ 주변이나 거닐다가 떠날 예정이었다. 하지만 오래 머물게 될 것 같다는 예감이 적중했다. 론다에서 코로나 확진 판정을 받음으로써. 이로써 삼관왕이 되었다. 2003년 중국에서 사스, 2005년 탄자니아에서 말라리아, 2022년 스페인에서 코로나에 걸렸으니. 상금도 상장도 없는 ‘국외 질병 감염 삼관왕’을 달성한 셈이다. 집을 떠나 혼자 세상을 떠도는 일에는 언제나 약간의 위험이 따라오기에 나는 늘 각오가 되어 있었다. 다만, 내 나라에서 하루 30만명씩 확진자가 나오던 시기에도 잘 피했는데 스페인에서 걸리니 좀 억울했다. 바이러스도 서양 바이러스가 더 센 걸까. 코비드 시대의 여행자가 감수해야 하는 위험한 덫에 제대로 빠진 셈이다.

론다의 병원에서는 외출할 때 마스크를 벗지 말고, 손 소독을 자주 하라는 조언만 달랑 전했다. 내가 진단받기 몇주 전부터 스페인 정부는 코로나에 걸려도 증상이 가벼우면 출근하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했다. 덕분에 나는 호텔방에 갇혀 있지 않고 돌아다닐 수 있으니 운이 좋다고 해야 하나. 증상은 목이 따끔거리고 가래가 끓는 정도로 가벼웠다. 문제는 귀국이 불투명해졌다는 것. 내가 예약한 비행기는 코로나에 걸리면 무료 티켓 변경이 딱 한번 가능했다. 나는 마지막 남은 재산 전부를 걸고 판에 뛰어든 도박꾼처럼 절박한 심정이 되어 귀국일을 선택했다. 그때까지 음성을 받을 수 있도록 잘 먹고, 잘 쉬며, 잘 자는 걸 목표로 삼았다.

산타마리아라마요르 교회 종탑에서 바라본 론다의 들판. 김남희 제공

다음날부터 나는 론다를 어슬렁거렸다. 일단 푸엔테 누에보에서 시작하는 헤밍웨이가 즐겨 걸었다는 길부터 찾았다. 길에는 ‘파세오데헤밍웨이’(헤밍웨이의 산책로)라는 이름이 그의 얼굴과 함께 새겨져 있었다. 1793년에 완공된 푸엔테 누에보는 엘 타호 협곡과 과달레빈강으로 인해 분리되었던 구시가지와 신시가지를 연결했다. 다리 위에서 협곡을 내려다보면 아찔했다. 안전하게 협곡의 전망을 즐기기에는 다리 건너편에 있는 파라도르 호텔이 제격이었다. 테라스에서 카페 콘 레체(스페인식의 커피 맛이 진한 카페라테)를 마시며 앉아 있다 돌아오는 건 매일의 중요한 일과였다. 헤밍웨이는 전설적인 이 지역 투우사들의 삶을 자신의 소설 <위험한 여름>과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에 녹여내기도 했다. 나는 투우에 반대하는 쪽이지만, 헤밍웨이는 죽음이 임박했을지 모르는 순간에도 꺾이지 않는 투우사의 용기와 남성성에 사로잡혔다. 그러니 스페인 투우의 발상지로 불리는 론다의 투우장 앞에 그의 조각이 서 있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 마초 중의 마초, 상남자 중의 상남자. 언제나 피 끓는 모험을 갈구했던 그는 삶과 죽음의 경계를 위태롭게 오가며 살았다. 1·2차 세계대전은 물론 스페인 내전에도 참전해 죽음의 현장을 생생히 목격했다. 삶에 초연한 듯 보이지만 꼭 그런 건 아니었는지 자신의 소설을 팔거나 각색한 영화로 명성과 부를 제대로 누렸다. 돈 많고 재능 있는 남자답게 여성 편력도 화려했고. 론다에서 나는 헤밍웨이보다는 다른 남자에게 더 끌렸다. 헤밍웨이보다 11년 먼저 이 도시에서 겨울을 보냈던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곳에서라면 제대로 스페인적인 삶을 살 수도 있겠다’고 했지만 결국 도망치듯 론다를 떠난 남자였다. 병약하고 우울했던 릴케에게 안달루시아의 태양과 열정은 좀 버거웠던 걸까. 반면 헤밍웨이는 안달루시아 사람들처럼 삶의 기쁨과 절망을 온몸으로 속속들이 누리며 살다가 스스로 죽음의 세계로 건너가버렸다. 코로나로 이곳에 갇힌 나는 헤밍웨이보다는 평생 병마와 싸우며 청교도적인 삶을 살았던 릴케의 손을 잡고 싶었다.

코르도바의 안뜰 축제를 구경하는 관광객들. 김남희 제공

정원은 갇힌 자들이 만든 세계

닷새째가 되니 론다의 드라마틱한 풍경도 슬슬 지겨워졌다. 안달루시아 사람들이 ‘라시우다드소냐다’, 꿈같은 도시라고 부르는 론다를 떠나 코르도바로 향했다. 코르도바는 ‘페리아 데 파티오’가 한창이었다. 우리말로 하면 ‘안뜰 축제’. 안뜰 축제는 코르도바의 시민들이 자신의 안마당을 무료로 개방하는 축제였다. 안달루시아에는 아랍 문화의 영향이 짙게 남아 있는데 미음(ㅁ) 모양의 작은 마당 파티오도 그렇다. 별 기대 없이 줄 뒤에 늘어서 있다가 들어가 보니 영국식도 프랑스식도 아닌 안달루시아식의 화사한 정원이 기다리고 있었다. 일면식도 없는 남의 집 안마당을 훑어볼 일이 살면서 몇번이나 있을까. 게다가 나는 시간은 많고, 돈은 아껴야 하는 코비드 유목민 신세. 안마당을 무료로 열어준 코르도바 시민들께 그저 감사할 뿐이었다. 지도에 동그라미를 그려가며 하루에 열 집씩 찾아다녔다. 내가 에스엔에스(SNS)에 올린 안뜰 사진을 본 친구 지영씨가 물었다. “저 높은 벽에 매달린 화분들은 물을 어떻게 준대요?” 안 그래도 궁금해 물었던 터라 들은 대답을 들려줬다. “말이 속사포처럼 빨라서 못 알아들었어요. 딱 한 마디, 남편이 물 주는 일 담당이라는 말만 알아들었어요.” 그녀 왈, “오! 핵심만 알아들었네요.” 그렇지, 저 많은 화분 물 담당이 누구인가 그게 중요하지, 내 일이 아니라면 어떻게 주느냐가 뭔 상관이람.

아랍인들이 증축한 성벽길을 따라 산책 중인 론다의 시민. 김남희 제공

코르도바의 안뜰 축제는 은근한 중독성이 있었다. 집집마다 분위기가 달라서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공통점이 있다면 화분에 심은 작은 꽃이든 마당에 심은 큰 나무든 이 지역에서 가장 흔하고 잘 자라는 초목들 위주라는 점이었다. 제일 흔한 건 부겐빌레아, 제라늄, 몬스테라, 셀로움, 오렌지와 레몬 나무. 반면 우리나라에서 인기 있는 은엽아카시아, 올리브, 유칼립투스 등은 들판 어디에나 흔해서인지 안뜰에서는 구경도 못 했다. 비싸고 이국적인 식물이 아니라 이 땅에서 잘 자라는 꽃들 위주라는 점이, 그러면서도 화려함을 한껏 내보이는 점이 소박하면서도 열정적인 안달루시아 사람들 같다고나 할까.

그들이 일군 정원은 갇힌 자들이 만든 세계였다. 스스로 일상을 작은 정원 안에 가둔 사람들. 안달루시아의 여름 태양은 살인적이다. 한여름에는 세시간에 한번씩 물을 줘야 한다고 말한 정원의 주인도 있었다. 이 식물들 때문에 이들은 단 며칠의 여행조차도 망설이며 살아왔을 것이다. 대신 일년에 보름, 이렇게 자신의 정원을 공개해 세상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걸까. 덕분에 나처럼 부유하는 삶을 사는 이도 붙박인 삶을 엿볼 수 있게 되었다.

매일 남의 집 안마당을 들여다보고 있자니 내 집이 사무치게 그리워졌다. 집에 가지 않는 것과 가지 못하는 건 달랐다. 집에 갈 수 없는 몸이 되니 간절히 가고 싶은 유일한 곳이 집이 되어버렸다. 론다의 협곡도, 코르도바의 안뜰도 완벽한 위로는 되지 못했다.

론다의 구시가지 노천카페에서 맥주를 마시는 독일 관광객들. 김남희 제공

80만원과 맞바꾼 귀국길

출국 이틀 전, 코로나 자가진단키트로 테스트를 해봤다. 결과는 애매했다. 희미한 선이 보일락 말락 했다. 귀국 날짜를 잘못 잡은 탓에 불안은 점점 커졌다. 확진 뒤 10일이 지나야 음성 확인서 제출을 면제해주는데 나는 하루가 모자랐다. 날짜를 잘못 센 탓이었다. 하루만 늦게 변경했어도 검사 결과와 상관없이 돌아갈 수 있는 건데! 무조건 음성을 받아야만 했다. 출국 전날 밤, 책상을 단정히 정리하고 앉아 다시 코를 찔렀다. 다행히 이번에는 한 줄이었지만, 자가 검사는 믿을 수가 없었다. 출국일 아침, 긴장과 초조와 불안에 휩싸인 채 유전자증폭(PCR) 검사를 받으러 갔다. 마드리드에는 한국 유전자 회사의 지부가 있었다. 한국인이 친절하게 맞아주니 그것만으로 안심되었다. 공항으로 가야 할 시간까지 두시간이 남았을 때, 메일이 왔다. 메일을 클릭하는 손이 살짝 떨리고 있었다. 결과는 음성. 나는 콧노래를 부르며 공항으로 향했다.

이스탄불 공항에서 환승하기 위해 기다릴 때였다. 항공사 직원이 외쳤다. 오버부킹이니 하루 더 머무는 이에게 현금 80만원과 호텔을 제공하겠다고. 평생 기다려온 순간이었다. 공짜로 하루 더 여행하고 돈까지 받다니, 내게는 이 이상 좋은 일이 없었다. 번쩍 손을 들려는 순간, 내 집에 대한 갈망이 해일처럼 밀려와 나를 삼켰다. 올라가려는 팔을 애써 누르며 나는 얌전히 인천행 비행기에 올랐다. 80만원과 맞바꾼 귀국길이었다.

김남희 여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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