끔찍했던 인플레의 기억 독일의 '물가 잡기' 전쟁
인플레이션 문제 해결을 위해 독일 노사정 대표가 모였다. 7월4일 오후 올라프 숄츠 총리와 독일 노동조합총연맹(DGB)의 야스민 파히미 위원장, 독일 경영자협회(BDA) 라이너 둘거 회장은 공동 기자회견을 열었다. 숄츠 총리의 제안에 따라 마련된 ‘협력 행동’의 첫 만남을 보고하는 자리였다. 이 자리에서 숄츠 총리는 “현재의 위기는 몇 달 안에 해결되지 않을 것”이라며 장기 인플레이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사회 구성원 간의 긴밀한 협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숄츠 내각은 이번 만남 이후 인플레이션에 따른 사회적 고통을 경감하는 방안을 도출하기 위해 ‘협력 행동’ 모임을 정기적으로 가질 것이라고 발표했다.
파히미 노동조합총연맹 위원장은 ‘공동의 노력이 필요한 역사적 상황이고 가계와 기업 모두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불경기를 막고 일자리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야 한다고 발언했다. 그는 임금 상승이 인플레이션으로 이어지는 악순환 문제는 현재 존재하지 않는다며, 인플레이션에 따른 임금 인상 요구를 비판하는 일부 여론을 의식한 발언을 했다.
둘거 경영자협회 회장 또한 “현재의 인플레이션은 공급 문제 때문에 발생한 것이지, 임금 상승 때문이 아니다”라며 파히미 위원장을 지지하는 발언을 했다. 둘거 회장은 현재의 가계 부담을 해소할 방안으로 세금과 사회보장 분담금 감면 같은 정책을 통해 세금 공제 후 임금을 상승시킬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그는 노사 간 임금협상 문제에 대해서는 ‘노사 당사자 간에 협상이 필요한 일이지 총리실에서 관여할 일이 아니다’라며 선을 그었다.
첫 ‘협력 행동’ 모임이 성사되기는 했지만 이 모임을 통해 인플레이션에 따른 문제를 해결하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독일 언론은 예상했다. 상황이 심각할 뿐만 아니라 노사정 간 입장 차이 그리고 정부 내각의 연정 파트너 사이에 의견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독일에서 지난 5월 소비자물가지수는 전년 동기 대비 7.9% 상승해 50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6월에는 유류세 인하, 대중교통 요금 인하 정책 등으로 소비자물가지수 상승률이 소폭 하락했지만, 정책이 끝나고 나면 다시 인플레이션이 심화될 수도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물가상승의 가장 큰 요인은 에너지 가격으로 6월 소비자 에너지 가격 상승률은 전년 동기 대비 38%에 달했다. 식료품 가격 상승률 또한 높아 12.7%에 이르렀다. 독일은 1920년대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을 경험한 바 있다. 당시의 경제적 혼란이 히틀러가 정권을 잡는 데 영향을 주었다는 평가도 있다. 당시 1달러(USD) 가격이 4조2000억 마르크에 달할 정도로 인플레이션은 심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2차 세계대전 이후 물가안정은 독일의 중요한 경제 목표 중 하나였으며, 최근 30년간 독일의 물가상승률은 0.3~3.1%에 머물렀다.
근거리 대중교통 무제한 이용 티켓
독일 정부는 이미 물가상승에 따른 가계 부담을 줄이기 위한 정책을 실시했다. 대표적 예가 가계 부담 경감과 에너지 소비 감축을 동시에 목표로 하는 ‘9유로 티켓(약 1만2200원)’이다. 이 티켓은 6~8월 한시적으로 제공되며 9유로를 내고 이 표를 구매한 사람은 한 달 동안 독일 전역에서 근거리 대중교통을 무제한으로 이용할 수 있다. 독일 공영방송 ZDF의 보도에 따르면, 6월 이용권은 약 2100만 장이 판매되었으며 열차의 경우 코로나19 이전 대비 승객이 약 15% 증가했다. 독일 교통기업연합(VDV)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9유로 티켓을 이용해본 응답자의 약 89%가 해당 티켓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9유로 티켓 판매에 따라 독일 정부가 지출해야 할 비용은 25억 유로(약 3조3900억원)로 예상된다. 이 밖에도 독일 정부는 가계 부담을 덜어주기 위한 정책으로 6~8월 휘발유 가격을 리터당 35.2센트, 경유의 경우 16.7센트의 유류세 인하를 실시한다. 여기에 7월에는 일회성으로 300유로의 보너스 아동수당이 기존 아동수당에 추가로 지급된다. 여기에 7월부터 재생에너지 분담금이 폐지되었다. 독일 연방 경제·기후보호부의 보고에 따르면, 2021년 2인 가정 연간 표준 전기 사용량인 3500㎾/h를 사용할 경우 내야 했던 재생에너지 분담금은 227.50유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가상승에 따른 가계 부담 우려는 줄지 않고 있다. 독일 공정복지협회(DPW)의 ‘2022년 빈곤 보고서’에 따르면, 2021년 독일의 빈곤층 숫자는 1380만명으로 통일 이후 가장 높은 수치를 기록했다. 2020년과 2021년 빈곤층 증가율은 유례없이 큰 폭이었고, 직업 활동을 하는 사람 중에서도 최소한 사회문화적 삶을 향유할 수 있을 만큼의 돈을 벌지 못하는 사람이 크게 증가했다. 〈슈피겔〉은 이 보고서를 인용하면서 인플레이션이 심각한 2022년에는 빈곤층 증가가 더 클 것으로 예상했다. 특히 소득에서 기본 생활비의 비중이 높은 청년층이나 연금생활자, 저소득층이 물가상승으로 인해 빈곤층으로 떨어질 확률이 높을 것으로 내다봤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연정에 참여하고 있는 사민당과 녹색당 내부에서는 장기 실업급여 수급자에 대한 지급액 인상이나 9유로 티켓의 연장, 연금생활자를 위한 적극적인 대책 등에 관한 요구가 나오고 있다. 여기에 각종 세금 감면 및 지원 대책에 따른 재정 부담을 줄이기 위해 고소득자나 코로나19 유행 기간 혹은 인플레이션 상황에서 돈을 더 많이 번 기업에 대한 세금 인상 같은 요구도 잇따르고 있다. 하지만 문제는 또 다른 연정 파트너인 자민당이다. 자민당 소속 크리스티안 린드너 재무장관은 연정 협상 당시부터 세금 인상뿐 아니라, 정부의 채무 증가에 대해서도 강하게 반대해왔다. 또한 린드너는 이미 실행한 정책의 효과가 어떻게 나타나는지 올 하반기 동안 살펴보고 2023년이 되어서야 새로운 지원 정책을 실시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그는 이미 많은 사람에게 충분한 지원이 돌아갔고 2022년 국가 예산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다며 강하게 버티는 중이다. 여기에 린드너는 경제 활성화를 위해서는 더 많은 창업을 하고 사람들이 추가 근무를 더 해야 한다고 말해 강한 비판을 받기도 했다.
프랑크푸르트∙김인건 통신원 editor@sisain.co.kr
▶좋은 뉴스는 독자가 만듭니다 [시사IN 후원]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