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급 가지고 뭘?'..컵밥도 비싸져 '집콕'하는 공시족들의 삼중고

이홍근 기자 2022. 7. 23. 08:00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22일 서울 노량진 공무원시험 학원 광고. 김창길기자

9급 공무원 시험을 준비 중인 주모씨(27)는 매일 오전 8시 지하철을 타고 ‘공시촌’으로 불리는 서울 노량진에 간다. 오후 6시까지 수업이 있어 점심 한 끼는 학원 근처에서 해결한다. 즐겨 먹는 메뉴는 돈까스와 제육볶음. 고물가 여파로 어느 분식점에 가도 이전보다 최소 500원부터 1000원 이상을 더 지불해야 한다. 9월부터는 수업이 오후 8시30분까지 있는데 벌써부터 저녁식사 비용이 부담으로 느껴진다. 하루에 왕복 교통비 2500원에 식비 1만4000원. 지난달 학원비와 교재비로 130만원을 쓴 주씨의 통장 잔고는 빠르게 줄고 있다.

지난 21일 찾은 서울 동작구 노량진 학원가 일대에는 가격 인상을 선언한 음식점이 즐비했다. 직업전문학교와 공무원 시험 전문 학원 사이에 위치한 한 음식점 메뉴판에는 가격란에 스티커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다음주에는 여기서 모든 식메뉴 가격을 500원씩 일제히 올린 새 메뉴판이 걸릴 예정이라고 했다. 20년간 이곳에서 일해온 신모씨(64)는 “다 올랐지만 그중에서도 식용유 가격이 제일 많이 올랐다”면서 “학생들이 선호하는 돈까스도 도매가 기준으로 봉지당 가격이 1500원 올라 값을 올릴 수밖에 없다”고 했다.

식비와 교통비를 확 줄이기 위해 ‘현장 강의’를 포기하는 사례도 있다. 서울 은평구의 한 스터디카페에서 수험 생활을 하는 윤모씨(27)가 딱 그런 케이스다. 윤씨는 인터넷 강의에 의존해 9급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 노량진 학원에서 현장 강의를 듣고 싶었지만 매일 지출해야 하는 돈이 너무 늘어날 것이 부담돼 포기했다. 지난달 퇴사해 실업급여로 생활 중인 윤씨에게는 매일 두 끼의 외식비도 큰 부담이다. 윤씨는 “돈을 아끼기 위해 집에서 밥을 먹는다”고 했다.

고물가에 신음하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겪는 일이라 치더라도, 공시족들에게는 악재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밀려왔다. 윤석열 정부에서 발표한 공무원 인원 감축 계획은 수험생들을 근본적으로 힘들게 하고 있다. 행정안전부는 지난 12일 매년 공무원 수를 부처별로 정원의 1%씩 감축하겠다고 밝혔다. 벌써부터 공시생들은 공직의 ‘좁아진 문’을 피부로 느끼고 있다. 공시생 2년차인 김모씨(27)는 “지원하는 직군의 선발인원이 작년에는 420명 수준이었는데 올해는 374명”이라며 “불안한 마음이 크다”고 했다. 주씨 역시 “경제형편 때문에 오랫동안 수험 생활을 할 수 없는 입장이라 (인원 감축이) 부담스럽다”고 했다.

22일 서울 노량진 컵밥 거리. 일부 노점들의 문이 닫혀 있다. 김창길기자

현장 강의를 듣는 수험생이 줄어든 여파로 주변 상권은 분위기가 우중충했다. 대로변에 있는 한 공무원 학원 창문에는 ‘상가 임대문의’라는 문구가 적힌 종이가 붙어 있었다. 코로나19 이전만 해도 늘 수험생들로 붐볐던 노량진의 상징 ‘컵밥 거리’도 마찬가지였다. 이날 컵밥 등을 판매하는 노점들의 영업 현황을 살펴보니 전체 24곳 가운데 7곳만 영업 중이었다. 노량진 컵밥은 저렴한 가격으로 한 끼를 떼울 수 있는 데다 다양한 토핑을 얹어 즐길 수 있는 음식으로 전국적인 유명세를 얻었다. 그런 ‘원조 컵밥’ 가게들이 줄어든 학원 수강생 규모와 재료비 급등을 견디지 못하고 이처럼 사양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최근 불거진 대통령실 9급 직원 사적 채용 논란과 이에 대한 권성동 국민의힘 대표 직무대행 겸 원내대표의 발언은 이처럼 ‘불난 집’과 같던 노량진의 상황에 ‘부채질’을 한 격이었다. 상처에 소금을 김씨는 “공무원 시험에 도전한 이유가 가장 공정한 시험이라고 생각해서였는데 인맥으로 취업하는 걸 보니 황당하다”고 했다. 권 원내대표가 채용 논란을 두둔하는 과정에서 9급 공무원을 ‘박봉 말단직’이라는 취지로 폄하해 상처를 받았다는 반응도 있었다. 주씨는 “인생을 걸고 공부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9급 가지고 뭘’과 같은 발언은 조심했어야 했다”고 했다.

이홍근 기자 redroot@kyunghyang.com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