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틴 때문에 오른 물가, 금리 올리면 잡히냐고요?"[이지경제]
인플레이션(물가의 지속상승)이 전세계를 덮치며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와 한국은행에 이어 유럽중앙은행(ECB)까지 주요 중앙은행들이 빅스텝(한 번에 0.5%p 금리인상)을 단행하는 등 공격적인 금리인상에 나서고 있다. 긴축적 통화정책을 펴 수요측 물가상승 압력을 잠재우고 물가상승 악순환을 부를 수 있는 '기대 인플레이션' 상승을 막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이 같은 중앙은행들의 통화긴축정책이 경기침체를 불러올 뿐 물가를 잡는데는 큰 효과가 없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최근 물가상승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등에 따른 에너지·원자재 가격 오름세 때문인 만큼 수요를 줄인다고 물가를 잡긴 어렵다는 논리다. 과연 맞는 말일까?
최근 물가상승이 원자재 가격 상승에 따른 비용인상형 인플레이션에 해당하는 것은 사실이다. 공급 측 물가상승압력이 인플레이션에 상당히 큰 영향을 주고 있다.
그러나 원자재 가격 상승 역시 우크라이나 사태에 따른 공급망 교란 외에도 유동성 확대의 영향을 받는다. 부동산 급등기 자주 언급되던 '투기적 수요'가 원자재 시장에도 존재하는 것이다.
한국은행이 지난 4월28일 발표한 '원자재 가격 변동요인별 물가 영향 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원자재 가격 변동에 영향을 주는 요인 중 유동성 확대와 경기회복 등 글로벌 요인이 50%를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예컨대 국제유가가 배럴당 40달러 상승했다면 그 중 20달러는 유동성 확대 때문이라는 것이다.
석유 등 개별상품 단위의 변동요인을 뜻하는 개별상품 요인은 30%, 두바이유·브렌트유 등 특정 생산지의 영향을 받는 개별상품 요인은 20%를 차지했다.
김찬우 한은 조사국 물가연구팀 과장은 "2000년대 이전에는 상품그룹 요인의 영향이 컸으나 2000년 이후 글로벌 요인의 영향력이 크게 확대됐으며 코로나 위기 이후에는 그 영향이 더욱 강화된 것으로 나타났다"며 "글로벌 요인은 주로 전세계적인 유동성 확대에 의해 초래됐으며 코로나 위기 이후에는 글로벌 공급병목이 가세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했다.
그럼 원자재 가격은 어떤 과정을 거쳐 완화적 통화정책의 영향을 받게 됐을까.
일반적으로 중앙은행이 기준금리를 내리고 유동성을 풀기 시작하면 그 돈은 가장 먼저 은행과 채권시장으로 간다. 기준금리란 콜금리 등 금융회사간 단기 자금거래에 적용되는 금리이기 때문이다. 즉 기준금리를 내린다는 것은 은행 등 금융회사들이 싼 가격으로 자금을 조달할 수 있게 된다는 뜻이다.
그러나 은행은 정부와 달리 수동적인 성격을 갖는 조직이다. 기준금리 인하로 조달비용이 내려가면 더 싼 이자로, 과거에는 빌려주지 않았을 대상에게 자금을 공급해 줄 수는 있지만 돈을 빌릴 의사가 없는 사람에게 강제로 돈을 빌려줄 수는 없다.
그래서 지난 코로나19(COVID-19) 위기 국면에서 각국 중앙은행들이 기준금리를 인하하자 실물보다 자산시장이 먼저 반응했다.
공장을 짓고 사람을 더 고용하는 실물투자 결정은 이자율 외에도 다양한 변수가 존재하고 투자결정에 시간이 걸리지만, 자산에 투자하는 것은 보다 빠르게 수익을 현실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봉쇄조치로 경제가 마비될 위기였던 코로나 초기 국면에선 이자율이 아무리 내려가도 기업이 생산시설에 투자하기 어려운 상황이기도 했다.
반면 기준금리가 0%대로 내려간 상황에서 돈을 빌려 이자가 플러스인 채권을 구입하는 것은 무조건 이득이 된다. 가격 안정성만 확보된다면 부동산, 주식, 원자재에 투자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코로나 위기 국면에서 확대된 유동성은 가격 변동 리스크(위험)가 적은 자산으로 우선 이동한 것으로 보인다. 부도위험이 없거나 매우 적은 국채 가격이 가장 먼저 오르기 시작했고, 부동산 가격이 뒤이어 올랐다. 한국 부동산은 이미 가격이 오르고 있던 와중이었고 '부동산 불패 신화'가 팽배해 오르는 속도가 빨라졌다. 전세계적으로도 부동산은 실수요층이 분명한 시장이라 유동성 확대와 맞물려 가격이 올랐다.
부동산 다음에는 주식 가격이 오르기 시작했다. 코로나 위기 초반에는 주가가 큰 폭으로 하락했으나 어느 정도 바닥이 확인된 후 부동산 시장과 마찬가지로 '지금 가격보단 떨어지긴 어렵다'는 믿음이 대규모 유동성 공급과 결합됐다.
채권, 부동산, 주식시장으로 향했던 유동성은 마지막으로 원유·원자재 시장으로 향한 것으로 보인다. 통상 원자재는 가격 변동성이 주식에 비해서도 매우 크다. 또 대부분의 경우 공급우위의 시장이기 때문에 관련 정보를 파악하고 있는 전문가가 아니라면 손실을 볼 우려가 상당하다.
그러나 백신 배포 이후 세계경제가 살아나며 공급병목현상이 발생했고,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하며 가격이 오를 수밖에 없는 상황이 조성됐다. 오갈 곳 없는 돈이 가격이 오를 가능성이 높은 곳으로 유입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일례로 뉴욕주식시장에 상장된 대표적인 원유 상장지수펀드(ETF) US오일펀드(USO) 거래량은 지난해 7~12월보다 올해 1~6월 동안 약 12.9% 증가했다. USO 자산규모는 2019년말 12억2000만달러(약 1조6000억원)에서 지난 21일(현지시간) 기준 27억달러(약 3조5000억원)으로 증가했다. 원유 선물 등에 직접 투자하는 자금 등을 고려하면 원자재 시장에 유입된 유동성은 상당할 것으로 보인다. 투기적 수요가 증가하면서 에너지·원자재 가격은 실수요-공급간 불일치 이상으로 오른 것으로 보인다.
주요국 중앙은행들의 기준금리 인상은 이 같은 과정을 거꾸로 돌리기 위한 것이다. 미 연준이 금융시장에 공급하는 자금을 줄이면 코로나 위기 국면에서 나타났던 자산가격 상승이 반대방향으로 나타날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한국과 미국 등 주요국 주식시장에서는 가격 하락이 나타나기도 했다. 이후 원자재 시장에 유입된 투기적 자본이 회수되는 시점이 오면 최근 물가상승의 원인이 된 에너지·원자재 가격이 하락할 수 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장기화되고 있고 미국과 유럽 등 서방이 러시아산 원유에 대한 제재를 지속하고 있어 당장은 국제유가가 배럴당 100달러 아래로 내려오지는 않고 있으나 휴전, OPEC(석유수출국기구) 등의 증산으로 시장 분위기가 달라지면 줄어든 유동성의 영향이 나타날 것으로 보인다.
여가까진 글로벌 유동성을 좌우하는 미국의 금리인상에 대한 얘기였다. 그럼 국제 원자재 가격에 거의 영향을 못 주는 우리나라 한은은 왜 굳이 금리를 올리는 걸까.
우리나라가 통화긴축을 선택한 것에는 원화가치를 높여 환율을 안정시키려는 목적도 있다. 특히 한국의 경우 원유를 포함한 대부분의 원자재를 수입하는 만큼 환율이 국내 물가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 한은이 기준금리를 올려 미 정책금리와 보조를 맞추지 않으면 원/달러 환율이 상승해 수입물가 상승압력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또 금리인상으로 기대 인플레이션을 잡지 않으면 원자재 가격 급등으로 오른 생산자물가가 소비자물가로 전이되고, 이것이 다시 인건비 등을 매개로 물가상승의 악순환에 빠질 수 있다는 한은의 판단도 작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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