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드풀'에서 '파친코'까지.. 통통 튀는 한국어 말맛, 이 남자가 살렸다

허윤희 기자 2022. 7. 23.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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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원작 뛰어넘는 '초월 번역'
스타 영화번역가 황석희
영화 번역가 황석희는 "번역을 잘하려면 평소 글을 많이 읽고 쓰는 게 중요하다. 다른 사람이 번역한 자막도 많이 보고, 한국 드라마와 영화를 즐겨 본다"고 했다. 최근 가장 재미있게 본 드라마는 '우리들의 블루스'.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최고의 번역가는 아니더라도, 관객과 가장 가까운 번역가는 될 수 있겠다.’

영화 번역가 황석희(43)는 처음 번역가가 됐을 때 이런 목표를 세웠다. “번역가와 관객이 서로 터치가 없으면 오해가 쌓이고 표현도 격해진다”는 것이다. 올해로 번역가 17년 차이자 극장 영화 번역만 10년째. ‘보헤미안 랩소디’ ‘1917’ ‘돈 룩 업’ 등 영화 500여 편을 번역한 그는 원작의 개성과 한국어 말맛을 동시에 살리는 번역으로 마니아들에게 ‘믿고 보는’ 번역가로 통한다. 수퍼 영웅물 ‘데드풀’에선 19금(禁) 대사를 찰떡같이 번역해 “번역가 상 줘야 한다”는 찬사를 받았고, ‘스파이더맨 홈커밍’에선 이모티콘을 자막에 넣는 과감한 시도로 호평받았다.

황씨가 번역한 주요 영화 포스터들. 왼쪽부터 '데드풀' '스파이더맨 홈커밍' '보헤미안 랩소디' '1917' '돈 룩 업'.

이젠 좀 느슨해질 법도 하건만, 여전히 인터넷 게시판을 샅샅이 검색해 자신과 관련된 글을 찾고 댓글까지 모조리 읽는다. 필요하면 직접 댓글도 달고, 익명의 그들과 설전도 벌인다. “관객의 평가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니까요. 좋다, 후지다는 평가도 참고가 되지만, 더 중요한 건 그분들이 주장하는 내용이에요. 황당한 주장이라도 들여다보면 배울 게 있어요.”

황석희는 최근 애플TV+ 드라마 ‘파친코’를 번역해 또 한번 화제가 됐다. “한국어가 익숙지 않은 미국 제작진과 수정 대본을 주고받느라 번역 작업만 1년 넘게 걸렸다”며 “가장 고생했지만, 제일 호화로운 작업이었다”고 했다. 경기도 일산에서 만난 그가 명함을 내밀었다. ‘세상을 번역하다, 영화 번역가 황석희.’ 스크린 속 엔딩 크레디트처럼, 까만 바탕 아래에 흰 글씨가 찍혀 있었다.

◇‘파친코’로 OTT 첫 도전

-‘파친코’ 번역에 참여했다.

“영어 대본을 한국어로 바꾸는 작업을 했다. 사투리가 중심인 드라마라서, 처음 의뢰받았을 때 부산·제주 사투리 전문가를 붙여달라는 조건을 걸었다. 흔쾌히 해주시더라. 자이니치(재일 교포) 일본어 대사도 제가 일단 영어를 한국어로 바꾼 뒤, 일본어 담당 팀이 다시 자이니치의 언어답게 억양까지 넣어 바꿨다.”

-OTT(온라인 동영상 서비스)는 처음인데.

“지금까지는 배우가 발화(發話)한 걸 갖고 작업했다면, ‘파친코’는 내가 작업한 대본을 배우가 발화한 거라서 방향이 전혀 달랐다. 작업 자체는 너무 고되고 힘들었는데, 작업 여건은 호사라고 해도 될 정도로 지원을 많이 해주셨다. 번역에만 집중할 수 있는 게 좋았다. 역사 고증 팀도 따로 있어서, 그 시대에 ‘여보’라는 말이 있었는지까지 확인해줬다. 수 휴(Soo Hugh) 작가님이 수정 대본을 줄 때마다 번역을 다시 해야 했다. 그러다 보니 대본이 최종, 최최종, 최최최종, 레알최종, 레알 최최최최종까지 갔다. 처음 메일 주고받기 시작한 게 2020년 7월이니까 번역만 1년 넘게 걸렸다.”

애플 TV+ 드라마 '파친코' 포스터.

-제작진이 한국어가 능숙하지 않아서 작업이 힘들었을 것 같다.

“수 휴는 한국계 미국인이지만 한국어를 자연스럽게 구사하지는 못한다. 제가 한국어로 번역한 걸 다른 번역가가 다시 영어로 ‘역번역’해 확인하는 작업을 거쳤다. 예를 들어 극 중 고한수(이민호)가 젊은 선자(김민하)에게 ‘안 잡아먹으니까 걱정 마’라고 말하는 대목이 있다. 처음 대사는 ‘You must know it. I mean no harm(너도 알잖아. 나는 해를 끼치지 않아)’라고 적혀 있었다. 이걸 한국어에 맞게 번역한 뒤, 다시 영어로 ‘I’m not gonna eat you’라고 직역하는 거다. 수 휴가 ‘이건 내 의도가 아닌데’라고 보내면, 한국어로 ‘안 잡아먹는다’가 여기선 ‘걱정하지 말라’는 뜻이라고, 일일이 설득해야 했다. 수 휴는 각본 겸 총괄 제작이라 대본뿐 아니고 배우, 촬영, 촬영지 섭외 등 모든 것을 신경 써야 했다. 한 에피소드에만 수십 번 이메일이 왔다 갔다 하니까 나중에는 스텝들이 미쳐가더라.(웃음)”

-요구한 건 다 반영됐나.

“제 요구의 85% 정도 반영된 것 같다. 문화적 차이 때문에 어색한 게 있는데 설득되지 않는 것도 많았다. 가령 7화에서 요셉과 이삭의 대화에 ‘몸의 윤곽’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두려움이 내 몸을 멋대로 주무르게 놔두면요, 나중엔 내 몸의 윤곽(outline)조차 낯설어질 거예요. 그걸 내 몸이라고 할 수 있겠어요?’ 굉장히 문학적인 대사이지만, 한국어로는 좀 어색하다는 의견을 드렸는데 반영되지 않았다. 작가 입장에선 포기할 수 없는 표현들이 반드시 있고, 당연히 그걸 지켜주는 게 맞는다. 원작자의 의도를 가능하면 온전히 시청자에게 전달하는 게 번역가의 역할이니까.”

지금 국내 개봉관에서 활동하는 전업 번역가는 5명 정도. 황석희는 "케이블 TV 드라마를 수천 편 했는데도 경력을 전혀 인정해주지 않더라"며 "딱 한 편만 영화 번역을 하게 해달라고 하늘에 빌고 또 빌었다"고 했다.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딱 한 편만 번역하게 해주세요”

처음부터 번역가를 꿈꾼 건 아니었다. “어릴 땐 막연하게 선생님이 되고 싶어” 사범대에 진학했고, 강원대 영어교육과 재학 중 임용 고시는 포기하고 밴드에서 기타를 쳤다. “주변 사람들은 다 내가 음악 할 거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그냥 노래 좋아하는 아저씨지만.(웃음)” 자잘한 문서 번역 아르바이트로 시작해 케이블 TV에서 미드 수천 편을 번역했지만, 극장 영화를 번역할 기회는 쉽게 오지 않았다.

-개봉관 영화 번역을 맡게 된 건 ‘로또 맞은 수준의 행운’이라고 말했는데.

“영화사에선 익숙한 번역가랑 일하는 게 편하지 굳이 새 번역가 찾는 모험을 할 이유가 없다. 전업 영화 번역가라고 하면 한 달에 최소 2편에서 4편 번역하는데, 지금 국내 개봉관에서 활동하는 전업 번역가는 5명 정도밖에 안 된다. 케이블 8년 차쯤 됐을 때 ‘왕좌의 게임’ 등 내로라하는 드라마를 많이 했는데도, 개봉관쪽에선 완전 초보였다. 경력을 전혀 인정해주지 않더라.”

-영화 번역은 어떻게 시작했나.

“‘선샤인 클리닝’이라는 작은 영화를 처음 했다. 수입사에서 큰 영화 사오면서 딸려오는 패키지 영화였는데, 그것으로 꿈을 이뤘다고 생각했다. 한 편 번역한다고 해서 영화 번역가로 안착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으니까. 딱 한 편만 영화 번역을 하게 해달라고 하늘에 빌고 또 빌었다. 스크린에 ‘번역 황석희’ 이름 뜬 걸 봤으니 그것으로 됐다 했는데, 4년 뒤 그 수입사에서 다시 연락이 왔다. 제가 번역한 드라마 ‘뉴스룸’을 인상 깊게 봤다면서 좀비 영화 ‘웜바디스’를 맡겨보고 싶다고. 그분은 제가 4년 전에 거기랑 작업한 것도 모르고 있었다.(웃음)”

황석희는 "관객 수준이 높아진 게 번역가 처지에선 괴롭기만 한 게 아니다"라며 "게시판에서 번역가를 욕하거나 오역을 지적하는 글이 나오면, 이제는 다른 분이 나서서 반박한다. 건전한 담론도 그만큼 늘었다"고 했다.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영어보다 중요한 건 한국어 능력

황석희의 번역 인생은 이때부터 수직 상승했다. ‘웜바디스’는 애초 기대작이 아니었지만 당시 한석규 주연 영화 ‘파파로티’를 꺾고 관객 117만명을 동원했다. 이후 ‘나우 유 씨 미’ ‘레드2’까지 300만씩 들면서 업계에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그는 “천신만고 끝에 개봉관에 입성해도 첫 작품을 잘못 만나거나 관객의 외면을 받으면 다음 기회가 안 온다. 저는 세 작품이 연타석으로 잘돼 운이 정말 좋았다”고 했다.

-수퍼 영웅물 ‘데드풀’로 소위 대박이 났다. ‘번역가 상 줘야 한다’는 반응이 화제가 됐는데.

“사실 ‘데드풀’을 기점으로 일이 확 늘어났다거나 입지가 넓어진 건 아니다. 관객들 사이에서 인지도가 올라간 건 확실히 있다. 우연히 맡은 작품이었는데, 마블 영화이고 그때까지 제가 했던 영화 중에 제일 스케일이 컸다. ‘번역가 상 줘야 한다’는 댓글 보고 너무 기뻐서 ‘좋아요’가 얼마나 올라가는지 계속 체크했다.(웃음)”

-원래 영어를 잘했나.

“전혀. 해외에 나간 것도 신혼여행 때 한번 간 게 처음이자 끝이다. 영어를 잘하면 물론 번역하는 데 좋겠지만, 번역은 해석과는 다른 행위다. 영어보다 중요한 건 한국어 능력이다. 한 문장을 번역하는 데 10이라는 시간이 필요하다면, 딱 보고 직관적으로 파악하는 시간은 2, 나머지 8 동안 문장을 만든다. 물론 2라는 능력도 중요하다. 파악하는 데 8이라는 시간이 걸리면 총 16이 걸리는 거니까.”

-영화 한 편 번역하는 데 보통 얼마나 걸리나.

“일주일에서 열흘 정도. 요즘은 주로 밤 9시부터 새벽 3시까지 일한다.”

-오역 논란이 나올 때마다 적극적으로 대처하기로 유명한데.

“그것도 일의 일환이라고 생각한다. 중학생도 알만한 단어인데 어이없는 오역 실수를 낸 적도 있다. 관객 지적이 맞으면 빨리 인정하고 사과한다. 오타는 번역가의 숙명 같은 거다. 스스로 여러 번 감수하고, 영화사 내부에서도 수차례 감수하고 냈는데도 오타가 나온다. 무성의한 게 아니라는 걸 이해해주시면 좋겠다.”

영화 '데드풀'의 주연배우인 라이언 레이놀즈는 한 인터뷰에서 "(번역가 황석희를) 진짜 만나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에 대해 묻자 황석희는 "에이, 그건 질문자가 그렇게 유도한 거죠"라면서도 "정말 감사하고 영광스럽다"며 웃었다.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오역 두려움에 공황장애까지

소셜미디어에서 활발히 소통하는 그에게도 참기 힘든 순간은 있었다. 가령 ‘지잡대 논란’. 한 네티즌이 “지잡대(지방 소재 대학을 비하하는 뜻의 속어)인데 어떻게 번역가 잘하시네요’라는 질문을 남겼고, 그는 “프로필 보니 좋은 학교 다니시네요. 그런데 학교 간판이 나를 대변할 수 있는 시기는 금세 끝나요’라고 답했다. 하지만 이후에 거친 공격이 계속되자 황씨가 일침을 가했다. “청춘에서 약간만 더 나이를 먹으면 학교 간판만으론 아무것도 증명할 수 없는 나이가 돼버린다. 진심으로 수의로 과잠(점퍼) 입을 거 아니잖아. 딱 이 선까지만 장난으로 받아줄게요.”

-소통은 좋지만 무례한 네티즌들이 분명 있다.

“에너지가 많이 들고 감정 소모를 많이 하게 되더라. 심하면 치료까지 필요하다.”

-공황 장애 치료까지 받았다던데 이런 일 때문이었나.

“몇 년 전에 오역 논란이 크게 터진 적이 있다. 다른 번역가가 작업한 영화였는데, 마침 두 달 뒤에 ‘데드풀2’ 개봉을 앞두고 있었다. 기사가 수십 건씩 뜨고 모든 게시판에서 번역가를 욕하는 거다. 그걸 보고 있는 심정이 어땠냐 하면, 내 앞에 어떤 사람이 길을 걸어가다가 지뢰를 밟고 몸이 누더기가 된 걸 보는 기분. 이제 내가 걸어갈 차례인데, 가뜩이나 ‘데드풀2’라는 작품은 자막에 대해서 할 말이 많은 영화인데. 절대 그분이 실력이 없어서 오역이 나온 게 아니다. 잘한다고 지뢰를 피해 갈 수 있는 게 아니고, 저도 무조건 밟는 거다. 지뢰가 크냐 작으냐 하는 문제일 뿐.”

-어떻게 증상이 왔나.

“아내랑 재래시장에 장을 보러 가다가 인도에서 갑자기 멈춰버렸다. 사람이 많아지기 시작하니까 숨이 안 쉬어지고 식은땀이 났다. 제가 원래 둥글둥글한 사람이라 아내가 너무 놀랐다. 서둘러 집에 왔는데 그 뒤에 더 심해졌다. 뒤에서 누가 공격할 것 같아서 식당에 가도 벽에 딱 붙어 앉아야 했다. 그때부터 피드백 이메일 계정을 닫았다.”

-결국 ‘데드풀2’도 번역은 호평을 받았는데.

“다행히 큰 오역은 없었지만, 새 작품 내놓을 때마다 두려움이 커진다. 공황 증세는 나아졌지만, 극복되는 건 아닌 것 같다.”

황석희는 해외서 살아본 경험이 없다. 해외 여행도 신혼여행 때 처음 나간 게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그는 "영어보다 더 중요한 게 한국어 능력"이라며 "처음 직관적으로 뜻을 파악하고, 한국어 문장을 만드는 데 대부분의 시간이 걸린다"고 했다.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자막이라는 1인치 장벽, 이미 넘어섰다

-사람들이 그만큼 번역에 대해 적극적으로 평가하는 시대가 된 것 같다.

“재밌는 일이다. 관객 수준이 그만큼 높아진 거니까. 게시판에서 번역가를 욕하거나 오역을 지적하는 글이 나오면, 이제는 다른 분이 반박한다. 원래 글자 수가 제한돼 그렇게 쓸 수밖에 없고, 함축했지만 같은 뜻이라고 두둔하는 분도 늘었다. 그러다 보면 건전한 담론이 오가니까 번역가 처지에서 괴롭기만 한 건 아니다.”

-지금은 댓글 안 쓰나.

“전처럼 많이 달지는 않는다. 그래도 보기는 전부 다 보고 있다.(웃음)”

-번역가로서 꼭 지키는 원칙 같은 게 있나.

“소수자나 소외 계층을 노골적 언어로 비하하는 표현은 쓰지 않는다. 예를 들어 ‘asshole’을 한국어로 ‘병신’이라고 쓰지 않는 거다. 기계적 원칙은 아니고, 영화의 문맥 내에서 꼭 써야 한다면 쓰지만.”

-봉준호 감독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자막이라는 1인치만 넘으면 더 많은 영화를 즐길 수 있다’고 했다. 번역가로서 환영할 만한 수상 소감인데.

“감독님 말씀이 맞는다. 그 1인치의 장벽을 최대한 낮추는 게 번역가의 일인데, 지금은 감사하게도 워낙 훌륭한 작품이 많이 나오니까 자막의 허들이 아무리 높아도 전 세계에서 다 봐주신다. 번역가들의 실력이 늘어가니까 허들의 높이도 갈수록 낮아지겠지만, 한편으론 장벽이 1인치든 10인치든 상관없는 단계까지 온 것 같다. 한국어 작품을 영어로 번역하는 분들은 엄청난 부담을 느끼실 거다. 세상에, 이렇게 ‘한영 번역’이 이슈가 되는 경우가 언제 있었나. 넷플릭스에서도 좋은 한영 번역가를 구하려고 혈안이 돼 있고.”

그는 “번역가가 천직인지는 모르겠지만 다시 태어나도 분명 하고 싶은 직업 중 하나일 것”이라며 “OTT와도 경계가 흐려지고 번역 시장이 변하고 있지만, 최대한 오랫동안 영화 번역가를 하는 것이 꿈”이라며 웃었다. 심지 굳은 미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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